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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이에요"…말할까 말까 괴로운 빠른년생들

[프로불편러 박기자] 최대 나이 4개까지 늘어…어떤 나이를 선택해도 '족보 브레이커'

머니투데이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빠른 93년생인 직장인 이지연씨는 첫 직장에 입사하자마자 나이를 '선택'했다. 20년 가량 태어난 연도 보다 1살 많은 나이로 살아왔지만, '족보 브레이커'가 되지 않기 위해 회사에선 93년생으로 살기로 결정한 것.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씨가 빠른년생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왜 빠른이라고 말 안 했냐" "지금까지 어린 척한 거냐" 등의 핀잔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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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년생에게 '나이'는 골칫거리다. 초등학교 입학 연도에 따른 학년 나이와 실제 나이가 다른 탓에 혼란을 겪기 일쑤기 때문. 빠른년생을 만들어낸 조기입학제가 폐지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들의 불편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빠른년생을 만든 제도는 폐지된 상태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다. 24일 교육부 등에 따르면 2009년부터 취학연령 기준일이 3월1일에서 1월1일로 바뀌었다. 개정 전에는 3월1일부터 다음 해 2월말까지 태어난 아동이 같은 학년으로 입학하는 조기입학제가 있었지만, 2009년부터는 1~12월생이 함께 입학하게 됐다. 2009년 초등학교에 입학한 2003년생부터는 1, 2월에 태어난 빠른년생이 사라진 셈이다.


제도는 사라졌지만 빠른년생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를 둔 나이 논쟁 역시 이어지고 있다. 나이 논쟁은 주로 빠른년생이 '학년 나이'와 '실제 나이' 중 어느 곳에 속하는지를 두고 이뤄진다.


빠른년생들은 본인조차도 자신을 어느 나이로 분류할지 헷갈린다고 입을 모은다. 직장인 윤모씨(30)는 "재수를 하고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가 가장 난감했다. 동기들과 선배들이 나이를 묻는데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며 "빠른년생이라고 하면 '대접받고 싶냐'고 하고, 태어난 년도로 나이를 말하면 '족보 꼬인다'고 해서 더 난처했다"고 말했다.


대개 나이 선택은 빠른년생의 몫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에 따른 불만도 오롯이 빠른년생들의 몫이다. 직장인 강슬기씨(27)는 "어디서 나이 말하는 거 진짜 스트레스다"라며 "내가 기준을 갖고 말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반응이 제각각이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빠른 91년생인 직장인 김모씨(28)는 "빨리 입학한 게 죄"라며 "부모님이 학교에 빨리 보내줘서 빠른년생이 된 것뿐이다. 회사에서 빠른년생이라고 하면 '사회에서 빠른이 어딨어'라는 반응이 나오는데 솔직히 어이없다. 학창 시절 내내 90년생들이랑 친구로 지냈는데, 사회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태어난 나이로 살라는 것도 좀 웃기다"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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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의 나이 셈법이 다양해 빠른년생의 혼란이 더욱 가중되기도 한다. 한국은 나이 세는 방법이 △만 나이 △연 나이 △한국식 나이(세는 나이) 등 3가지나 되는데 빠른년생의 경우 나이가 최대 4개까지 늘어나기 때문이다.


1992년 2월에 태어난 직장인 박모씨를 예로 들면, 2020년 1월 기준 박씨의 나이는 4개다. 0살로 태어나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1살씩 먹는 '만 나이'로는 27살, 현재 연도에서 태어난 연도를 빼 나이를 계산하는 '연 나이'로는 28살이다. 또 1살로 태어나 해가 바뀌면 1살을 먹는 '세는 나이'로는 29살이고, 초등학교 입학 년도에 따른 '학년 나이'는 30살이다.


나이 셈법이 다양하다 보니 이에 대한 불만도 상당하다. 그룹 god 박준형은 과거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한국에서는 왜 나이를 두 살 높이는 건지 솔직히 난 이해 안 간다. 엄마 뱃속 세포였을 때부터, 아무 생각도 없는 지렁이 같은 존재인데 왜 그때부터 나이를 따지나 싶다. 지구가 한살 먹는데 나까지 따라먹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국제 기준에 맞춰 한국도 '만 나이'로 통일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한국식 나이 폐지, 만 나이 도입과 관련 청원이 200건 이상 등록돼 있다.


황주홍 민주평화당 의원은 지난 1월 공문서에 만 나이 기재를 의무화하고, 일상생활에서도 만 나이로 연령을 계산·표시하도록 권장하는 내용의 '연령 계산 및 표시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황 의원은 "전통적으로 세는 나이를 사용해온 한국, 중국, 일본, 북한 등 아시아권 국가 중 유일하게 우리나라만 아직까지 세는 나이를 사용하고 있으며 상이한 4가지의 연령 계산 방식이 혼용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국회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문화평론가는 "한국에만 존재하는 나이 셈법과 나이로 서열을 따지는 사회 문화가 겹쳐 빠른년생들의 고충이 계속되고 있다"면서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빠른년생의 나이를 둔 논쟁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가영 기자 park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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