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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않은 ‘KFC 영감님’ 이야기

※ Menuism의 「Everything You Probably Didn’t Know About Colonel Sanders」를 번역한 글입니다.

 

KFC 포장지에 그려진 커널의 모습이나 최근 광고에서 놈 맥도널드(Norm MacDonald)가 그린 그의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커널 샌더스(Colonel Sanders)가 누군지, 실존 인물이었는지도 모를 가능성이 높다. 분명 홀랜드 샌더스(Harland Sanders)는 실존 인물이었고 실제 모습도 그랬다.

잘 알려지지않은 ‘KFC 영감님’ 이

Harland Sanders

그는 1890년 인디애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토마토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던 6살 무렵 어린 동생들을 위해 요리를 배웠다.

돌봐 줄 사람이 없었어도 우리는 잘 지냈다. 집에 불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정도는 알았다.

1902년, 어머니가 재혼했다. 홀랜드와 새아버지 사이의 관계는 그리 좋지 못했다. 이듬해 14살이 된 홀랜드는 집을 떠나 농장에 취직했다. 이후 몇 년 동안 농장과 시내 전차에서 일한 다음, 나이를 속이고 군에 입대했다.

 

하지만 커널(대령)이란 칭호를 얻은 곳은 군은 아니었다. 켄터키 커널이란 주에서 비공식적으로 수여하는 명예 칭호로 샌더스는 1935년 처음 이 칭호를 받았고 이후 증명서를 분실한 후 1949년 다시 받았다. 이렇게 재차 커널이란 칭호를 받은 후 샌더스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상징이 된 흰색 정장과 나비넥타이를 하기 시작했다. 밀가루 얼룩을 숨기기 위해 흰색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샌더스는 경력을 쌓아가면서 법률을 익혔고, 보험이나 타이어나 램프를 팔기도 했으며, 페리선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고, 산파 일을 하기도 했다. 급한 성격 때문에 몇 번의 잘못된 사업적 도박을 감행했다. 싸움을 피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법정에서 주먹다짐했던 것처럼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일자리를 잃곤 했다. 하지만 그의 쌈닭 기질이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을 만든 요인일지도 모른다.

 

대공황 기간 샌더스는 “지옥의 땅(Hell’s Half-Acre)”으로 불리는 켄터키주 코빈에서 쉘의 주유소를 운영했다. 그는 쓰던 식탁을 이용해 지나가는 트럭 운전자들에게 밥을 팔기 시작했다. ‘햄 & 스테이크’ 메뉴가 인기를 얻었고, 길 건너편에 ‘샌더스 카페(Sanders Café)’를 개업했다.

 

그는 고속도로를 달리던 운전자들이 자기 주유소에 들르도록 커다란 표지판을 세웠다. 하지만 경쟁 스탠더드 오일 주유소를 운영하던 매트 스튜어트가 표지판에 페인트를 칠해버린 일이 일어났다. 샌더스는 다시 그러면 “빌어먹을 머리를 날려버리겠다”라고 협박한 후, 표지판을 고쳤다.

 

스튜어트가 다시 표지판에 페인트칠한다는 소리를 듣자 샌더스는 두 명의 직원과 총을 들고 달려갔다. 스튜어트도 총으로 대응했고, 샌더스의 직원 한 명이 그 총에 맞아 사망했다. 샌더스는 스튜어트의 어깨를 총으로 쐈다. 스튜어트는 살인죄로 18년 형을 받았고, 샌더스도 체포되었지만 정당방위로 풀려났다. 스튜어트가 감옥에 있는 사이 샌더스는 지역의 주유소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다.

잘 알려지지않은 ‘KFC 영감님’ 이

처음부터 샌더스의 식당에서 프라이드치킨을 팔았던 것은 아니었다. 요리하는 데 30분이나 걸렸기 때문이었다. 샌더스는 프라이팬보다 닭고기를 더 빨리 익힐 수 있는 압력 용기로 실험을 시작했다. 또한 “11종의 허브와 향신료(11 herbs and spices)”로 알려지게 될 레시피를 완성했다. 1939년 음식 평론가 덩컨 하인즈는 샌더스 카페를 전국의 음식점 가이드 ‘굿 이팅(Good Eating)의 어드벤처 부문에 포함시켰다.

 

샌더스의 사업은 잠시 호황을 이뤘지만, 몇 가지 요인이 지속적인 성공을 어렵게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휘발유 배급제는 관광객들의 자취를 감추게 만들었고, 1955년 새로 생긴 고속도로는 샌더스의 식당에서 멀었다. 나중에 두 번째 부인이 된 당시 애인 클라우디아의 도움으로 자신의 치킨 튀기는 방법과 레시피를 프랜차이즈를 내기로 결정했다.

 

샌더스의 친구 피트 하먼이 1952년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첫 번째 커널스 치킨 지점을 냈다. 치킨 이름을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이라고 짓고, 지금의 유명한 버킷 모양의 포장 용기를 만들어낸 사람이 바로 이 하먼이었다. 당시 샌더스는 60대였고, 얼마 안 되는 사회 보장 수표로 살았다. 전기작가 조쉬 오저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얼굴에 분장하고 캐딜락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드라이브스루 식당 주인들에게 자기 레시피를 사용하는 대가로 치킨 1마리당 5센트의 수수료를 달라고 부탁하고 다녔다. 그는 차 뒷좌석에서 잤고, 구두로 계약을 맺었다.

1964년이 되자, 샌더스는 600곳이 넘는 프랜차이즈 매장을 보유하게 되었고, 자기 지분을 KFC에 2백만 달러에 매각했고, 자기 초상권에 대한 대가는 정기적으로 받기로 했다. 75세 때의 일이었다.

 

1966년 KFC는 상장되었고, 주주는 수백만에 달했다. 샌더스는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처럼 느꼈다. 그는 상장 이후 처음 열린 주주총회에서 40분 동안 경영진을 욕하면서, 경영진이 자기 평판을 망쳤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많은 가맹점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회사의 대변인 역할을 하면서 고약하게 굴었고, 나중에는 KFC를 고소하려 하기까지 했다. 이 사건은 샌더스가 KFC와 메뉴를 더 이상 비판하지 않는 조건으로 100만 달러에 합의되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1970년, 그는 뉴요커지와의 인터뷰에서 KFC의 새로운 그레이비 소스 레시피를 “내 개도 싫어한다.”고 비난했다.

공동묘지에서 제일 부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커널 홀랜드 샌더스는 1980년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대부분 재산을 자선 단체에 기부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이미지는 KFC의 마케팅 캐리커처가 되었고, 종종 그를 기억하는 이들을 통탄스럽게 했다.

필자 피우스 (블로그)

전업 백수 투자자이며, 네이버 블로그 "책도둑"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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