참치의 살은 갈색? 붉은색?
초밥 먹으러 갈 때마다 간간이 나오곤 하는 질문 중에 이런 게 있다: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빨간 참치살이 참치 통조림의 그 갈색 참치살과 같은 물건이 맞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략 같은 참치가 맞다. 그냥 맞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대략 맞다고 하는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겠다. 어쨌거나, 이런 질문이 나오는 이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우리가 참치캔에서 보는 참치살은 산화된 것이다. 원래 참치살은 붉은 색이지만, 산소와 반응하면 갈색이 된다. 초밥 장인이 참치 초밥을 만드는 모습을 잘 지켜보면 냉동고에서 랩 같은 걸로 포장된 참치살 덩어리를 꺼내서 필요한 만큼만 자르고 다시 싸서 보관하는 걸 볼 수 있다. 냉동고 안에서 참치살이 산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반면 우리가 먹는 캔 속의 참치살은 이런 조치가 없기 때문에 가공 과정에서 완전히 산화되어 갈색이 된다.
이 과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볼 수도 있다. 마트에서 참치살을 사다가 불판에 굽거나 하면 불판에 닿은 쪽부터 서서히 갈색으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출처: flickr |
그럼 두 번째 이유는? 사실 이게 더 중요하다. ‘참치’라는 생선이 따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참치라는 말은 특정한 생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생선의 종류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도 맥락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다르다.
학술적으로 참치는 고등어과 다랑어속 생선들(tuna)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다.(심지어 표준어도 아니다. 다랑어가 표준어가 맞는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참치라는 말이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해방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것 빼면 어원에 대해서도 정설이 없다고.) 이 안에는 참다랑어, 눈다랑어, 황다랑어, 날개다랑어, 가다랑어가 포함된다. 하지만 상업적인 의미에서는 새치과 생선들(billfish) 역시 포함된다. 둘의 생태적 특성이 비슷해서 함께 어획되어 함께 팔리기 때문.
문제는 이 생선들이 다 같은 생선이 아니라는 거다. 다랑어와 새치의 가격이 다르고, 같은 다랑어도 종류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며, 다랑어 한 마리에서도 부위별로 가격과 용도가 다르다.
우리가 회나 초밥으로 접하는 참치는 참치의 왕이라 불리는 참다랑어와 그보다 급이 약간 떨어지는 눈다랑어, 황다랑어 그리고 황새치로 만들어진다. 여기서 참다랑어와 눈다랑어의 어획량을 합쳐 봐야 전체 다랑어의 1%도 안 된다. 그나마 대중적인 어종인 황다랑어까지 합쳐 봐야 30%도 안 된다.
크게 썰려 나온 다랑어 살. 일단 이렇게 크게 썰어 낸 뒤… (*출처: flickr) |
…이렇게 부위별로 다시 잘려서 매매된다. (*출처: flickr) |
반대로 통조림에 들어가는 참치는 날개 다랑어와 가다랑어로 만들어진다. 특히 가다랑어는 전체 다랑어 어획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싼 어종이라 마트 가보면 만 원도 안 한다. 일식집에서 접하는 가쓰오부시 국물을 낼 때 쓰이는 물건이 이거다.
위에서 언급한 황다랑어에서 횟감, 초밥 재료로 쓸 부위가 죄다 팔려나간 뒤에 남은 ‘잡고기’가 섞여 들어가기도 하지만, 이것들만 따로 모아서 통조림을 만들기도 한다. 이따금 참치캔 중에서 약간 더 비싸고 맛도 더 고소한 물건이 있는데 이게 바로 황다랑어로 만들어진 통조림이다.(…이렇게 써 놓긴 했지만 어차피 참치 통조림 원료의 90% 가량은 남태평양에서 잡히는 가다랑어다.)
내가 앞에서 ‘대략 맞다’고 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회나 초밥에 쓰이는 참치나 통조림에 들어가는 참치나 다랑어라는 점에서는 맞다. 하지만 구체적인 어종도 다르고, 가격과 취급 방법도 이렇게 차이가 난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맞는 것은 아닌 것이다.(여기서 날개다랑어하고 황새치는 색도 빨간색이 아니다. (날개다랑어는 흰색, 황새치는 복숭아색) 참치 무한 리필집이나 회전 초밥집에서 나오는 참치는 비교적 싼 눈다랑어 등살이나 황새치가 대부분이다. 뱃살의 경우 최고급 어종인 참다랑어는 말할 것도 없고 눈다랑어나 황새치도 제법 비싸다.)
단순히 생선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지만, 사실 참치살의 정체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겠다. 내가 아직 학부 신입생이던 2000년대 초반, 갑자기 ‘쌀나무’라는 표현이 언론에 회자된 적이 있었다. 초등학생들이 매일 먹는 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몰라서 선생님한테 쌀나무는 어떻게 생겼냐고 질문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이런 것도 모르는 요즘 애들 어떡하냐는 푸념을 한동안 여기저기서 보곤 했는데, 실은 이런 소리를 하는 어른들도 오십보 백보라고 할 수 있다. 당신들도 마트에 쌓여 있는 캔 참치하고 초밥집 참치가 어떤 물건인지 긴가민가 하기는 마찬가지잖아.
이 참치는 무엇이느뇨 |
너는 이것도 모르냐는 얘기가 아니다. 단지 극도로 분업화되어 있는 현대 사회에서 최종 소비자의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지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걸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거다. 지금 이렇게 참치에 대해 썰 풀면서 잘난 척 하고 있는 나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나 자기 일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는 소비자의 역할 이상을 맡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쌀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초등학생의 모습은 곧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대상이 바뀌었을 뿐.
또 하나는 이런 것이다: 어떻게 하루 세 끼 밥을 챙겨 먹으면서도 ‘쌀나무’의 존재를 모를 수 있었을까? 정답을 말하자면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챙겨먹기 때문에 오히려 모르는 거다. 예를 들어서 80년대 중반에 태어난 나는 마트에 계란이 30개 들이 판 단위로 포장되어 있는 모습을 의심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마트 갈 때마다 그렇게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고등학생이 된 뒤에야 계란이 대량생산되어 마트에 쌓이게 된 것은 경제 발전과 공장식 축산 덕분에 가능해진 최신 현상이라는 걸 알게 됐다. 60년대만 해도 짚으로 포장한 다섯 개들이 계란을 명절 선물로 주고받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마트에 쌓여 있는 계란만 보다 보니 그게 최신 현상이라는 걸 의심조차 못 하고 있다가 한참 뒤에야 그걸 알게 된 셈인데, 이쯤 되고 보면 매일 먹는 밥을 의심하지 않다가 쌀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초등학생을 탓할 수가 없다. 의심하지 않으면, 모를 수밖에 없다.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니까.
그런 점에서, 내가 뭘 모르는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무지를 벗어나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나는 최소한 내가 무식하다는 건 알고 있소” 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우리들 대부분은 지적 수준이 소크라테스의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2500년 전에 비해 훨씬 더 복잡해졌다. 그러니까, 스스로의 무식함을 인정해야 할 사람은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인 것이다.
노잼글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