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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남한에서 활동한 최악의 할머니 간첩이라 불리는리선실



5F9B2246-CB68-4628-9EB1-F13036D79444.jpeg 90년대 대한민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전설적인 남파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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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선실’









이선실은 1917년 제주도에서 태어난뒤 해녀일을 하다 홀로 부산으로가 1937년 어부인 김태종과 결혼한뒤 1940년 남편과함께 대마도로 이민가서 살던중 한국의 해방소식을 듣고 1947년 남편과함께 귀국하여 부산으로 돌아왔지만 남편이었던 김태종은 대마도에서 바람이난 상태였고 이선실을 버리고 다시 대마도로 밀항해버림. 이렇게 배신을당해 맨탈이 흔들리던중 자신의 고향인 제주에서 4.3사건이 터지고 거기에 동생까지 학살당함. 이 사건에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 정당인 남조선노동당에 가입하고 북한에서 파견된 간첩과 동거를시작했는데 1950년 4월 동거중이던 간첩이 체포되고 자신에게도 수배령이떨어지자 북한으로 월북해버림.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고 잠시 서울로내려와 활동한뒤 다시 북으로 돌아가 사상교육을 받고 각종 위원회의 간부자리를 역임하면서 커리어를 쌓아가다 1963년 이선실은 김일성에게 직접 탄원서를 써서 자신을 남한 공작전선에 투입시켜달라함. 이에 김일성은 이선실을 김일성정치군사대학에 보내 공작원으로 훈련시킨뒤1966년 남한에 잡입시킴.






이렇게 남한으로 파견된 이선실은 서울,부산에서 5년간 활동하다 1971년 북으로 돌아갔으며 1973년 5월 다시 침투해 5개월간 활동하다 8월에 돌아감. 당시 남한에서는 김신조사건이후 남한내 간첩에대해 신경이 곤두서있었고 내부단속에 혈안이 돼있었지만 이선실은 단 한번의 발각없이 성공적인 두번의 임무수행으로 북한에서는 유능한 공작원이라고 인정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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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74년 이선실은 예전에 북송된 전북 완주 출신 제일교포 신순녀로 위장해 일본과 한국으로 오가며 활동을 이어나감. 그러다 북측에서 남한사회에 곳곳에 지하조직을 결성하라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1980년대부터 남한내 고정간첩으로 활동하면서 1995년에는 완전한 적화통일을 이룬다는 목표를세워 건국이후 최대 간첩조직인 남한조선노동당을 만들고 한국사회 각계각층의 인물들 수백명을 포섭해 세력을 키워나가다 1990년 이선실은 북한으로돌아가 간첩으로써는 최고위급인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고 다신 남한에 돌아오지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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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92년 안기부에서 대남공작 지도부인 이선실을 중심으로 약 400명의 조직원으로 이루어진 건국이래 최대규모의 간첩단이 1995년 적화통일을 목표로 남한내에서 활동하고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내며 대한민국사회가 뒤집어짐. 그리고 이사건의 여파는 당시 대선을앞둔 선거판까지 이어졌는데 당시 거물급 정치인이었던 대선후보의 비서실까지 이 조직원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조직원 수십명을 국가보안법으로 체포했지만 이미 북으로 돌아간 이선실은 잡지못함. 그리고 이선실은 북한에서 고위직을 역임하다 2000년 사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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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선실은 2022년 개봉한영화 
헌트의 대남총책역할의 모티브가 됨.


2025.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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