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재계 2위 등극이 의미하는 것
차세대 성장 산업 공격적 투자하고 ESG 경영 앞장
전문가들 “기업 가치 평가 때 ‘무형자산’ 더 반영해야”
공정거래위원회는 4월 27일 SK가 현대자동차를 제치고 자산총액 기준 기업집단 2위에 올랐다고 발표했다. / 연합뉴스 |
SK그룹이 자산규모 기준 재계 2위에 올랐다. 삼성과 현대차에 이어 3위에 오른 지 16년 만에 한계단 더 상승했다. 지난 4월 27일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2022년도 공시대상기업집단(대기업집단)’ 자료에 따르면 SK의 자산총액은 291조9690억원으로 삼성(483조9187억원)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현대차의 자산총액은 257조8453억원으로 3위가 됐다. 5대 그룹(삼성·SK·현대차·LG·롯데) 내 순위가 바뀐 것은 2010년 이후 12년 만이다. SK와 현대차 두 기업집단의 순위가 바뀐 것은 2004년 이후 18년 만이다.
재계와 SK그룹 등에 따르면 SK의 순위가 올라간 것은 반도체와 배터리, 바이오 등 차세대 성장 산업에 과감히 투자하고, 집중적으로 육성한 결과라는 평가가 나온다.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을 내세우면서 주요 계열사의 사업 모델을 재편하고, 기업공개(IPO)와 기업분할로 기업 가치를 키운 것도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BBC’와 ‘ESG’에 집중
SK그룹은 고 최종현 선대회장부터 성장이 예상되는 산업에 과감히 투자하는 방식으로 기업을 키웠다. 1980년 대한석유공사, 1994년 한국이동통신 등을 인수하면서 에너지·화학과 정보통신을 중심으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최태원 회장은 여기에 2012년 하이닉스 인수를 시작으로 반도체와 배터리, 바이오를 추가하며 자산을 불렸다. 이 과정에서 2005년 말 약 55조원에 불과했던 SK그룹의 자산은 5배 넘게 늘었다. 56개였던 계열사도 3배 이상 많아졌다.
SK그룹 내에서는 새 성장동력을 ‘BBC’라고 일컫는다. 배터리(Battery), 바이오(Bio), 반도체(Chip)의 영어 앞글자를 따서 만들었다. 2017년부터 전체 글로벌 시장 투자금 48조원의 약 80%를 이 분야에 투자하고 있다. 특히 반도체가 SK그룹의 최근 성장세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 지난해 SK그룹의 자산 증가액 52조5000억원 중 20조9000억원이 반도체 분야다. SK하이닉스 인수 이후 반도체 생태계 강화를 위해 설비 및 연구개발(R&D) 분야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기 때문이다.
SK그룹은 하이닉스 인수 첫해 청주 M12를 시작으로 2015년 M14(이천), 2018년 M15(청주), 2021년 M16(이천) 등 축구장 29개 크기의 반도체 공장 4개를 증설했다. 반도체용 특수가스(SK머티리얼즈)와 웨이퍼(SK실트론) 회사를 인수하면서 연관 제품을 전략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했다. 반도체 호황기를 맞으면서 반도체 매출이 상승했고, 이에 힘입어 인텔 낸드사업부까지 인수했다. 이를 통해 SK하이닉스의 자산은 2012년 말 18조2000억원에서 지난해 말 85조원으로 4배 이상 늘었다. SK머티리얼즈와 SK실트론의 자산 합계도 2조4000억원에서 4조7000억원으로 증가했다.
ESG 경영을 강조하면서 친환경, 신재생에너지, 바이오, 첨단소재 분야의 신규 사업에 진출한 것도 자산 증가로 이어졌다. 2020년 7월 바이오팜을 시작으로 SK바이오사이언스, SK아이이테크놀로지, SK리츠 등 4개사를 상장하면서 자산이 4조원 늘었다. SK에코플랜트, SK쉴더스 등의 기업공개(IPO)도 예정돼 있어 지속적인 자산 증가가 예상된다. 지난해 전기차 배터리 사업을 담당하는 SK온을 물적분할한데 이어 정보통신 시장에서 신성장 동력원을 발굴하기 위해 SK스퀘어를 인적분할하는 등 4개 기업을 분할하면서 자산이 15조원 늘었다.
SKC와 SK케미칼은 그린에너지와 바이오기업으로 변신하면서 설비투자를 단행해 자산규모가 2016년 31조4000억원에서 지난해 47조6000억원으로 급증했다. 발전업과 폐기물 처리회사 등 친환경에너지 회사를 설립·인수하면서 SK그룹의 계열사는 지난해 말 기준 186개로 2020년 대비 38개나 늘었다.
■사회 요구에 대응하는 기업이 성장
순위 바뀜을 보는 재계는 과거처럼 떠들썩하지는 않다. 자산규모와 같은 외형적 성장보다 내실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우세하기 때문이다. SK그룹 관계자는 “기업 가치나 사회적 가치, ESG와 같은 핵심 지표를 높여 주주와 투자자, 협력업체, 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의 편익을 높이는 경영이 중요하지 외형적 성장을 자랑할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반도체와 배터리, IT 플랫폼, 탄소중립과 에너지 전환 등 산업의 흐름 변화에 올라타 꾸준한 성장세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도 했다.
IT 플랫폼 기업의 성장은 대표적 사례다. 처음 대기업집단(자산총액 5조원 이상)에 지정된 해를 기준으로 카카오는 2016년 65위(5조1000억원)에서 올해 15위(32조2160억원)로 올랐고, 네이버는 2017년 51위(6조6000억원)에서 올해 22위(19조2200억원)로 올랐다. 넷마블도 2018년 57위에서 35위로, 넥슨은 2017년 56위에서 39위로 상승했다. 특히 가상자산 거래소 ‘업비트’를 운영하는 두나무는 코인 열풍을 타고 자산총액이 10조8225억원으로 1년 만에 8배나 증가했다. 가상자산업계 최초로 상호출자제한 집단에 지정되면서 대기업 순위 44위에 올랐다.
재계 순위 변동은 산업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삶의 질을 높이고, 사회공동체가 요구하는 가치에 부응하는 기업의 생존 확률이 높다고 강조한다. 정은미 산업연구원 성장동력산업연구본부장은 “(재계 순위 변동은) 사회적 요구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기업이 성장한다는 걸 그대로 보여준다”면서 “탄소중립 등 산업의 수요 변화에 맞춰 민첩하게 사업 구조를 바꾸고 매출을 창출하는 데 성공한 기업이 이익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류원상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는 “산업의 구조 변화는 아무리 개별 기업이 전략을 잘 짜더라도 극복하기 쉽지 않은 메가 트렌드라 이에 따른 영향이 재계 순위에도 반영되고 있다”면서 “대체로 플랫폼 비즈니스와 관련 있는 산업이 성장하고, 전통 산업은 소외받는 흐름을 보인다”고 말했다.
공정위는 매년 자산총액 5조원 이상인 기업집단을 공시대상기업집단(76개)으로 지정한다.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을 막기 위해 2009년부터 대규모 기업집단의 출자현황 등에 관한 공시 의무를 부과한 것이다. 자산총액이 10조원 이상이 되면 상호출자금지와 채무보증제한 등을 적용받는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47개)으로 지정된다.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은 재벌의 특수성을 반영한 것으로 이스라엘을 비롯해 소수의 국가에서 비슷한 규제가 있다.
김재신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이 4월 2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2022년도 공시대상기업집단 76개 지정과 관련한 발표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
■기업가치 평가하는 새 기준 필요
상호출자제한기준은 향후 경제 여건의 변화를 반영해 자동적으로 바뀔 예정이다. 공정거래법 전면 개정에 따라 2024년부터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을 지정할 때 자산총액 10조원 이상이 아닌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0.5% 이상을 기준으로 잡게 된다. 공정위 기업집단국의 한 관계자는 “경제성장에 맞춰 기준을 바꿀 필요가 있어서 GDP에 연동했다”면서 “2024년이 되면 자산총액 10조2000억원 이상일 경우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이 될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2021년 명목 GDP(2023년 6월 확정치 발표) 2057조4000억원의 0.5%에서 1000억원 미만을 떼버린 결과다.
기업 가치 평가의 기준은 용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규제에 필요하다면 자산 기준이, 투자를 결정할 때는 시가총액과 매출액 기준이 더 맞을 수 있다. 일례로 미국의 ‘포춘’지는 매출액 기준으로 글로벌 500대 기업의 순위를 선정한다. 지난해 기준으로 삼성전자(15위), 현대차(83위), SK(129위) 등 15개 국내 기업이 이름을 올렸다. 배진한 고려대 경영대학 교수는 “매출액이나 시가총액은 변동성이 심하고 자산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경우가 많아 규제기관은 자산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투자자 입장에서는 자산보다는 매출과 시장점유율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전문가 사이에선 기업가치를 평가하는 지표로 자산보다 더 의미 있는 지표를 발굴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류원상 교수는 “일반적으로 자산이라고 말하는 유형자산(원재료·건물·기계·설비 등)보다 (회계상 잡히지 않는) 무형자산(아이디어·지식·역량·특허 등)의 가치가 시가총액과 매출액 등 기업 경영에 더 지속적인 영향을 준다”면서 “유형자산보다 무형자산의 가치를 더 잘 반영하는 방향으로 기준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태원 회장도 지난 4월 27일 서울대 특강에서 “기업의 가치는 기업이 설득력 있는 스토리를 제시하고, 이를 추진할 의지와 역량에 대해 주주나 투자자가 신뢰를 할 때만 형성된다”며 “자산가치를 매기는 기업집단 순위는 큰 의미가 없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정은미 본부장은 산업의 무게 중심이 제조업에서 디지털과 지식산업으로 바뀌면서 규제기관이 눈여겨볼 기업의 가치도 바뀔 수 있다고 봤다. 정 본부장은 “자산은 절대적이거나 최우선의 기준이 아닐 수 있다”면서 “(애플·구글 등) 잘 나가는 기업들은 (인수대상을 볼 때) 땅과 공장, 기계를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인적자본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를 중시하기 때문에 규제기관도 이에 대응하는 기준을 언젠가는 반영해야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