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나드는 운명적 화가 허윤희
요요 미술기행-51
허윤희 작 이야기(2009) |
사람들 앞에서 펼쳐지는 드로잉 퍼포먼스와 목탄 작품을 작가 역량 중 하나로 보았다. 나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은 재료에도 권력 가치를 부여한다. 그 첫 번째가 내구성이다. 두 번째가 유채색이다. 작품 '이야기. 2009'는 '삶은 끝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고, 살아가는 길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이야기로 꽃다발을 만들어 너라는 존재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또 다른 '의미'를 이미지로 보여준다. 강렬한 붓터치와 원색의 대비 및 조합, 실제 입에서 뿜어내는 듯한 구도가 특징이다.
사람들 스스로가 언어로 구획한 열등한 존재인 무채색과 내구성 떨어지는 목탄으로 그린 '드로잉'은 펼쳐지는 대상과 지나는 순간을 빠르게 형상화하는 회화적 수단이다. 서양화가 허윤희는 벽 한 면을 작품을 그려 가득 메운다. 머리 속에 미리 디자인된 관념을 풀어 작품을 만든다. '사라져 가다 - 소망을 품다. 2020'은 북극의 그린란드 빙하의 거대한 얼음 장벽을 소재로 했다. 4시간 동안 빙하가 녹아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뉴욕 등 메트로폴리탄의 마천루의 그것처럼 그린다. 녹은 빙하 잔해가 그 도시 바다에 떠 있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인간은 소멸하는 존재이나 문명과 인류가 사라져서는 안 된다.' '헌화. 2017'은 경계('남과 북' 혹은 '대립과 반목')에도 꽃은 피고, 그 꽃을 엮어 다발을 만들어 상대편에게 먼저 건넨다. 경계를 상징하는 철조망으로 꽃다발을 엮었다. 전쟁과 살육으로 쓰러져 간 억울한 영혼을 달래는 애도의 상징이자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어 평화를 염원하는 메시지이다.
드로잉을 퍼포먼스로 펼쳐보이는 행위가 공연인지 회화 작업인지 헷갈린다. 허윤희는 회화에 방점을 둔다. 관객과 회화의 과정도 공유하고 싶어서이다. 작가에겐 지난한 작업의 과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게 온전한 회화이다. 작가와 관객이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며 목탄 먼지가 피부에 와닿고, 목탄을 벽에 긋고 부서지는 소리, 호흡 소리(마이크로 연결)를 듣는 것이다. 목탄 대형 벽화 작품은 몸으로 그리는 드로잉이다.
허윤희 퍼포먼스라는 공감각적(시·청·촉각) 요소와 공간과 시간이 부가되어 공연으로 확대된다. 백남준이 속한 1960년대 전위예술그룹 '플럭서스'의 핵심 개념인 해프닝은 절제되어 있다. 목탄은 90년대 초부터 만졌고, 벽화에는 2002년부터 사용했다. 비디오(그리기와 지우기)는 벽화 작업과 연동된다. 화가 자신이 피사체가 되고 벽면이 스크린이 된다.
허윤희 작 헌화(2017) |
'사라져가다' '헌화' 등 대형 드로잉 작품의 본질은 조화이다. 폴란드의 미술사가 타타르키에비치(1886~1980)는 '미학사 : 고대미학'에서 '조화'를 "뒤섞인 많은 요소들의 통일이며 서로 맞지 않는 요소들을 일치시키는 것"으로 본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학파의 정의와 일치한다고 본다. 허윤희의 조화(비례 또는 질서)는 심메트리아(symmetria)에 해당한다. 심메트리아는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 머리로 이해하는 지성적 질서이다.
허윤희 드로잉 작업은 전시 기간 중 작품이 보존된다. 건축에서 가설물인 파빌리온(pavillon)과 같다. 허 작가는 회화, 비디오, 설치 등 장르 스펙트럼이 넓다. 드로잉은 회화 작업의 한 가지 수단이다. 유화, 아크릴, 파스텔, 구아슈 등 재료에도 제한을 두지 않는다.
허윤희는 1995년부터 2004년까지 겨울이 긴 독일 북부 브레멘에서 공부했다. 이 기간 영원이라고 믿었던 인간관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불교철학을 맞닥뜨리고 미련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 경구가 와 닿았다. ''인과 연이 화합하여 만들어 낸 모든 존재와 행위(諸行)'는 '항상 하는 것은 없다(無常)' 나라는 존재도, 내가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행위 또한 무상하다. 모든 존재는 생주이멸(生住異滅)한다. 만들어진 모든 것은 잠시 머물렀다 변화하여 소멸된다. 허 작가는, 니체의 '아모르 파티(amor fati·운명을 사랑하라)'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한다.
행복은 '늘, 지금 여기 이 자리, 현재'에 있다는 깨달음이 왔다. 현재 마음조차 고정된 실체가 없는 상황과 조건의 그림자일 뿐이다. 마음은 환영, 꿈, 물거품처럼 왔다가 사라져간다. 과거, 현재, 미래 마음에도 집착할 게 없다. '지금, 여기'의 시공간에 정주(定住)해야 한다. 흐릿한 개인사는 작품의 주제를 관통한다.
허윤희 작 `삶의 관(館) 집`(2001) |
매해 여름, 동료들과 지도 교수의 집이 있는 남프랑스 툴루즈 근처 갈란에 가는 건 즐거웠다. 스승은 허름한 저택 있는 넓은 땅에 예술아카데미를 세웠다. 허윤희는 그곳에서 대지(자연) 예술프로젝트에 참여했다. 2001년 '예술로서의 집짓기'가 과제로 주어졌을 때 두 달간 '삶의 관(館)집(coffin house);을 지었다. 한국의 상여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은 집에 들어가면 죽는 것이고, 일어나 나오면 사는 것이다. 죽음으로서 살아 있음을 생생하게 느끼고 싶었다. 자신의 키에 맞게 공간과 형태를 디자인하고 지붕이 평평한 관 모양 직육면체로 만들었다. 누웠을 때 머리는 한국을 향하게 동쪽에 놓이게 했다. 재료는 나무, 돌, 시멘트를 사용했다.
관을 뜻하는'coffin'은 '낡은 배'라는 뜻이기도 하다. 관 집을 지을 때부터 여행을 준비한 셈이다. 일상적 집의 부재(不在)는 공포이다. 삶도 여행이요 죽음 이후도 여행이다. 낡은 배는 항구에 도달 후 역할이 끝난다. 상여는 죽음 이후의 동반자이다. 상여는 꽃가마처럼 보이기도 한다. 꽃가마는 가장 빛나는 생의 출발이고, 상여는 그 종말이다. 2012년 방문 때 그 '삶의 관집'에서 실제 묵었다. 수백 년이 흘러도 끄떡없을 튼튼한 집이다.
프랑스 시골을 산책하면서 '어떤 집'의 모델이 된 집을 만나 홀린 듯 드로잉을 하였다. 집은 나 자신이고, 나무는 타자(他者), 동경하는 대상이다, 그 둘은 늘 가까이 또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존재한다. 덩굴이 집을 휘감고 있는 풍경은 집과 나무가 일심동체의 사랑일 수도 있고, 덩굴이 창과 문을 다 휘감으면 집은 고립된다. 존재와 관계에 대한 무의식이 투영된 풍경화일 수도 있겠다는 게 작가의 고백이다.
귀국 후 몇 년 되지 않아 온난화가 피부로 느껴졌다. 10여 년 동안 '나뭇잎 일기'를 그리고 쓰면서 봄이면 황사 때문에 외출하기 힘들었고, 여름날 산책하는 집 주변 공원 나뭇잎은 갈색으로 타들어 갔다. 목탄 작업이 격정적이라면 '나뭇잎 일기'는 수도자의 기도에 든 '관상(觀想)'과도 같은 작업이다. 주로 일상의 틈새 시간을 이용한다.
허윤희 작 난로(2012) |
2012년 8월 독일 동베를린 지역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가할 동안 보고 느낀 것들을 갤러리 내 대형 벽화로 그릴 계획이었으나 벽면 중앙에 이동시킬 수 없는 난로가 있었다. 난로는 길고 추운 겨울을 나는 도시 거의 모든 건물에 있다. 어떤 벽화를 그려도 난로가 방해될 것이 뻔했다. 난로를 소재로 택했고 빛나는 주연이 되었다. 입체물인 난로를 중심으로 90도로 꺾인 양 벽면과 천장에 대형 벽화 '난로'를 그렸다. 상황과 조건을 껴안은 작품이다.
남아공의 인종 차별과 폭력을 주제로 작업한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1955~ )는 1990년대 초 목탄 드로잉 영상 작품으로 주목받은 후 세계적 작가로 우뚝섰다. 남아공을 바꾼 이는 정치가 만델라이다. 예술가의 역할은 제한적이다. 광부 무리에 앞서 탄광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카나리아일 수밖에 없는 허윤희는 경기도 광주 영은미술관에서 10월 17일부터 11월 8일까지 회화, 드로잉, 영상 장르를 망라한 전시를 갖는다.
[심정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