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진 그림도 감쪽같이 회생…`미술 보존` 과학의 힘
국립현대미술관 보존과학자들은 캔버스 천이 찢어지고 물감이 떨어져나간 이갑경 그림 `격자무늬의 옷을 입은 여인`을 6개월 넘는 보존 처리를 통해 복원했다. [사진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
1989년 국립현대미술관 보존과학실에 둘둘 말린 그림 한 점이 들어왔다. 1930년대 활동한 여성화가 이갑경(1914~미상) 작품 '격자무늬의 옷을 입은 여인'(1937)으로 일부 캔버스 천이 찢어지고 상당 부분 유화 물감이 떨어져 있었다. 회생 불가능해 보였지만 보족과학자들이 6개월 넘게 공을 들여 복원에 성공했다.
먼저 더 이상 물감층이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작품 위에 한지를 붙였다. 너덜너덜한 작품 뒷면에는 캔버스 천을 덧붙였다. 물감이 떨어진 부분은 곱게 간 호분(무기 안료)과 아교액을 반죽한 소재로 메운 후 수술칼로 정교하게 질감을 성형했다. 그 위를 유화 물감이 아닌 수채 물감으로 채운다. 추후에 있을 재보존처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작가의 원래 그림과 구별하기 위해서다. 지난한 과정을 거친 후 작품 보호막을 형성하는 바니시를 칠한 후 나무틀에 고정시켜 보관해왔다. 그러나 2014년 보존처리 재료가 들뜨거나 변색돼 재보존처리를 진행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보존과학자로 일하는 허보람 학예연구사는 "여러 재료와 처리 방법을 놓고 매 순간 선택의 딜레마에 놓이게 된다. 보존처리에 정답은 없어 늘 치열하게 연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미술품은 탄생된 순간부터 각종 위기에 놓인다. 햇빛, 습도와 온도, 먼지, 곰팡이, 해충 같은 미생물, 담배 연기 등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다. 시간도 작품의 가치를 마모시킨다. 캔버스천이 울고, 물감층이 들뜨거나 떨어지며, 나무틀이 뒤틀린다. 회화 뿐만 아니라 조각도 마찬가지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작품을 복원 중인 보존과학자. |
미술품 종합병원이자 수장 전시관인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서 보존과학을 조명하는 전시 '보존과학자 C의 하루'를 펼쳤다. 작품의 수명을 연장하는 '미술품 의사'인 보존과학자 C를 가상의 인물로 내세워 그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보존과학자는 상처난 작품과 마주할 때 고민이 깊다. 특히 작가가 생존해 있지 않을 경우 자문을 구하기 힘들어 답답하다. 사운드 아티스트 류한길이 보존과학자의 심정을 표현한 소리가 전시장 입구에 울려 퍼진다. 어둡고 텅 빈 공간에서 기계음과 파열음 등 물질의 손상을 연상시키는 각종 소리들이 긴장과 불안을 일으킨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야외에 3년간 전시돼 페인트가 벗겨진 프랑스 조각가 니키 드 생팔(1930~2002) 조각 '검은 나나'(1967)를 마주했을 때도 막막했다. 결국 미술관 내외부 전문가 회의, 니키 드 생팔 재단과 지속적인 협의를 거쳐 보존처리 방향과 방법론, 재료를 결정했다. 기존 도장층을 제거하고 색상별로 재도장하는 대규모 보존처리 과정을 거쳤다. 물론 기존 작품에 남아있던 질감과 색상, 광택 등을 되살렸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누전 위험으로 가동이 중단된 '비디오 아트 선구자' 백남준(1932~2006) 설치 작품 '다다익선'(1988)은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다. 브라운관TV 부품이 단종됐기 때문이다. 세계 곳곳을 뒤져서라도 브라운관TV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과 LED(발광다이오드)·OLED(유기발광다이오드) 등 최신 모니터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전시장에는 우종덕 작가가 '다다익선' 복원을 둘러싼 3가지 의견을 시각화한 영상 작품이 설치돼 있다.
보존과학실 첨단 장비를 통해 그림의 숨겨진 정보가 발견되기도 한다. X선 촬영을 통해 오지호 그림 '풍경'(1927)이 여인의 전신 누드상 위에 그려졌다는 것을 확인했다.
복원된 작품과 더불어 보존과학 도구와 안료, 분석 자료, 재해석된 이미지 등이 펼쳐져 있다. 작가 김지수는 청주관 보존과학실을 순회하며 채집한 공간의 냄새와 보존과학자의 체취를 유리병에 담아 설치해놨다. 전시는 10월 4일까지.
[청주 = 전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