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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by 머니투데이

'오리털 패딩'을 분해해 봤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시내를 다녀 봤습니다. 장애인들 심정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생전 안 보였던, 불편한 세상이 처음 펼쳐졌습니다. 뭐든 직접 해보니 다르더군요. 그래서 체험해 깨닫고 알리는 기획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입니다. 제가 만든 말입니다. 체험과 저널리즘(journalism)을 하나로 합쳐 봤습니다. 사서 고생한단 마음으로 현장 곳곳을 몸소 누비겠습니다. 깊숙한 이면의 진실을 알리겠습니다. 소외된 곳에 따뜻한 관심을 불어넣겠습니다.

[패딩 속 오리·거위털 꺼내보니…한 벌에 15~25마리 솜털, 산(山)처럼 수북이 쌓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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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털 패딩을 해체하고 있는 기자. 독자들의 안구 보호를 위해 허리는 블러 처리했다. 신문지는 장모님 협찬./사진=어지럽힌 방을 보며 레이저를 발사하고 있는 남기자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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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에 앞서 고백한다. 오리털 패딩 한 벌, 거위털 패딩 한 벌을 갖고 있다. 어두운 하늘색 오리털 패딩은 2013년 겨울에 샀다. 아내(그땐 여자친구)와의 추억이 담겼다. 파랑색 거위털 패딩은 2017년 겨울에, 장모님이 생일 선물로 사주셨다.


영하로 내려가는 아침엔 늘 꺼내 입었다. 두툼한 패딩 하나면 추위도 두렵잖았다. 따뜻한 걸 넘어 대중교통 안에선 덥기까지 했다. 칼바람이 심할 땐, 너구리 털이 달린 모자 안에 얼굴을 숨겼다. 그건 내게 그냥 옷이었고, 오리나 거위나 너구리가 아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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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털을 어떻게 뽑길래 이런 몰골이 되었을까. 늘 입고 다녔던 패딩에 대한 고민이, 이 사진 한 장 때문에 시작됐다./사진=국제동물보호단체 페타(PETA)

가슴 털이 뜯긴 오리 사진 한 장을 우연히 봤다. 그때부턴 내가 누린 따뜻함이 무수히 많은 생명의 비명 덕분인 걸 알았다. 그렇다고 차마 버릴 용기도 없었다. '이미 산 거잖아, 다음엔 고민하면 돼', 그런 말로 얼버무렸다.


추운 겨울을 앞두고 백화점에 진열된 패딩들. 알록달록, 올록볼록 멋져 보이는 옷들. 그 안에 감춰져 보이지 않았던 건 뭘까. 그 민낯을 드러내 한 번쯤 함께 생각해 봤으면 싶었다.


그래서 오리털, 거위털 패딩을 각각 한 벌씩 분해해보기로 했다(아이디어 주신 양영은 KBS 선배, 감사합니다).

버리는 패딩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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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이 보내준 오리털, 거위털 패딩과 오리털 침구들. 버릴 패딩이 있다면 보내달라고 했었다. 감사합니다. 원래 다 분해하려 했는데, 도저히 감당이 안 돼 자제했다. /사진=남형도 기자

내 패딩을 분해하려 했으나, 비싼 걸 버리고 새로 사려니 솔직히 엄두가 안 났다. 인정한다. 실은 아직 대출금이 많이 남기도 했다.


SNS로 독자들에게 요청했다. 버릴 예정인 오리털, 거위털 패딩이 있으면 보내달라고. 몇 개는 직접 가서 받기도 했다. 오리털 네 벌, 거위털 한 벌과 오리털 이불과 베개까지 모였다.


회사 한편에 켜켜이 쌓인 택배 상자를 보고 지나가던 선배가 "형도야, 퇴사하냐"고 물었다(그건 제 마지막 체헐리즘으로).


패딩 보내주신 김예지 독자님, 박민지 독자님, 이혜진 독자님, 이순우 독자님, 박슬기나 독자님 정말 고맙습니다.

오리털 패딩을 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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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감을 두 번 찢으니, 충전재로 쓰인 오리털이 드러났다./사진=남형도 기자

작업은 집에서 하기로 했다. 먼지가 심할 거라며 아내가 심히 우려했으나 대안이 마땅찮았다. 방 하나를 다 비우고, 문을 꼭 닫고, 끝날 때까지 안 나오겠다고 약속했다.


오리털 패딩 하나를 먼저 뜯기로 했다. 성분 표시를 보니 오리 솜털이 75%, 오리 깃털이 25%였다. 솜털은 오리 가슴팍의 가볍고 보드라운 털이고, 깃털은 바깥 부분을 덮는 털이란다. 흔히 쓰는 덕다운(down)이란 게 솜털이 들어갔단 뜻이다. 통상 솜털과 깃털을 합쳐 만들고 비율은 패딩마다 조금씩 다르다.


패딩 안쪽을 칼로 북 찢었다. 털이 바로 나올 줄 알았더니 아녔다. 안에 볼록볼록한 하얀색 옷이 하나 더 있었다.


그걸 다시 갈랐더니 하얀 오리털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제 꺼낼 차례였다.

산처럼 쌓인 오리털, 이렇게 많을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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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오리털 패딩 한 벌에, 이렇게 많은 털이 담겨 있을 줄은 몰랐다./사진=남형도 기자

손에 닿은 첫 느낌은 무척 폭신하고 부드러웠다. 한 움큼씩 집어 꺼내는데, 여기저기로 달아나 공기 중에 떠다니며 달라붙었다. 옷은 물론이고 얼굴이며 머리털에도 붙었다. 도배지에도 붙는 걸 보며 아내 얼굴이 떠올랐다. 등에 서늘한 땀 한 줄기가 흘렀다.


부유하는 오리털이 코끝을 간지럽혀 재채기가 나왔다. 폐에 오리털이 가득 찬 상상을 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다. 방역 마스크를 쓰고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등 부위 오른쪽과 왼쪽, 그리고 가슴 부분까지 오리털을 다 꺼냈다. 양팔 부분에도 털이 가득 차 있었다. 다 집어내기가 힘들었으나 최대한 놓치지 않으려 했다. 털 하나도 허투루 넘어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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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따뜻했었구나, 이래서 아팠겠구나./사진=남형도 기자

그리 오래 패딩을 입었는데 내용물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고작 한 벌,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오리털은 이렇게나 많았다. 눈 내린 겨울 산처럼 쌓였다. 생각보다 너무,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넣어야만 따뜻했을까. 창문을 활짝 연 뒤 털들을 보며 멍하니 앉아 쉬었다.

거위털 패딩도 뜯었다

마음을 다잡고 갈색 빛바랜 거위털 패딩을 집었다. 이것도 뜯어보기로 했다. 성분 표시를 보니 거위 솜털이 90%, 깃털이 10%였다. 모자엔 라쿤(너구리) 털도 달렸다.


아까처럼 등 부위 안감부터 뜯었다. 올록볼록한 흰 옷이 또 있었다. 칼로 갈랐더니 이번엔 거위털이 모습을 드러냈다. 빛깔은 오리털보다 좀 더 노르스름했다. 감촉은 똑같이 보들보들했고 가볍게 떠다녔다.


거위털 패딩은 털이 더 많이 나왔다. 롱패딩이 아님에도 그랬다. 목을 감싸는 부분과 모자까지 거위털이 촘촘하게 들어 있었다. 이래서 따뜻했구나 싶었다. 잘 모를 땐 그냥 좋았었다. 가르고 꺼내고, 또 가르고 다시 꺼냈다. 고된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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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위털 패딩을 분해한 모습. 저 자그마한 패딩 한 벌에 이렇게 털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사진=남형도 기자

빵빵했던 패딩은 그러는 새 홀쭉해졌다. 대신 왼편엔 거위털 한 무더기가 쌓였다. 털 무더기 안에 손을 넣었다. 따뜻했다. 난데없이 털을 뜯겼을 거위들을 생각했다. 서글펐다. 따뜻한데 슬픈 기분은 처음이라 낯설었다.

패딩 한 벌에 오리 15~25마리가 '비명'

이 많은 털은 오리와 거위가 내지른 무수한 비명으로 만들어졌다. 전 세계 오리털과 거위 털의 80%가 중국에서 생산된단다.


국제동물보호단체 페타(PETA)가 공개한 영상(2014년)을 봤다. 먼저, 우람한 손으로 거위 머리와 목을 꽉 잡는다. 달아나려 버둥거리고 힘차게 발버둥 치지만 소용없다. 옴짝달싹 못 하게 무릎에 끼우고 누른다.


그리 살아 있는 거위 털을 강제로 뽑는다. 여러 번 얻을 수 있고, 상태가 좋아서다. 빠르게 손이 지나갈 때마다, 거위는 아파서 비명을 지른다. 날카롭고 절박한 고음이다. 가슴팍의 연한 솜털이 뽑혀 눈물방울처럼 흩날린다. 날개를 애처롭게 퍼덕이지만, 자비도 멈춤도 없다.


생털이 뽑힌 고통이 끝난 뒤에야 바닥에 풀려난다. 가슴팍은 털이 뭉텅이로 빠져 시뻘건 살갗이 드러났다. 피부가 찢어지고 상처가 났다. 이게 끝이 아니다. 생후 10주째부터 6주마다 손으로 잡아 뜯는다. 알 낳는 거위는 최소 5번, 최대 15번까지 고통을 겪다 죽임을 당한단다.


그리고 다시 눈앞에 놓인 거위털과 오리털을 봤다. 패딩 한 벌에 15~25마리의 가슴털이 들어간다. 새삼 다시 어루만졌다. 흩날리는 털 무더기가 앙칼진 비명처럼 보였다. 고통을 달래듯 천천히 어루만졌다. 쉬이 잠잠해지지 않았다.

이미 산 사람, 앞으로 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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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서 찍은 거위 솜털과 깃털./사진=남형도 기자

여기까지 읽었다면 세 가지 부류로 나뉠 것 같다. 첫째, 이미 이 사실을 알고 패딩을 고민해서 샀거나 아예 안 산 사람. 둘째, 나처럼 이런 줄 모르고 패딩을 이미 구매한 사람. 셋째, 앞으로 패딩을 살 예정인 사람.


이미 산 패딩은 어찌할까. 김성호 성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는 "그렇다고 패딩을 버리고 또 사면 쓰레기 등 문제가 또 생긴다. 입던 건 오래 잘 입는 게 좋다"고 했다. 김 교수는 20년 전에 산 옷도 닳을 때까지 입는다고 했다.


패딩을 앞으로 살 사람에겐 이런 당부를 했다. 김 교수는 "새로 패딩을 살 땐 내 따뜻함만 생각하지 말고, 다른 존재 입장에서도 따져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고민해서 살 수 있단 얘기다. 동물 깃털이 아닌 웰론, 신슐레이트 같은 보온용 신소재를 쓴 패딩들이 나오고 있다. 착한 패딩, 비건 패딩이라 부르기도 한다. 공기를 충전재로 한 제품도 있다. 살아 있는 동물에게 털을 뽑지 않았다는 '윤리적 다운 인증(RDS)'도 있다.

소비자만 각성할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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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엔 그래도 거위나 오리 솜털을 쓰지 않은, 비건 패딩이 트렌드가 됐다. 생각하는 윤리적 소비다./사진=뉴스1

이런 정보를 갖고 서울 중구 한 백화점을 둘러봤다. 겨울 초입이라 곳곳에 화려한 패딩이 걸려 있었다. 바깥에 털이 달려 있지 않음에도 이젠 보였다. 패딩 하나에 털이 얼마나 많이 들어 있는지.


그러나 선택할 수 있는 폭은 너무 좁았다. 소비자만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란 얘기다.


한 유명 패딩 매장에 들어가 "거위털과 오리털을 안 쓴 제품을 보여달라"고 했으나 직원은 "그런 제품은 없다"고 답했다. 또 다른 매장에서 물어봤더니 "비건 패딩"이라며 제품을 보여줬다. 그러나 전체로 따지면 소수에 불과했다.


김 교수는 "소비자에게만 '네가 안 쓰면 안 팔린다'고 하는 건 너무 먼 이야기"라며 "소비자 책임만 부각할 게 아니라, 기업들이 책임감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패딩 메이커가 얼마만큼 윤리적으로 만들어졌는지, 한눈에 볼 수 있게 인증하고 정리할 필요도 있다고 했다. 이 또한 기업과 소비자 단체 역할이다. 소비자가 일일이 찾아보는 게 힘들어서다.

오리털 패딩을 수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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뜯어진 오리털 패딩을 수선했다. 가능한 오래오래 입고 싶어서./사진=남형도 기자

안방 옷장에 있는 내 패딩 두 벌. 그중 한 벌을 꺼내어 수선 가게로 갔다.


취재하다 지난해 찢어졌다. 이를 기워달라고 맡겼다. 3일 뒤 찾아가란 연락이 왔다. 새것처럼 멀쩡해져 보기 좋았다.


머리털 하나를 잡아당겼다. 아팠다. 몇 가닥을 함께 쥐고 당겼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팠다. 스스로에겐 자비로운 손길 아닌가. 차마 뽑지도 못하고 놨다. 그런데 내 따뜻함을 위해 너무 많은 오리가 , 거위가 고통을 겪었다.


그러니 참으로 미안하다. 그래서 최대한 아껴서 패딩을 입으려고 한다. 가능한 오래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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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epilogue).

찰흙으로 오리를 만들었다. 실제 크기(50~60cm)와 똑같이.


초등학교 이후 처음이라 적잖게 서툴렀다. 한 시간 넘게 걸렸다. 그러는 동안 오리를 생각했다. 어설프게나마 비슷하게 만들어졌다.


패딩서 꺼낸 털을 흙빛 오리에게 살포시 붙였다. 제자릴 찾아가는 거였다. 다 붙이고도 털이 산더미처럼 남았다. 왜 그리 많이 뽑았는지 모르겠다.


하얗고 보드라운 털로 채워진 오리를 쓰다듬었다. 찢어진 상처를 보듬듯이. 혹여나 내가 더 추워도 네가 따뜻하면 좋겠다고. 많이 아팠겠다고. 미안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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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형도 기자 hum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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