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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by 경향신문

건물주 “화재 피해 배상하고 나가”…종로 고시원 또 날벼락

“30일 계약 만료” 통지서

3년 전 원장이 신청한 스프링클러 지원 사업 거부해

“도의적 책임 최선”과도 거리…원장 “없는 자의 아픔”

건물주 “화재 피해 배상하고 나가”…

화재로 7명이 사망한 서울 종로구 국일고시원 앞에 지난 11일 시민들이 추모의 의미로 놓고 간 꽃과 글들이 쌓여 있다. 김기남 기자

“착하게 살았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어.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구순옥씨(68)가 27일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없는 자의 아픔”이라며 긴 울음을 터뜨렸다. 구씨는 서울 종로구 관수동 국일고시원 원장이다. 지난 9일 국일고시원에서 화재가 일어나 7명이 숨졌다. 구씨가 통곡한 이유는 건물주에게서 받은 통지서 때문이다. 국일고시원 건물주 하필연씨(68)는 구씨에게 임대차계약이 만료되는 30일 전까지 2개월 연체된 임대료와 화재사고로 발생한 모든 손해를 배상하라는 통지서를 지난 22일 보냈다.


하씨는 통지서에 “30일까지 건물을 본인에게 명도할 것”이라며 “연체된 임대료와 화재사고로 인해 본인에게 발생한 모든 손해를 배상해주실 것을 통지한다”고 밝혔다. 하씨는 “사고로 인해 본인이나 귀하 모두 황망한 상황이기는 하나 건물임대차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부득이 통지서를 보낸다”며 “화재사고로 인해 건물이 전소멸(전소·소멸)됨으로써 본인과 귀하 간의 임대차계약은 더 이상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됐으므로 계약은 해지하며, 계약기간이 30일로 만료되고 임대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계약을 연장할 수도 없다”고 했다.


구씨는 2009년 4월부터 하씨와 임대차계약을 맺고 고시원을 운영해왔다. 보증금도, 임대료도 계속 올랐다. 2009년 보증금 3500만원, 임대료 385만원은 올해 각각 8000만원, 638만원으로 올랐다. 고시원 주민 40여명 중 월세 28만~32만원을 제때 내는 이는 절반도 되지 않았지만 구씨는 독촉하지 않았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밥과 반찬이 떨어지지 않게 애썼다. 겨울에는 300포기씩 김장을 했다. 명절에는 잡채를 내놓았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청소도 직접 했다. 경제 사정이 점점 어려워져 구씨는 올해 처음으로 2개월 동안 건물주에게 임대료를 내지 못했다.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는 고시원은 겨울철 LPG 난방비만 200만원 이상 들었다. 구씨는 올해 임대차계약이 끝나면 운영을 포기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임대차계약 만료를 21일 앞두고 고시원에 불이 나면서 구씨의 삶은 무너졌다.


구씨는 “돌아가신 분들의 얼굴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려 눈을 감아도 감는 게 아니다. 스프링클러가 있었다면 아무도 죽지 않고 큰불도 안 났을 것이다. 경찰 감식 결과도 나오지 않았는데 건물주는 배상하고 나가라고 하니 하루하루가 지옥이다.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죽고 싶다”고 했다.


국일고시원 건물주는 하씨와 오빠 하창화 한국백신 회장(78)이다. 하씨가 건물 지분 60%, 하 회장이 지분 40%를 갖고 있다. 하 회장은 화재 이후 한 언론 인터뷰에서 “고달픈 생활을 해온 분들이 비명에 갔다는 게 참담하다”며 “경찰 조사에 성실히 응할 것이고 그 외에 도의적 책임을 지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통지서 내용과 ‘도의적 책임’은 거리가 멀어 보인다. 국일고시원 화재엔 건물주 책임도 있다. 스프링클러만 설치됐어도 피해 규모는 줄어들었다.


구씨는 2015년 서울시에서 시행한 노후고시원 간이 스프링클러 설치사업에 지원했다. 서울시는 국일고시원을 포함해 43개 고시원을 지원 대상으로 선정했지만 국일고시원에는 설치하지 못했다. 하씨가 스프링클러 설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스프링클러 설치 조건이 임대료를 5년 동안 동결하는 것인 데다 건물의 용도 변경, 업종 전환, 매매 등이 어려울 수 있어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구씨의 ‘지옥 같은 하루하루’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법적으로는 모든 배상 책임을 구씨가 져야 한다. ‘갑’ 하씨와 ‘을’ 구씨가 2011년 10월 작성한 부동산임대차계약서에는 “을은 취급상품과 시설물에 대해 자기 책임하에 보관하고 화재, 도난, 기타 불가항력으로 인해 발생하는 손해에 대해 갑은 일체 그 책임이 없다”(제6조), “계약기간 만료 또는 기타 사유로 본 계약이 해지됐을 경우 시설은 갑에 귀속되며 갑의 요구가 있을 경우 을은 원상복구의 책임이 있다”(제9조)고 규정돼 있다. 2013년 11월 추가된 조정조항에는 “피고는 원고에게 위 건물부분을 양도할 때 건물을 원상복구하여 명도”라고 적혀 있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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