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가볼만한곳 :: 서촌에서 지나는 계절을 여행하는 법
날씨가 눈치 없는 게 분명하다. 불과 한 주 사이에 두꺼운 외투를 꺼내야 할 정도로 쌀쌀한 날씨가 됐다. 한 두주 전까지만 해도 한낮엔 더위를 느낄 정도로 따뜻했었는데, 속도 없는 날씨에 벌써 가을을 빼앗긴 기분이다.
노랗게 물든 서촌의 풍경을 담으려고 단풍이 가장 무르익기를 기다렸었다. 웬걸 글로 담으려고 연재를 준비하는 며칠 간에 쌀쌀해진 날씨가 어이없기 그지없다. 사실 가을과 단풍을 주제로 연재하는 게 늦은 감이 있어 다음을 기약할까 했지만 이대론 억울해서 안되겠다. 너무 예뻤거든..
이번 편은 '가을, 이대론 보낼 수 없다' 특집이다. 박명수님이 그랬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너무 늦었다"라고.. 독자분들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시작입니다" 같이 허황된 희망을 불어 넣진 않고 싶다. 하지만 늦었으면 좀 어떤가? 낙엽이 떨어지면 떨어진 데로, 아직 나무에 붙어있어 준다면 감사하며 있는 그대로의 지나는 가을을 즐겨보자.
떠나는 가을을 붙잡으며 집착하는 이번 편. 조금 늦었어도 있는 그대로 좋았던 가을을 담은 서촌을 소개한다.
1. 서촌 가을단풍길(효자로)
서촌을 좋아한다. 아기자기하면서도 조용한 분위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달까? 한적한 듯 활기찬 적당한 모순이 마음에 든다. 핫플이란 핫플은 보이는 대로 돌아다니면서도, 사람 많고 시끄러운 곳은 기피하는.. 약간은 이상한 나에게 딱 제격인 동네다.
사실 '서촌'은 경복궁 서쪽 마을을 일컫는 별칭으로 정식 명칭은 아니지만, -길,-동으로 불리는 것보다 훨씬 정겹게 들린다. 브랜드의 이미지를 결정하는데 이름이 참 중요하듯, 촌으로 불리는 이곳의 이름이 서촌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 걸지도 모르겠다.
잘 만들어진 북촌 한옥마을같이 균형 있는 관광마을은 아니지만, 서촌은 불규칙의 조화로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청와대와 경복궁이 근처에 있어 이곳은 90년대 말까지 개발에 수혜를 받지 못했던 곳이다. 90년대 말 건축규제 완화로 빌라들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 한옥과 오래된 주택, 그리고 빌라가 공존하는 흥미로운 동네가 됐다. 건축규제가 완화됐지만 재개발이 추진되거나 대규모 개발이 진행되진 않았다. 대부분의 건물 터가 각자의 자리를 오랜 시간 지켜왔다는 말이기도 하다.
오래된 아파트나 빌라 주변을 둘러보면 오래된 건물만큼이나 세월을 버티고 자란 높게 뻗은 나무들을 제법 볼 수 있는데, 이곳도 그렇다. 오래된 동네만큼이나 함께 자란 나무들이 정겨운 동네 풍경을 만들어 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경복궁 왼편 돌담을 끼고, 가을색을 담은 나무들이 길게 늘어선 길을 만날 수 있다. 가을단풍길로 이름 붙여진 이 길은 이름에서부터 단풍 명소의 분위기가 풍긴다. 쉬는 날이면 여지없이 찾던 길 이름이 가을단풍길이라니, '친했던 친구가 알고 보니 제벌 2세였다고?' 같은 기분이랄까.
무심코 아이폰에 찍어내던 익숙했던 길이 새삼 달라 보인다. 경복궁 돌담과 따뜻한 색감의 나뭇잎이 만나 가을의 정취를 더한다. 고즈넉함과 가을의 한적함이 가득한 곳에서 천천히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서촌은 꽤나 이국적이다. 고궁과 한옥이 즐비한 동네에서 이국을 논하다니, 상충되는 의미에 의문을 표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분명 이국적인 정취를 느꼈다. 음.. 왜일까라는 고민을 해보고 나름의 정리를 해봤다. 아마 그 이유는 거리의 형태에서부터 오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이국적인 감성을 담은 카페나 상점이 들어선 영향도 있겠지만, 시간을 담은 건물들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서양의 건축 개발 형태를 보면 오래된 건물을 간직한 체 주거지와 상업지가 분리되지 않은 형태로 도시가 형성되었다. 1층엔 상가, 카페, 상점 그 위층으로 주거지로 사용되고 있다. 서촌을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건축규제로 건물들은 높지 않으며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1층은 오픈된 상점이나 카페로 사용되고 있다. 거기에 높게 뻗은 나무와 걷기 좋게 만든 길까지. 복합적인 요소들이 만들어낸 이국적인 정취이지 않을까 싶다. 저 멀리 '단풍국'이 있다면, 이곳은 '은행국'이라 이름 붙여보겠다. 한국적이면서도 이국적인 은행국에서 가을여행을 즐겨보자.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성동23-1
2. 보안1942
'통의동 보안여관'은 1942년부터 2004년까지 여관으로 운영되었던 곳이다. 서촌 통의동 일대는 수많은 예술가와 문학가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보안여관은 그런 수많은 예술가들의 쉼터가 되어주었다. 화려함과 현대적이고 좋은 건물이 즐비한 서울 한복판에 흑갈색 벽돌 외벽으로 된 목조 건물은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서촌의 작은 랜드마크가 되었다. 이런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이어받아 보안여관은 카페, 숙박, 서점, 갤러리가 함께하는 '보안1942'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보안여관의 구옥은 내부 리모델링을 거의 하지 않았다. 70년 전 건물 내부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식 목조 건물은 수많은 기둥과 골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튼튼하게 버텨왔지만, 유지 보수하는 데에 꽤나 공을 들였다고. 옛것을 간직한 목조 뼈대와 나무 바닥, 계단과 벽돌이 오랜 건물의 역사와 정서를 담고 있어, 가치를 이어 간직하고자 하는 의도가 잘 담겨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보안여관 구옥은 현재 다양한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는 갤러리로 운영되고 있다. 보안여관을 갤러리로 처음 운영할 때만 해도 '전시'라는 문화는 현대식의 깔끔한 건물에서 즐기는 고급스러운 문화였다. 골조가 그대로 보이는 오래되고 낡은 건물에서 하는 전시는 그 자체로 파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파격적인 시도는 보안1942만의 예술적 아이덴티티를 만들어 냈고, 여전히 사회와 예술의 경계를 이어주는 새로운 예술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다양한 전시가 무료로 운영 중이니 서촌에 들렀다면 잠시 들러 예술적인 감성을 충전해 보는 건 어떨지.
앞서 언급했듯 보안여관은 여전히 숙박업(보안스테이)을 운영하고 있으며, 1층엔 카페와 마켓도 운영 중이다. 그중 돋보이는 건 2층 운영 중인 '보안책방'이다. 책을 판매하기도 하지만 북카페로도 운영되며, 공연, 워크숍 등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의 아지트가 되어주고 있다. 돋보인다 말한 건 이런 공간이 보안1942의 예술적 문화가치를 가장 잘 표현해 낸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책을 읽는 시간도 좋지만 책이 있는 공간에 머무는 것만으로 꽤나 기분 좋은 시간이 된다. 전체적으로 화이트톤의 인테리어와 불규칙적인 듯 규칙적인 짜임새가 편안함을 만들어낸다. 조용한 서점의 분위기는 따뜻한 가을 오후와 너무도 잘 어울린다. 이층의 서점에 크게 난 창은 가을볕을 잘 담아낸다. 볕이 주는 따뜻함 만큼 산뜻한 게 또 있을까? 고요히 책 넘어가는 소리와 종이 냄새, 창밖 은행나무를 배경 삼아 쉼을 향유해 보자.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33
- 문의 : 02-720-8409
3. 그라운드시소, 요시고사진전
서촌 골목길을 다니다 보면 여러 유명 갤러리와 건축물을 만날 수 있다. 오래전부터 예술과 문화를 담고 있는 동네였기에 자연스레 갤러리촌이 형성되었다. 서촌 여러 건물들을 봤지만 유독 한 공간이 눈에 띈다. 예술, 문화가 만나는 복합문화공간 그라운드 시소를 소개한다.
여느 필로티 건물의 구조에서 볼 수 있는, 1층 주차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작은 연못이 자리 잡고 있다. 사실 검정 바닥에 잔잔한 물을 담아 연못 같은 착시를 만들어낸 공간이지만 그럼 어떤가. 연못으로써 훌륭한 역할을 해내고 있으니 말이다.
1층의 정원은 벽이나 경계 없이 주변과 잘 연결되어 있다. 이 공간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아도 서촌 골목을 여행하는 여행객들에게 도심 속 휴식처이자 정원이 되어주고 있다.
1층을 관통하는 중정을 만들어냈기에, 이곳만의 단독 공간이 아닌 주변과 잘 조화한 서촌스러운 공간이 되었다. 연못 위로 벽을 쌓듯, 원통형으로 공간을 전개해 마치 우물과 같은 모양을 담아내고 있다. 어느 층에서도 중정을 볼 수 있는 구조로 시원한 공간감을 선사한다. 위로 동그랗게 뚫린 천장으로 하늘을 감상해 본다면 시원한 가을 하늘의 청량감마저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건물의 외벽과 기둥 등 많은 곳에 벽돌을 사용했다. 벽돌은 오래된 건축 자재 중 하나면서도 유행을 타지 않는 재료다. 오랜 시간을 품은 서촌과 잘 어울리는 건축자재이다. 벽돌을 쌓는 방식에서 예술적 감각을 더해 단조로움을 피했고, 주변과 조화를 이뤄냈다.
또 하나의 매력 포인트는 햇빛을 아주 잘 사용했다는 점이다. 뚫린 벽돌 사이사이로 볕이 들어오게 했으며, 곳곳에 창을 내 건물 여러 곳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볕을 볼 수 있다. 건물 내부로 들어오는 햇빛은 더할 나위 없는 조명이 되어주니 자연광에 기분 좋지 않을 이유도 없겠다.
'요시고 사진전: 따뜻한 휴일의 기록'은 한동안, 아니 여전히 핫한 전시이지 않을까 싶다. 현재 요시고 사진전은 서촌 그라운드시소에서 전시 중이다. 푸른 지중해를 둘러싼 유럽의 휴양지부터 마이애미, 두바이, 부다페스트 등 세계 여러 여행지에서의 풍경과 건물 여행 사람들을 담아내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준 여행에 대한 갈증과 피로를 간접적으로나마 해소하기에도, 일상에 지쳐 굶주린 감성을 채우기에도 아주 좋은 전시다. 물론 전시를 관람하고도 여행을 떠나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지만, 전시를 보는 동안 몸은 아니었어도, 적어도 마음은 잠시 해외여행을 떠났다.
12월 5일까지 전시로 곧 종료될 전시였지만, 3월 1일까지로 연장되었다. 이미 다녀온 분들도 있겠지만, 아직 다녀오지 못했다면 꼭 한번 다녀오는 걸 강추한다.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6길 18-8
- 문의 : 0507-1338-9746
빨리 찾아온 추위 때문인지, 기분 탓인지 이번 가을은 유난히도 짧은 거 같다. 지나는 계절을 사람이 어쩌겠냐마는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가을을 붙잡을 수 없으니 하루라도 더 알찬 가을을 보내는 것만이 방법이겠다. 곧 품절될 가을을 하나라도 더 담으러 서촌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지.
# 쉼이 필요한 당신께 제안하는 서울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