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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한 방으로 10년 치 월급 하루 만에 벌었다는 남성의 현재 근황

중국 투자가들 사이에서 ‘주식의 신’이라 불려

전 재산 투자해 첫해에만 9500만 원 수익

양화이딩(杨怀定)은 중국에서 주식 투자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중국 최고의 개미 투자자로 불리는 그는 공장노동자에서 주식 투자로 단 몇 년 만에 백만장자 반열에 오르며 화제가 되었다. 중졸 출신으로 상하이 철합금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였던 그는 1980년대 당시 한 달 월급 60위안을 받고 생계를 유지했다. 아르바이트로 철강 영업을 뛰기도 했으나 궁핍한 생활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양화이딩은 1987년 무렵 신문에서 국채 시장 개설에 관한 기사를 접하게 됐다. 당시 국채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는 연 15% 이자를 받을 수 있다는 문구를 발견하고 5년여 직장 생활을 하면서 모은 종잣돈을 전부 투자했다.


전 재산인 2만 위안으로 채권을 산 양화이딩은 첫해에만 50만 위안을 벌어들였다. 이후 1991년 상하이 주식시장의 개설과 함께 투자에 뛰어들면서 양화이딩은 백만장자 반열에 올랐다.

당시 중국에는 7개 도시에 국채 거래소가 운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동일한 상품임에도 거래소 간 가격이 모두 달랐다. 양화이딩은 이 점을 이용해 막대한 부를 창출하게 된. 즉, 지방은행에서 국고채를 90%에 사다가 상하이 은행에 100%에 파는 식으로 1987년 하루 저녁에 6000위안의 차익을 실현한 것이다. 당시 월급이 60위안 수준이었으나 하루에 10년 월급을 다 번 셈이다.


이후 1991년 상하이 증시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양화이딩은 비로소 백만장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중국 채권시장이 주식시장으로 바뀔 것을 예감한 양화이딩은 1990년 ‘디엔전쿵’이라는 회사의 주식을 91위안에 3000주 미리 매입했다. 1991년 12월 3.75위안(액면가 1위안)에 거래를 시작한 디엔전쿵의 주가는 계속해서 폭등하면서 무려 25위안까지 올랐다. 이 회사의 주식을 장기 보유한 양화이딩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양화이딩의 성공 신화는 1990년대 후반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1994년 7월 말 상하이 주가가 300포인트 선으로 급락하자 양화이딩은 정부의 부양책을 직감하고 거금을 투자했다. 이후 부양책이 나오고 주가가 1500포인트까지 폭등하며 4배 이상 이익을 챙긴 양화이딩은 시장에서 홀연히 빠져나왔다.


여러 차례 성공신화를 쓰면서 양화이딩이라는 이름은 순식간에 퍼져 중국 증시의 최고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그가 어떤 주식을 갖고 있는지 언론의 최대 관심사로 떠오르며 베이징대와 칭화대 등 중국 유수의 명문 대학에서 그의 특강을 잡기 위해 경쟁적으로 러브콜을 보낼 정도였다.

중국 주식계의 ‘마이더스의 손’으로 불리던 양화이딩은 2000년대 초반 잠시 소식이 뜸하다가 2005년 집을 모두 팔고 주식시장으로 돌아왔다. 2005년 여름 1000선까지 떨어졌던 상하이 주가는 2007년 10월 6000대까지 폭등하며 당시 30만 주를 산 양화이딩은 또다시 거금을 챙길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양화이딩의 모든 투자가 성공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 역시 중국 석유의 주식을 사면서 투자 실패를 경험한 바 있다.


그는 2008년 주당 31위안에 중국 석유의 주식 4000주를 샀으나 주가가 점차 하락해 10위안 선까지 떨어졌다. 이에 일각에서는 양화이딩이 대세를 읽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는 건 사실이나 과학적인 투자 분석은 없다고 평가했다. 중국 증권업계 전문가들도 양화이딩을 두고 ‘시대가 낳은 행운아’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럼에도 양화이딩이 현재까지 주식과 관련해 가끔씩 던지는 한 마디는 이튿날 신문 증권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많은 ‘개미 투자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양화이딩은 지난해 6월 사망 소식을 알렸다. 중국 개인 투자자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안타까운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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