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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 거장’의 후예 ‘아스토르 피아졸라 퀸텟’ 첫 내한···아내가 말하는 거장은?

‘아스토르 피아졸라 퀸텟’ 첫 내한…탱고 거장 피아졸라 아내 e메일 인터뷰

탱고를 세계적 예술로 격상시켜 김연아도 고별무대 배경음악 채택

“음악적 열정으로 조롱 뛰어넘어 생전 2000곡 넘게 작곡 경이로워”

경향신문

처음으로 한국을 찾는 아스토르 피아졸라 퀸텟. 왼쪽부터 기타 게르만 마티네즈, 콘트라베이스 세르기오 리바스, 반도네온 라우타로 그레코, 피아노 크리스티안 자라테, 바이올린 세바스티안 프루삭. 피아졸라재단 제공

탱고의 고향은 빈민가의 술집이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그곳에서도 이민자들이 유난히 많이 살던 항구동네 ‘보카’에서 태어났다. 노동자와 뱃사람들이 모여들던 빈민가 선술집의 등불이 하나둘 켜질 때쯤이면, 반도네온과 바이올린이 뜨거운 템포의 음악을 연주했고 술집의 남녀는 리듬에 맞춰 어울렸다. 아르헨티나의 거장 아스토르 피아졸라(1921~1992)는 바로 그 음악을 세계적인 예술로 격상시킨 ‘새로운 탱고’(Nuevo Tango)의 아버지였다. 한국에서는 피겨 여왕 김연아가 고별무대에서 그의 음악 ‘아디오스 노니노’를 사용해 친숙하다.


피아졸라 음악의 계승자로 평가받는 ‘아스토르 피아졸라 퀸텟’이 첫 내한한다. 5월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4일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한다. 생전의 피아졸라가 가장 애호했던 연주 형태가 ‘퀸텟’(5중주)이었고, 이번에 내한하는 퀸텟은 그의 마지막 부인이자 현재 ‘피아졸라 재단’의 대표인 라우라 피아졸라가 창단한 연주단체다. 1976년 처음 만나 피아졸라가 사망했던 1992년까지 함께 지냈던 라우라 피아졸라를 e메일로 인터뷰했다.


피아졸라는 ‘융합’의 음악가다. 탱고와 클래식, 재즈가 한데 어울려 ‘누에보 탱고’라는 독특한 양식에 이르렀다. 그가 집에서 휴식을 취할 때, 혹은 당신과 함께 듣던 음악은 어떤 것들이었는지 궁금하다.


“특이하게도 아스토르는 자기 음악을 집에서 거의 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녹음을 하기도 했던 마일스 데이비스, 칙 코리아, 게리 멀리건 같은 재즈 음악가들의 연주를 듣는 걸 좋아했다. 바흐를 좋아했고 스트라빈스키, 바르토크 같은 현대 작곡가들에게도 심취했다. 피아니스트 중에서는 글렌 굴드를 즐겨 들었다. 록음악도 많이 들었는데 퀸, U2, 스팅, 에머슨 레이크 앤드 파머 등을 칭찬했던 기억이 난다. 아, 그리고 그는 자신을 ‘비틀스의 팬!’이라고 했다.”


피아졸라는 ‘뜨거운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무대에 올랐을 때도 굉장히 격정적으로 연주했다. 옆에서 보기에는 어땠는가.


“집중력이 대단했다. 연주가 끝나면 나는 그에게 일단 물부터 먹였다. 거의 2ℓ를 들이켰다. 공연을 한번 하고 나면 살이 쭉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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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아스토르 피아졸라(오른쪽)와 그의 아내 라우라 피아졸라. 피아졸라재단 제공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를 들려달라.


“우리의 만남은 뭔가 운명적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성악을 공부하면서 그를 본 적이 있다. 나는 훗날 TV 프로그램 진행자로 일했는데, 뜻밖에도 아스토르는 어느날 내가 인터뷰할 게스트였다. 처음에는 그가 내게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콘서트와 뒤풀이 자리에까지 나를 초대했다. 아, 물론 나는 TV 스태프들과 함께 갔고, 그는 약간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전화번호를 주고받았고, 이후 그는 내게 몇번 전화했다. 그런데 만날 수 없었다. 나는 너무 일찍 일어났고 그는 너무 늦게 잤기 때문이다. 타이밍이 안 맞았다. 그러다가 내가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어졌을 때 마침내 만났다. 같이 저녁을 먹은 어느날부터 헤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됐다.”


무대 밖의 피아졸라는 어땠는가. 당신과의 첫 데이트가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것이었다고 들었는데.


“아스토르는 동물을 아주 좋아했다. 내가 강아지를 기르는 걸 알고는 그 아이를 만나고 싶어했다. 아스토르와 (내 강아지) ‘블랙’은 만나자마자 친해졌다. 나중에, 결혼 생활 내내, 우리는 여러 마리의 반려동물을 키웠다. 그는 ‘윈디’라는 강아지의 죽음에 크게 상심해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윈디의 뒤를 이어 입양한 강아지 ‘플로라’에게는 ‘무무키’라는 별명을 지어줬고, 자기가 작곡한 곡의 제목으로 쓰기도 했다. 그는 요리와 영화를 좋아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8시부터 낮 12시까지 작곡을 했고,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오후 5시까지 곡을 썼다. 작곡할 때 사용한 악기는 피아노였다.”


피아졸라가 작곡을 하던 과정, 그 모습에 대해 말해달라.


“그는 책상에 앉아서 곡을 썼다. 왼손잡이였다. 책상 위에 노트를 올려놓고, 빠른 속도로 거의 멈춤 없이 써내려갔다. 내가 보기에 마치 누군가 그의 옆에 서 있고, 그는 다만 받아적는 것 같았다. 그렇게 써내려간 악보에 복잡해 보이는 음악이 적혀 있는 걸 보면서 경이로운 느낌을 받곤 했다. 그는 생전에 2000곡이 넘는 많은 곡을 썼고, 나와 ‘피아졸라재단’은 여전히 그의 원고를 복원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1990년 파리에서 피아졸라가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당신은 위급한 상태의 그를 아르헨티나로 이송했고, 피아졸라는 약 2년간 당신의 간병을 받다가 사망했다.


“아스토르는 항상 내 나라에서 죽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가 꼭 그렇게 할 것이라고 약속했었다. 당시 그의 상태가 너무 위중했기 때문에, 나는 아르헨티나 대통령이었던 메넴에게 도움을 청해 비행기와 의료진, 의료장비 등을 지원받았다. 그 비행기를 타고 파리에서 아르헨티나로 돌아왔다. 아스토르가 쓰러진 뒤 11일 만이었다. 2년 뒤 그가 마지막 숨을 내쉴 때도 나는 그의 곁에 있었다.”


피아졸라는 어떤 음악가라고 생각하는가. ‘피아졸라재단’에 대해서도 말해달라.


“아스토르는 그 시대의 규범과 기득권층에 반항했다. 탱고 공동체에서 자신의 동료, 혹은 윗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았음에도 그는 앞으로 전진했고 자신감과 열정으로 음악에 매진했다. 그렇게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만들었다. 재단을 설립한 첫번째 계기는 그에 대한 사랑이었다. 나는 위대한 인간이자 예술가인 아스토르를 영원히 기억되게 하고 싶다. 그의 음악 유산을 세계 곳곳에 알리고 싶다. 그래서 우리는 아스토르가 살았을 때 (그의 반대자들에게) 가장 악명 높으면서도, (아스토르 본인이) 가장 선호했던 음악형식인 퀸텟을 통해 그의 유산을 이어나가고자 한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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