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를 아줌마라 부르지 못하고…" 호칭 문제에 대해
줄리아 투자노트
“야, 애도 없는 날 어머니라고 부르는게 말이 되냐. 그것도 안경원에서?”
이제 완연한 중년인 친구가 안경원 직원이 자신을 ‘어머니’라고 불렀다고 열 받았다. 친구는 결혼은 했으나 아이는 없다. “그럼 아주머니라고 불렀으면 좋겠어?”라고 물었더니 친구는 “그건 더 아니지. 그럴 땐 보통 고객님이라고 부르잖아”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이제는 누구 눈에도 어머니로 보이는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어머니'라고 부르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나는 문화센터에 다니는데 30대 초반의 강사는 나를 내 이름에 어머니를 붙여 ‘성희 어머니’라고 부른다. ‘성희 어머니’는 나를 낳아준 엄마를 이르는 호칭이다. 졸지에 난 ‘내’가 아니라 ‘나의 엄마’로 불리게 됐다. 그렇다고 내 아들을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아들과 상관도 없는 강사에게 “제 아들 이름은 'OO'니 'OO 어머니'라고 불러 주세요”라고 말하기도 뜬금없다.
문화센터엔 한 여중생이 있는데 나와 같은 아이돌을 좋아해 대화를 많이 한다. 나는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 아인 나에게 말할 때 호칭을 넣지 않는다. 예의 바른 그 아인 나를 ‘아주머니’라고 부르기도 이상하고 강사처럼 ‘성희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어색한 모양이다.
‘아주머니’는 결혼한 여자를 부르는 호칭인데 ‘나이 든 여자’를 지칭하는 말로 여겨져 기피하는 말이 됐다. 결혼연령이 늦어지고 비혼주의자가 늘어난 것도 '아주머니'란 호칭을 편하게 쓸 수 없는 요인이 됐다. 게다가 ‘아줌마’는 지하철에서 자리만 났다 하면 안면몰수하고 잽싸게 끼어드는 염치 없는 나이 든 여자를 지칭하는 단어처럼 굳어져 모욕스러운 용어가 됐다.
그러다 보니 내 자식도 아니고 며느리나 사위도 아닌 사람들에게 ‘어머니’라 불리게 되고 더 나아가 나를 낳아준 엄마로까지 불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또는 친해져도 적당한 호칭이 없어 대화할 때 아예 호칭을 생략하게 된다.
호칭 문제는 비단 ‘아주머니’로 불려야 마땅한 중년 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를들어 피트니트센터의 트레이너는 내 남편을 사장도 아닌데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제 남편 사장 아니예요”라고 정정해주면서 뭐라고 불러달라고 할 대안도 없다. 모 금융기관 민원실에선 민원인을 부를 적당한 호칭이 없어 ‘선생님’이라고 불렀다가 민원인이 “저 선생님 아닌데요”라고 말하자 ‘민원인님’이라는 어색한 호칭을 만들어냈다.
호칭이 어려운 이유는 그 안에 나이와 대우가 들어 있어서다. ‘아주머니’처럼 호칭에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다는 뜻이 내재돼 있으면 유독 ‘동안’에 집착하는 국내 정서상 반감을 사게 된다. 호칭엔 상대방에 대한 대우도 내포돼 있어 잘못 불렀다간 상대방 기분을 나쁘게 할 수 있다. 예를들어 ‘OO씨’라는 호칭은 동료나 아랫사람에게 쓰는 용어라 아무 생각 없이 썼다간 봉변을 당하게 된다.
한국은 장유유서를 따지는 유교 문화권인 탓에 유독 호칭에 예민한데다 남남이라도 서로 기분 나쁘지 않게, 나이나 대우에 대한 함의가 들어가지 않은 중립적인 호칭조차 없다. 게다가 호칭 때문에 세대간 소통이 더 어려워지는 문제도 있다. 나와 같은 아이돌을 좋아하는 여중생이 나를 부를 적당한 호칭을 찾지 못하는 한 우리가 가까워지는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최근 서울시교육청이 본청 및 교육지원청과 학교에 수평적 호칭제를 도입해 구성원간 호칭을 ‘님’이나 ‘쌤’으로 통일하겠다고 발표했다가 교권을 침해한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학생이 권위를 느껴야 할 교사를 ‘선생님’이 아니라 ‘OO님’이나 ‘OO쌤’이라 부르는데 대한 거부감이 그만큼 큰 것이다.
그럼에도 서울시교육청이 서로 상하관계가 느껴지지 않는 수평적이고 중립적인 호칭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본다. 이미 카카오 등 일부 정보기술(IT) 기업에선 수평적인 소통을 위해 '브라이언'이나 ‘제니’ 같은 영어이름을 정해 직급에 상관없이 이름을 불러주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서양 문화권에선 나이나 직급에 상관없이 이름을 부른다. 학교를 졸업하면 부모님을 비롯한 친척과 학교 동창들 외엔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거의 없이 과장님이나 누구 엄마, 고객님 등 역할로만 불리는 우리와 다르다. 우리도 나이나 직급이나 역할에 관계없이 그냥 이름을 불러주면 호칭 때문에 마음 상하고 고민하는 일이 줄고 세대간, 계층간 소통도 조금 더 원활해지지 않을까.
김춘수 시인이 ‘꽃’이란 시에서 노래했듯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존재를 각자에게 ‘꽃'이 되도록 해준다. 우리 각자에겐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나의 이름’이 있는데 우리는 왜 이름을 부르지 않고 호칭 문제로 고민하고 때론 얼굴을 붉혀야 할까.
머니투데이 권성희 콘텐츠총괄부국장 shkwon@m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