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벌판이던 강남 개발했던 건설그룹이 하루아침에 몰락한 이유
현재 강남은 서울의 중심이자 부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과거, 논밭밖에 없던 강남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1970년대 서울의 중심은 강북이었기 때문이다. 1974년에는 강북과 강남의 인구 비율이 약 7:3이었다. 강남은 관공서는 물론 마트까지 없는 허허벌판이었기 때문에 강남으로 이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부가 강북 도심과밀화를 막기 위해 공무원들을 강제 이주시킬 정도였다. 정부가 명문고, 관공서 등 핵심임프라를 이동시키자 비로소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와중에 누구보다 빨리 강남 개발에 뛰어들어 입지를 공고히 다진 건설사가 있었다. 강남 개발을 주도해 아파트 브랜드 1위까지 차지한 이 기업은 어디일까.
한 우물만 파 성공한 기업
강남 개발에 앞장선 그룹은 우성그룹이다. 1977년 사명을 우성건설로 바꾸고 강남 개발에 뛰어들었다. 타 건설회사들이 해외로 진출할 때 우성건설은 국내 아파트사업에 집중했다. 그 덕에 단기간에 강남 아파트 시장을 장악했고 1978년 주택건설 지정업체 9위에 오를 수 있었다.
우성건설은 서울 강남의 대치동, 잠실동 등에 ‘우성 아파트’를 건설하며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우성아파트는 외벽이 갈색, 오렌지색, 노란색이기 때문에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성아파트는 명품이라고 불렸고 우성건설은 80년대 후반부터 주택건설실적 1,2위를 다툴 만큼 국내 아파트산업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다.
대형 건설그룹 몰락의 시작
잘 나가던 우성건설의 자금난이 시작된 건 1990년대 초부터였다. 93년부터 시작된 부동산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아파트 미분양 사태가 지속된 것이다. 이는 대규모 아파트 미분양을 양산, 주택사업을 중점적으로 해온 우성에게 치명타가 됐다. 우성건설은 주택사업이 전체 매출액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분양사태로 지방에 묶인 돈만 5~6천억 원에 이른다. 부산시 우동과 전포동 상업용지 등에 1천6백억 원, 대전시 태평동 조폐창부지에 1천1백억 원등 땅에만 3천5백 여 억원이 묶여 있었다. 1995년 우성아파트 미분양은 1천6백 가구에 달했다. 또한 재개발, 재건축사업이 장기화되면서 이주비 등으로 2천5백억 원 이상 들어갔다.
부동산 경기가 악화되기 시작한 90년대초부터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한 것도 우성건설에게 과도한 채무를 떠안게 했다. 90년대 우성건설은 삼민기업, 용마개발 등 5~6개 건설 관련 업체를 비계열사 형식으로 편입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한진개발 인수, 골프장 사업 등을 추진하며 지나치게 몸집을 불렸다. 1995년 우성건설의 자본금에 대한 부채비율이 800%에 육박했다. 건설업계 평균은 450%이다.
우성, 화려한 부활 꿈꿨지만…
94년, 우성건설은 자구노력을 전제로 12개 은행에게 2천억 원가량의 협조금융을 지원받았다. 자구책으로 5천억 원에 달하는 보유 부동산의 매각을 추진했으나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파문으로 최승진 부회장이 조사를 받게 되면서 거래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6년 삼풍백화점이 붕괴하자 시공사였던 우성건설은 검찰청에 불려 나가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1996년 우성건설은 강원은행에 돌아온 어음 169억9,500만 원을 막지 못해 1차 부도처리 되었다. 정부는 아파트 입주 예정자들과 협력업체의 피해 방지를 위해 법정관리 후 3자 인수를 추진했다. 4개월만에 한일그룹이 우성건설을 인수했으나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한일그룹도 1998년 해체되었다. 2000년 우성건설은 파산선고를 받아 끝내 도산했다.
우성건설은 20여 년동안 약 14만 가구의 아파트를 지었다. 회사가 청산되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국에서 우성아파트를 찾아볼 수 있다. 서울 도곡동에 있는 우성캐릭터빌이 사실상 이 회사의 마지막 작품이다. 한때 대한민국 1위라고 불리던 우성건설은 그렇게 물거품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