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은 조선의 국정교과서?…집권세력 입맛대로 수정
조선 14대 왕 선조의 재위 40년7개월간의 국정 전반을 기록한 선조실록은 1610년(광해군 2) 완성됐다. 집권세력인 북인이 썼고 서인, 남인 등 반대파를 폄훼했다. 서인의 사상적 출발점인 기대승에 대해 "너무 말을 쉽게 하였다. 기로(耆老·노인)들을 악평하여 큰 미움을 샀다"고 논평했다. 서인의 원류인 성혼을 두고서는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였다. 간사한 정철과 나쁜 일을 함께 하였다"고 비판했다. 남인인 유성룡을 향해서도 "임금에게 직간했다는 말을 들을 수 없었고 정사를 독단적으로 결정하면서도 나빠진 풍습을 구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반면 자신들의 스승인 조식은 "도량이 맑고 푸르르고 두 눈에서는 빛이 나 바라보면 세속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말과 들은 재기가 번뜩여 뇌풍(雷風)이 일어나듯 하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이욕의 마음이 사라지도록 하였다"고 기술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실록을 뜯어고치는데 그렇게 새로 발간된 것이 '선조수정실록'이다. 이후에도 실록은 정치적 목적에 따라 수차례 고쳐진다. 1677년(숙종 3) 펴낸 현종실록은 남인 주도로 만들어졌다. 3년 뒤인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남인을 몰아내고 국정을 장악하자 "서인을 편파적으로 기술했다"며 다시 발간했다. 1732년(영조 8) 소론이 펴낸 경종실록도 재차 쓰였다. 노론은 "소론이 노론 인사를 악의적으로 매도했다"며 불리한 내용을 모두 삭제하거나 수정해 1781년(정조5) 7월 펴냈다. 그렇지만 역사의 완전한 왜곡은 아니었다. 비록 수정하기는 했지만 예전 기록을 파기하지 않고 함께 보존했던 것이다.
국보 제151호인 동시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의 사적을 편년체로 기록한 정사이다. 고종과 순종의 실록도 간행됐지만 일제강점기에 편찬돼 실록에 편입시키지 않는다.
국왕과 신하들의 인물 정보, 외교·군사 관계, 국정의 논의 과정, 의례의 진행, 천재지변·천문 관측 자료, 호구와 세금, 요역의 통계, 지방 정보와 민간 동향, 계문·차자·상소·비답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종류의 내용들이 다룬다.
실록은 '승자의 기록' '지배자의 역사'라는 비판이 따르지만 그러한 한계 속에서도 최대한 객관성을 담보하려는 노력도 공존했다. 절대 권력자인 왕이 역사를 훼손하지 않도록 해당 왕의 사후에 만들어졌다. 실록 편찬에 사용되는 문헌도 역사 편찬의 공식 자료인 사초(춘추관 사관들이 작성한 시정기) 외에도 춘추관일기, 승정원일기(왕의 비서기관에서 쓴 일기), 의정부등록, 조보(관보), 비변사등록, 일성록(왕의 입장에서 펴낸 일기) 등 다양했고 개인의 일기나 문집이 포함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 봉화 태백산사고. 일제강점기.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
'기록의 나라' 조선은 일찍이 실록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4부를 인쇄한 뒤 도성 안 춘추관, 충주사고, 전주사고, 성주사고 등 4개 사고에 보관해 왔다. 그런데 1592년 임진왜란 때 왜군의 진로에 위치했던 춘추관 사고·충주사고·성주사고본이 불탄다. 전주사고본은 정읍 유생 안의와 손홍록에 의해 내장산으로 옮겨졌다가 해주, 강화, 묘향산 등을 거치면서 가까스로 멸실을 피했고 1603년에는 강화부로 이전됐다.
전란을 수습한 조선은 유일하게 남은 강화도의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3부를 더 찍어 각각 묘향산(평안북도), 태백산(봉화), 오대산(평창), 춘추관에 봉안했다. 이후 춘추관은 이괄의 난 때 또다시 불타 없어졌고 묘향산 사고는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적상산(무주)으로 이전된다. 전주사고본은 강화 마니산에 있다가 정족산으로 위치를 바꿨다. 최종적으로 강화 정족산, 태백산, 오대산, 적상산 등 4개 사고 체계를 갖췄다.
세종실록 정족산사고본(국보 제151호). 소장 서울대 규장각·사진 문화재청. |
실록은 한일합방과 함께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겪는다.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조선총독부로 이관됐다가 경성제국대학을 거쳐 해방과 함께 서울대로 옮겨졌다. 오대산본은 1913년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된 후 관동대지진 때 소실돼 74책이 남았다가 그중 일부인 27책이 1932년 경성제국대학으로 반환됐다. 나머지 47책은 2006년 환수돼 현재 74책이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돼 있다. 적상산본은 이왕가박물관에 있던 구황실 장서각(창덕궁 낙선재 옆 창경궁 일원)에 뒀다. 하지만 한국전쟁 중 북한군이 가져갔다. 북한은 적상산사고본이 애초 묘향산사고에서 이전해와 자기들 소유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태백산본은 다시 분산보관 목적으로 1985년 국가기록원 역사기관으로 옮겨졌다. 종합적으로 현재 정족산본 1181책(풀세트),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74책, 기타 산엽본(흩어져 있는 것을 묶은 것) 21책 등 총 2124책이 남아 있다.
실록에는 인물 평가가 무수히 등장한다. 대체로 좋은 점과 비판적 입장을 동시 기술해 인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게 다뤄진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다가 귀국한지 얼마 안 돼 의문사를 당한다. 청나라에서 개혁적 성향을 키웠던 소현세자에 불안감을 느낀 인조 등 보수세력이 독살했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됐다. 인조 23년(1645) 4월 26일자 실록은 "세자는 학문을 폐하고 오직 재물과 이익만을 추구하였고 토목 공사를 일삼았으며 말과 개를 가까이해 크게 인망을 잃었다. 세자가 10년 동안 타국에 있다가 본국에 돌아온 지 겨우 수개월 만에 병이 들었는데 의관들이 함부로 침을 놓고 약을 쓰다가 끝내 죽기에 이르렀다"고 서술했다. 의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는 있지만 분명히 자연사나 병사가 아님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박문수는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록에는 그러한 사실이 언급되지 않는다. 당파 싸움에 선봉에 섰고 농담을 잘하는 실없는 인물로 묘사된다. 영조 32년(1756) 4월 24일자 실록은 "호조 등의 판서를 하면서 잘못된 제도를 개혁해 바로잡았고 여러 차례 병권을 장악하면서 사졸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그러나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때때로 골계(滑稽·농담)를 하여 거칠고 조잡한 병통이 있었다"면서 "이광좌(소론의 거두)를 추종해 지론이 시종 일관 변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로 인해 끝내 정승이 되지 못했다"고 썼다.
경주 기생. 일제강점기. 실록은 이야기의 보고이다. 대쪽같은 사관들이 기술한 실록에서는 뜻밖에 낯뜨거운 간통사건도 다수 다뤄지고 있다.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
대쪽 같은 사관들이 쓴 실록은 뜻밖에도 섹스 스캔들에 근친상간까지,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을 과시한 여인들도 숨기지않고 다룬다. 정종 즉위년(1399) 8월 19일자 실록은 대학자 변계량의 누나 변 씨의 엽기 사건을 싣고있다. 재가한 변씨는 전남편의 종이던 포대·사안 형제와 돌아가며 음행을 일삼다가 남편 박원길에게 들통났다. 변씨는 동생에게 도움을 청했다가 거절당하자 정안대군(태종 이방원)에게 달려가 "남편과 아우가 의안대군(이방석)을 내세워 거사를 모의했다"고 거짓으로 고변했다. 국문이 벌어져 박원길과 사안은 곤장을 맞아 죽고 포대가 전모를 실토했다. 변씨와 포대는 참형을 당했다.
세종대왕의 며느리는 동성애를 즐겼다. 세종 18년(1436) 실록에 의하면 세자(문종)가 부인 봉씨에게 무관심하자 봉씨는 궁녀 소쌍(召雙)과 동성애에 빠졌다. 세자가 소쌍을 불러 추궁하자 "빈께서 병풍 뒤에서 옷을 다 벗겨 눕혀놓고 남녀가 교합하는 것처럼 희롱하였다"고 자백했다. 봉씨는 폐출됐다. 세종 9년(1427)에는 희대의 섹스 스캔들이 발생해 세상을 충격에 빠뜨린다. 한성부사 유귀수의 딸이며 평강현감 최중기의 부인인 유감동이 무려 40명이 넘는 남자들과 간통한 사건이다. 세종 9년(1427) 실록에 따르면 유감동은 한밤중에 소변을 본다고 남편을 속인 뒤 몰래 애인을 만났고 벼슬아치, 아전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관계했다. 심지어 시누이의 남편과도 불륜을 저질렀다. 유감동은 곤장을 맞고 변방으로 쫓겨났을 뿐 죽음은 피했다. 얼마 뒤 재상가 여식인 어리도 고관들과 음행을 일삼다가 잡혔다. 세종은 역시 극형을 내리지 않았다. 세조 7년(1461)에는 내시 김덕련의 아내 종비가 여러 남자와 간음한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이 교조화하고 처벌이 강화하면서 지배층의 대규모 섹스 스캔들도 자취를 감춘다. 실록은 이야기의 보고(寶庫)다.
배한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