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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첨성대 위엔 정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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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경주 첨성대에서 촬영한 고등학교 수학여행 기념사진. 지금은 접근을 통제하지만 과거에는 아무나 첨성대에 올라 갈수 있었다. /사진=대구교육박물관.

"첨성대에 있는 백구정(亭)에서 자주 노닐었다, 상층에 대(臺)의 이름 3자가 크게 남아 있으니, 설총의 친필로 행한 일이다(遊於白鷗亭而瞻星臺, 上上層有臺名三大字, 親筆焉事.)."

경주 순창 설씨 세헌편(世獻篇·설씨 가문의 업적을 적은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설총은 주지하는 것처럼 원효대사와 요석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두를 집대성했고 강수, 최치원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불리는 대학자이다. 그의 정확한 생몰년을 모르지만 태종무열왕대(654~661)에 출생하고 경덕왕대(742~765)에 사망했다는 기록은 전한다.


그런데 이 책이 우리가 천문관측 시설로만 알고 있는 경주 첨성대(瞻星臺)에 '백구정'이라는 정자가 존재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전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그 정자에는 설총이 친필로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첨성대 위에 정자 등의 건물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문헌은 설씨 세헌편 외에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 조선 중기 문신 홍적(1549~1591)은 그의 문집 '하의유고'에서 "대가 비어 있되 반월이네, 각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첨성이로다(臺空猶半月, 閣廢舊瞻星)"라고 읊었다. 홍적은 1572년(선조 5) 별시문과에서 병과(3등급 중 3등급)로 급제해 예조정랑(정5품), 집의(사헌부 종3품) 등을 거쳤다. 선조 13년(1580) 가을에 혜성이 출현하자 이를 측후하도록 명령받은 것으로 미뤄 천문 분야에도 식견이 높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홍적 역시 반월(경주)의 첨성대에 누각이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일본 근대 기상학의 선구자로 일제강점기 통감부 관측소장을 지낸 와다 유지(和田雄治)는 직접 첨성대 원형 추정도를 그리기까지 했다. 와다 유지는 "첨성대 위에 관측기구를 설치하여 상시로 천문 관측을 하였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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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첨성대 문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국보 제31호 경주 첨성대는 신라의 옛 궁궐터인 월성에서 북서쪽으로 400여 m 떨어진 경주 인왕동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 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인 633년(선덕여왕 2) 건설됐다. 첨성대 하면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자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유명하다.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로, 중간쯤에 남쪽 방향으로 정사각형의 문이 나 있다. 맨밑에 사각형 기단 2개 층, 그 위에 원통형 몸체 27개층, 맨위에 사각형 정자석(井字石) 2개 층 등 총 31개 층으로 이뤄져 있다. 정자석의 각 면은 동서남북을 가르키고 있다. 몸체 27개 층은 27대 국왕인 선덕여왕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것은 첨성대의 개요일 뿐 우리는 아직도 첨성대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


최초의 첨성대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다. 삼국유사 '기이 제1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편 말미에 "별기(別記)에는 선덕왕대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를 쌓았다고 한다"고 기술돼 있다. 같은 책 '왕력 내물마립간'편 끝에도 "(내물왕의) 능은 점성대(占星臺) 서남쪽에 있다"고 씌여져 있다. 여기서는 특이하게 첨성대를 '점성대'로 표기하고 있다.


1454년 발간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보다 자세한 내용과 더불어 실측자료도 실려 있다. "당 태종 정관 7년 계사년(633)에 신라 선덕여왕이 세웠다. 돌을 쌓아 위는 정사각형, 아래는 둥글게 만들었다. 높이는 19척 5촌이며, 위의 둘레는 21척 6촌이고 아래의 둘레는 35척 7촌이다. 그 가운데가 뚫려 있어 사람들이 위로 올라 갔다."


여러 문헌을 종합해 볼 때 첨성대가 천문을 살펴보던 기구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단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간 뒤 중간 부분 입구를 통해 들어가 안쪽에서 별을 관측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는 있다. 그렇더라도 형태가 워낙 기이하다 보니 용도를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학설은 거의 백가쟁명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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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 내부 모습.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우물설'은 석가모니와 박혁거세 등 성스러운 조상의 탄생을 형상화한 조형물이라는 관점이다. 선덕여왕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만큼 반대 세력이 많았다. 여왕이 취임한 데 대한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그녀가 신성한 인물의 후예임을 천명해야만 했다. 신라의 시조는 박혁거세다. 박혁거세가 탄생한 곳은 나정(蘿井)이라는 우물이다. 고대인들은 풍요와 생명, 다산을 뜻하는 우물을 신성시했다. 여왕은 우물 모양의 첨성대를 통해 우물 옆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의 후계자라는 것을 과시하려 했던 것이다.


여기에 불교적 의미가 가미되고 있다. 신라는 왕즉불(王卽佛), 즉 왕을 부처와 동일시했다. 선덕여왕은 신라인이 신성시하는 박혁거세의 후계자인 동시에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의 자손임을 알리고 싶었다. 그런 목적으로 첨성대에 마야부인의 몸을 투영시켰다. 불룩한 아랫부분은 마야부인의 엉덩이이고 중간 창문은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난 오른쪽 옆구리라는 견해다.


우물설은 '우주우물'로도 확대해석된다. 불교적 세계관에 젖어 있던 신라인들이 한 세계와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우주우물로서 첨성대를 만들었을 수 있다. 신라왕실은 불교적 유토피아인 도리천(세상의 중심인 수미산 정상의 33천에 존재하는 세계)을 동경했으며 그곳의 왕이자 불법의 수호신인 제석천을 신봉했다. 선덕여왕은 도리천을 동경해 죽음을 맞이하면서 도리천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기까지 했다. 선덕여왕이 우주우물인 첨성대를 세워 살아서는 신라 땅에 제석천이 강림하기를 바라고 죽어서는 자신이 도리천에 환생할 통로로서 이용하려고 했다는 해석이다.


층수를 보더라도 첨성대는 총 31층인데 대지를 1층으로 환산하면 모두 32천이 돼 이를 거쳐 33천인 도리천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불탑설'도 주목받는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사리를 차지하려고 주변 여덟 나라가 무력 충돌의 조짐을 보였다. 중재자가 사리를 8등분해 각국에 보내니 각국에 사리탑이 조성됐다. ‘불반니원경'은 사리를 분배받지 못한 나라가 유골을 담았던 병(甁)을 가져와 병탑을, 숯을 가지고 와서 재탑을, 숯을 갖고 와서 숯탑을 세움으로써 11탑이 조성됐다고 설파한다. 이런 불교 경전의 내용을 토대로 첨성대가 '병탑'이라는 의견이다.


그 밖에 학설로 태양에 비치는 첨성대의 그림자로 사계절과 24절기를 측정했다는 '규표(圭表·빛의 그림자로 태양의 고도를 재는 고대의 기구)설', 신라시대 수학인 주비산경(지름·높이·대각선이 3대4대5인 이상적 비례를 다룬 고대 중국의 서적)이 집약됐다는 '주비산경설', 농업신인 영성(靈星)을 숭배하던 제단이라는 '영성제단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성스러운 탑인 지구라트를 모방했다는 '지구라트설' 등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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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통감부 관측소장을 지낸 와다 유지가 그린 첨성대 원형 추정도.

첨성대는 또한 우리 고대 건축물 중 유일하게 일체의 재건 또는 복원 없이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조선 중기 성균관대사성, 호조참판 등을 지낸 조위(1454~1503)도 경주 첨성대를 바라보며 "겁화에도 타지 않고 홀로 남아, 쌓은 돌이 비바람을 견디고 우뚝 서 있네. (중략) 신라 때의 제작이 놀랍기만 하구나"라고 했다.


이런 통념과는 달리 사실 첨성대에는 붕괴의 흔적이 다수 발견된다. 우선 첨성대 몸통 상부 석재와 하부 석재의 가공법이 서로 다르다. 하층부 석재는 전부 모가 둥글게 가공된 반면 상층부 석재는 전반적으로 모가 각진 데다 중간중간 둥근 석재들이 불규칙하게 섞여 있다. 맨꼭대기인 31층 정자석도 금이 가 있거나 모퉁이가 떨어져 나갔다. 28층에는 분실된 돌이 있고 28층 남쪽 석재들과 27층 서쪽 석재들은 서로 위치가 바뀌어 있다.


첨성대가 붕괴됐다면 그 시기가 언제이며, 피해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혜공왕 15년(779)에 1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규모 6.7 지진이 발생했다. 첨성대는 물론 동시대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지진을 고려해 설계됐다. 따라서 지진으로 첨성대가 붕괴됐을 개연성은 낮다. 13세기 몽골군 침입 때, 16세기 임진왜란 때 첨성대도 피해를 입었을 수 있다.


17층 이하는 대체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18층 이상이 타격을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황룡사 9층 목탑을 불태운 몽골군은 첨성대 윗부분에 밧줄을 걸어 인위적으로 끌어당겼을지도 모른다.


한 번도 발굴 조사된 바 없는 첨성대 지하에는 많은 정보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언젠가 주변을 발굴하게 되면 수많은 의문점도 풀릴 수 있을까.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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