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 젊은 여자가"…'핑크색 임산부석' 수난사(史)
[2015년 7월 '눈에 잘 띄게' 디자인 변경…"비워두자" 인식 늘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 멀어]
임산부의 날을 하루 앞둔 지난해 10월9일 서울 지하철 3호선 전동차 내 임산부 배려석이 비어있다./사진=뉴스1 |
또 다시 '핑크색 임산부 배려석'이 수난이다. 서울 지하철 내 마련된 임산부 배려석 얘기다. 정확히는 배려석이 아니라, 배려 받아야 할 임산부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 초기 임신이라 티가 안 나서, 만삭이어도 양보 받지 못해서, 혹은 그냥 모른 척해서 긴 시간 서서 가야 하는 불편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얼굴을 심하게 붉히는 일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은 지난 2015년 7월 처음 '핑크색'으로 바뀌었다. 기존엔 엠블럼 스티커만 부착돼 있던 좌석을, 등받이와 바닥까지 모두 색깔을 바꿨다. 주목도를 높여 임산부석임을 쉽게 인지토록 하기 위해서였다. 엠블럼엔 '허리를 짚고 있는 여성' 그림을 넣고, 바닥엔 '내일의 주인공을 위한 자리'란 안내 문구도 넣었다. 지하철 2·5호선 2884개 좌석에 처음 도입돼 점차 확대돼 왔다.
사실 이 과정에 이르는 것 자체도 험난했다. 지하철 노약자석은 사실상 '경로석'이 돼 있었다. 거기에 앉으려던 몇몇 임산부들과 노인 사이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한 노인이 지팡이로 임산부를 폭행하는 일도 있었다. 인식이 환기된 건 지난 2011년 정도부터였다. 그해 10월10일 임산부의 날에 '만삭 임산부'가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고, 관련 청원을 포털사이트에 올리기도 했었다.
폭행·욕설·무시·비아냥…임산부석 수난사(史)
한 임산부가 임산부배려석에 앉아있다./사진=남형도 기자 |
핑크색 임산부석 도입 4년, 이 자릴 비워둬야 한다는 시민 인식이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게 임산부들 얘기다.
'워킹맘' 김주희씨(33)는 출산 직전까지 일을 하느라, 지하철 5호선을 타고 다녔다. 임신 3개월 때쯤, 몸이 너무 힘들어 퇴근길에 앉으려 했더니 임산부석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다가가 "죄송하지만 비켜달라" 했더니, "에이, 젊은 여자가 참"하고 혀를 차며 자리를 휙 떠나버렸다. 김씨는 "무척 화가 나면서도, 그 자리라도 앉는 내 모습을 보고 서러웠었다"고 회상했다.
임신 6개월째인 임산부 강모씨(31)는 그런 말 조차도 못한다. 임산부란 사실을 알려주는 '핑크색 배지'를 가방 앞에 잘 보이게 달지만, 대부분 돌아오는 건 '무시'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스마트폰을 하거나, 보고도 모른 척하기 일쑤다. 강씨는 "말 그대로 배려석이라 뭐라 말도 못하고 서 있는데, 몸이 많이 힘들긴 힘들다"며 "양보를 기대하지 않으면 차라리 맘이 편하다"라고 했다.
최근엔 임산부석에서 폭행 사건까지 발생해 화두가 됐다. 지난 21일 청와대 홈페이지 내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는 "임신 13주차 아내가 지하철 5호선에서 폭행당했다"는 남편의 게시글이 올라왔다. 이에 따르면 그의 아내는 5월18일 오전 9시30분쯤 출근하는 길에 임산부석에 앉아 있었고, 한 남성에게 "여기 앉지 말라잖아. 야 이 XX야"란 욕설과 함께 폭행을 당했다. 청원자는 "서울교통공사에 대책 마련을 요구해도 알아서 해결하란 답변 뿐"이라며 성토했다.
배부른 티도 안 나는 '초기 임산부'는 더 고통
지하철 5호선 임산부 배려석./사진=서울시 |
배가 본격적으로 불러오기 이전인 '초기 임산부'들은 더 배려 받기 힘들다. 일반 좌석에서도 외면 당하고, 노약자석에 앉기는 더 눈치가 보인다는 것이다.
임신 2개월째인 '초기 임산부' 박경은씨(29)는 "배가 불룩 나오지 않아서 그런지, 좌석 배려를 찾아보기 힘들다"며 "임산부 배지를 안 갖고 다닐 땐, 심지어 임산부석에 앉는 것도 눈치가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임신 초기는 임산부에게 상당히 중요한 시기다. 자궁에 수정란이 자리를 잡으려면 12주가 걸리는데, 임신 후 태아가 안정적으로 착상되려면 산모 안정이 특히 중요하다. 유산의 80%가 임신 초기에 발생하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입덧'도 많이 시달리고, 쉴 새 없이 졸음이 쏟아지며, 밤에는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임산부 혐오 의미 내포한 '낙서'도…서울교통공사 "홍보 신경쓰겠다"
임산부 혐오 의미를 담은 것으로 추정되는 '엑스(X)'자 낙서./사진=온라인 커뮤니티 |
이러한 가운데 임산부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일부 몰지각한 승객 행태도 발견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지난 2월17일 서울 지하철 4호선 한 전동차 객실 내에선 한 임산부 배려석 사진이 올라왔다. 이 좌석에 부착된 엠블럼 속 임산부와 아이를 낳은 여성 그림엔, 검은색 싸인펜으로 '엑스(X)'자가 그어져 있었다.
실제 임산부석 관련 민원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임산부석 관련 민원건수는 총 2만7589건에 달했다. 인구복지협회가 지난해 출산 경험이 있는 임산부 4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 88.5%가 "임산부석을 이용하는데 적잖은 불편을 겪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통상 '자리 양보를 안 한다'는 민원이 집중되는 편"이라며 "서울 지하철 하루 이용 인원이 730만명 정도 되다보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임산부석이 비어 있는 시간이 예전에 비해선 늘었지만,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라며 "관련 홍보에도 힘쓰겠다"고 했다.
남형도 기자 human@m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