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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풍의 불상은 왜 한국인 얼굴을 하고있나

매일경제

국보 제81호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전체 모습.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의 자취-42] "개원 7년 기미년(성덕왕 18, 719) 2월 15일에 중아찬 김지성은 받들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찬과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 부인을 위하여 감삼사와 석조아미타상 1구와 석조미륵상 1구를 삼가 만든다."


국보 제81호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광배 뒷면에 새겨진 명문이다. 이 불상과 한 세트를 이루는 국보 제82호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술돼 있다.


두 불상의 명문에는 감산사의 창건 유래가 상세히 적혀 있다. 국왕과 세상을 떠난 부모, 죽은 아내, 죽은 동생, 죽은 누이 등을 위해 김지성(652~720) 본인 소유의 감산사 터와 재산을 바쳐 절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명문은 김지성의 사망 직후 새겨졌으며 나마(17관등 중 11번째) 총이 성덕왕의 지시를 받아 지었고 사문(승려) 경융 등이 썼다.


절을 짓고 불상을 만든 김지성의 신분은 중아찬이다. 중아찬은 신라 17관등 중 여섯 번째인 아찬의 하나이다. 아찬은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이다. 따라서 김지성의 신분은 6두품이었을 것이다. 6두품은 최치원, 원효 등 뛰어난 학자와 고승들을 무수히 배출했지만 진골 귀족에게 차별받아 신라 신분제의 모순을 대변하는 계급이었다. 벼슬도 중앙 각 부서의 차관직인 시랑(侍郞)이나 경(卿)까지만 오를 수 있었다. 장관직은 진골의 몫이었다.


김지성은 비록 6두품이었지만 왕이 직접 감산사 그의 불상에 글을 쓰도록 명할 만큼 생전에 중요한 업적을 많이 남겼고 왕의 총애도 극진했다. 불상의 명문도 김지성이 집사부(왕의 명령을 전달하고 기밀관리를 하던 관서) 시랑을 지냈고 지략이 뛰어나 관직에 물러나서도 왕의 부름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대중국 외교관으로서 현명한 자질을 갖춰 당에서 상사봉어의 관직을 받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던 김지성은 67세에 벼슬을 버리고 은퇴한다. 평소 자연을 좋아하고 노장사상을 흠모해 전원에서 중국 고전과 불법의 연구에 몰두했다. 그리고 2년 뒤인 69세에 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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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81호와 한 세트인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역시 김지성이 아버지의 얼굴을 불상에 새긴 것으로 추측된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의 부친인 인장 일길찬은 47세에, 모친인 관초리 부인은 66세에 사망했고 유골은 화장돼 동해 바닷가에 뿌려졌다. 노년의 김지성은 인생의 뒤안길에서 오래전 돌아가신 부모를 떠올렸다. 명문은 그가 죽기 1년 전 부모를 생각해서 서라벌 동남쪽 20리쯤 토함산 기슭(경주시 외동읍)에 감산사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어머니를 위해 미륵보살상(높이 2.7m)을, 아버지를 위해서는 아미타여래상(높이 2.75m)을 만들었다. 미륵보살상은 여자, 아미타여래상은 남자 안면을 하고 있는데 실제 사람을 보는 듯 인상이 생생하다. 김지성이 미륵보살상에는 어머니 얼굴을, 아미타여래상에는 아버지 모습을 담았으며 두 불상은 '부부 석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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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81호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안면 부위. 관능적이며 사실적인 서역풍 불상을 신라에 도입한 신라사신 김지성이 불상을 만들면서 죽은 자신의 어머니 얼굴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아미타여래불은 몸에 대의(승려의 옷 중 가장 큰 것)만을 걸쳐 절제되고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당당하고 위엄이 있으며 인체 비례에 가까운 사실적 묘사가 돋보인다. 그런 반면에 미륵보살은 옅은 미소 속에 머리의 보관부터 목걸이, 팔찌, 영락 등 온몸에 갖은 장식으로 치장하고 있으며 입체적이면서 풍만하며 생동감 넘치는 부드러운 곡선이 강조돼 있다. 자식으로서 아무래도 자애로운 어머니에게 더 애틋할 수밖에 없다. 두 불상은 세트이기는 하지만 화려함이나 조각의 세밀함에서 미륵보살상이 앞선다. 어머니를 형상화한 미륵보살상이 좀 더 중요한 불상으로 모셔졌을 것으로 이해된다. 삼국유사 탑상편 남월산조에도 "미륵존상이 감산사의 금당주였다"고 적혀 있다.


두 불상은 제작 시기를 연도는 물론 날짜까지 정확히 아는 거의 유일한 불상이다. 통일신라 불교조각사의 전기에 해당하는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중반까지 불상 중에는 제작연도를 알 수 있는 기년명 작품이 드문 게 사실이다. 조성 시기가 확실한 것은 706년의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출토 금제아미타여래좌상, 751년의 석굴암 석조여래좌상 정도이다.


감산사 불상은 우리나라 불교 조각 가운데 전체적으로나 세부 표현 모든 면에서 단연 우수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두 불상은 무엇보다 외래 양식의 수용 과정을 보여주는 조각으로 평가받아 한국 조각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두 불상은 한눈에 보기에도 이국적인 형상을 하고 있다. 사실적이면서 관능적인 서역풍을 반영한다. 당의 불상은 7세기 중후반 현장 등의 구법승으로 상징되는 인도 및 서역과의 활발한 교류를 배경으로 새로운 조각 양식을 수용해 크게 변화한다. 신라도 7세기 후기부터 당의 불교 조각 양식을 적극 수용해 발전시켜 나간다. 감산사 불상의 신체와 밀착된 옷의 표현, 아미타여래상의 Y자형 옷주름, 미륵보살상의 천의, 늘어진 영락 장식 등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새롭게 유행하던 국제적 조각 양식을 잘 보여준다.


제33대 성덕왕대(702~737)는 신라 전역사에서 가장 번성했던 시기다. 성덕왕은 삼국통일 후 신문왕을 거쳐 8세기 초반 35년간 재위하면서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국가경제를 안정화해 통일신라시대 전성기를 연 왕이다. 고려의 문종, 조선의 세종대왕과 곧잘 비교된다.


그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여 드물게 전광대왕(典光大王·열 명의 저승세계 왕 가운데 첫 번째 왕)이라는 불교식 왕명을 가졌다. 다양한 불사에 관여해 705년 오대산에 진여원(상원사)을 열고 화엄종 운동인 화엄결사의 성립을 국가적으로 지원했으며 이어 706년 증조부인 태종무열왕을 기리는 봉덕사를 창건하고 법회 의식인 인왕도량을 주관했다. 그는 또 선진 불교문화 도입을 위해 재위 36년간 총 43회에 걸쳐 당에 사신을 파견했다. 이는 신라와 당의 교류사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횟수이다. 김지성도 705년 당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불교문화는 주로 승려의 교류를 통해 수용됐지만 공식적인 외교사신들도 불교문화를 들여오는 데 일조했다. 실제 704년 당에 사신으로 갔던 김사양이 귀국할 때 당시의 최신 한역 경전인 금광명최승왕경을 가져온 사례가 있다.


감산사 불상들의 모본이 되는 도상도 김지성이 당에서 직접 가져왔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들 상은 정면에서 보면 부피감이 있지만 옆에서는 입체감이 작으며 몸체도 네모난 형태를 띤다. 중국 불상에 보이는 인체의 관능적 아름다움의 강조나 과장의 경향과 차이가 난다. 모본이 3차원의 조각이나 부조가 아닌 2차원적인 회화였을 수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유다. 넓적한 얼굴, 수줍은 듯한 표정, 세부 처리의 도식적 경향 등은 신라인이 지녔던 불성의 관념, 그들이 선호했던 미감을 반영하고 있어 불교 조각이 신라화되는 내막도 보여준다는 견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8세기 중반에는 기념비적인 석굴암으로 상징되는 신라적 조각 양식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감산사 불상은 석굴암(석불사)과 불국사의 모티브에 많은 영감을 준다. 감산사 불상이 부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만들었듯 마찬가지로 석굴암과 불국사 건립은 경덕왕대에 재상을 지낸 김대상이 각각 전생과 현생의 부모를 위해 추진됐다. 감산사 불상에 담긴 신라인의 독실한 불교의 신앙심과 부모를 향한 절절한 효사상이 석굴암으로도 이어져 조형적으로 최고의 완성도가 지닌 대예술품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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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논으로 변한 경주 감산사지. 감산사 두 불상은 1915년 무렵에 경성(서울)으로 옮겨졌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특이하게도 두 불상의 정수리에는 공통적으로 2~3㎝의 구멍이 나 있다.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장치라는 설이 제기된다. 감산사 국보 불상은 1915년 무렵에 경성(서울)으로 옮겨져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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