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어울리는 프랑스 영화
가을에 어울리는 프랑스 영화 한 편이 있다.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나 홀로 감상하기 좋은 예술영화다. 여름과 추석으로 이어진 대작들의 공세 속에서 사색적인 영화에 갈증을 느낀 관객이라면 이름을 메모해두고 조용히 감상해보자.
작년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은곰상) 수상작인 영화 <다가오는 것들>은 삶에 큰 변화를 겪는 50대 중년 여성 나탈리(이자벨 위페르)의 이야기다. 고등학교 철학 교사인 그녀는 성인이 된 두 자녀의 엄마, 동료 철학 교사인 남편의 아내, 혼자 사는 친정엄마의 딸로 바쁜 삶을 살고 있다.
그녀는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오가지만 그녀의 삶에는 숭숭 구멍이 뚫린다. 학교에서는 연금개혁 반대 시위에 동참한 학생들이 교사들의 학교 출입을 막아서고, 남편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고 고백하며, 출판사는 팔릴 것 같지 않다는 이유로 철학책 출판을 거절하는데 이 와중에 엄마는 외로워서 죽고 싶다며 자살소동을 벌인다.
나쁜 일은 늘 한꺼번에 닥친다는 속담처럼 나탈리에겐 악재가 겹친다. 하지만 그녀는 담담하게 변화를 수용하고는 서서히 희망을 찾아간다. 그 희망은 새로운 남자친구를 만난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식으로 찾아온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나탈리를 따라다니면서 그녀의 심경 변화를 보여주는데 시간을 할애한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단 한 번의 아주 작은 일탈을 한다. 그녀가 아끼는 제자이자 작가인 파비앙(로망 콜랭카)이 살고 있는 오두막을 찾아가서 혁명을 꿈꾸는 급진적인 청년들과 어울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곳에서 확인한 것은 자신에겐 자신의 길이 따로 있다는 단순한 진리일 뿐이다. 한 청년이 행동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때라고 말하자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나도 68혁명때 다 해봤는데 지금은 열정이 없네.”
영화의 제목인 ‘다가오는 것들’은 이처럼 나이 들면서 마주하게 되는 것들에 대한 은유로 가득 차 있다. 한때 참신하다고 각광받았던 그녀의 철학책은 이제 낡았다며 퇴짜를 맞고, 한때 모델이었던 엄마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삶을 견디지 못해 몇 번이고 죽을 결심을 하는데 나탈리는 엄마의 초라한 노후가 자신의 미래인 것 같아 불안하기만 하다.
영화는 흔들리는 삶 속에서 나이만 먹고 있다는 것이 진자의 운동처럼 명징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을 섬세하고 깊이 있게 담아낸 수작이다. 나탈리는 영화 말미에 “행복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가 아니라 무언가를 진정으로 원하는 과정 속에 있다”고 말하는데 이 말처럼 영화는 결과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계속되는 삶을 보여주는 과정 속에서 공감을 이끌어낸다.
나탈리를 연기한 이자벨 위페르는 칸, 베니스, 베를린 등 소위 ‘3대 영화제’에서 모두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적 있는 프랑스 대표 배우다. 홍상수 영화에도 두 편이나 출연하고 자주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을 정도로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100편이 넘는 그녀의 출연작들 중엔 <피아니스트>(2001)의 광기, <의식>(1996)의 정열 등 다양한 모습이 있는데 <다가오는 것들>에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감정 연기를 선보인다.
영화의 감독은 프랑스의 촉망받는 여성감독 미아 한센뢰베로 그녀는 실제 자신의 부모의 삶에서 영화의 모티프를 따왔다. 그녀의 부모 역시 나탈리 부부처럼 모두 철학교사였고 그녀가 스무살 때 이혼했다. 어릴 때부터 철학에 익숙한 환경에서 자라온 덕분에 영화 속에는 아도르노, 루소, 파스칼, 호르크하이머, 레비나스 등 프랑스와 독일 철학자들의 책과 문장이 풍부하게 인용돼 있기도 하다.
미아 한센뢰베 감독 |
17세 때 배우로 영화 경력을 시작한 한센뢰베는 당시 자신의 출연작의 감독이던 프랑스의 거장 올리비에 아싸야스 감독과 26살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2009년 결혼해 딸을 낳아 기르고 있다. 영화 속에 엄마와 딸을 동시에 뒤치닥거리 해야하는 나탈리의 모습이 현실적으로 묘사된 것 역시 그녀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그녀는 주로 자신 주변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 그녀의 전작 <에덴>(2014)은 음악에 빠진 실제 남동생을 모티프로 한 영화였고 <내 아이들의 아버지>(2009)에선 기자인 사촌을 다루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의 일상이 예술 작품의 소재 창고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녀의 차기작은 세대 차이 나는 남편과의 일화를 다룰 예정이라고 하니 부부의 속사정이 궁금한 팬들은 기대를 가져봐도 좋겠다.
마지막으로 <다가오는 것들>은 철학이 필수과목인 프랑스의 고등교육 현장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나탈리는 학생들에게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가?” “진리는 어떻게 확정되는가?” 같은 질문을 던지고 학생들은 각자 의견을 밝힌다. 단답형 문제에 익숙한 한국 고등학교에선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교육정책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일견을 권한다.
지금은 신문을 만들고 있지만 언젠간 영화를 만들고 싶은 남자.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