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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적응한 선조의 지혜, 수백년 이어져 ‘풍경’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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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방렴은 조수 차를 이용한 재래식 어항이다. 지족해협에 드문드문 박혀 있는 대나무 그물은 그 자리 그대로 수백년 이어온 바다 풍경이다.

오래된 풍경은 대개 아름답다. 평범한 사물도 시간이 흐르면 제 나름의 사연을 갖게 되는 법이다. 하물며 수백년 한 모습을 간직한 풍경이라면 묵은 이야기가 없을 리 없다. 그런 이야기는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게 마련이다.


죽방렴과 다랑이논, 방조어부림은 경남 남해를 대표하는 경관이다. 남해를 떠올릴 때 누구나 셋 중 하나의 이미지를 먼저 머릿속에 그릴 법하다. 세 장소엔 자연에 적응하고 때로는 그에 맞서 생활을 일궜던 선조들의 삶의 흔적이 진하게 배어 있다. 과거의 지혜는 오늘에도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일찌감치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세 명소를 찾아 떠난 남해의 봄날은 더없이 싱그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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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관광객이 바다를 옆에 낀 물건리 방조어부림 산책로를 걷고 있다. 연두빛 새 잎이 무성한 숲은 이미 초여름에 접어든 듯 보였다.

하루 두 번씩 퍼내는 바다의 보물상자

죽방렴(명승 71호)은 남해군 창선면과 삼동면 사이를 흐르는 지족해협에 자리 잡고 있다. 바다에 V자형으로 참나무 말목을 여러 개 박고 말목 사이를 대나무로 발을 엮어 막은 다음 썰물 때 물이 빠지면 그 안에 갇힌 물고기를 잡는 전통 어업방식이다. ‘대나무 어살’이라고도 부르는데, 수심이 얕은 개펄에 설치하는 고정형 그물이라 보면 된다. 삼국시대부터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후기에 지금의 형태를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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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방렴에 든 물고기는 뜰채로 건져낸다. 멸치를 주로 잡지만 도다리, 전어, 갑오징어 같은 손님 고기도 심심찮게 든다.

25년째 죽방어업을 해온 이기준씨(76)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지족해협에 있는 죽방렴은 모두 23개로 마을 공동 소유인 1개를 제외하면 모두 주인이 따로 있다. 이씨의 죽방렴에 도착해 대나무로 짠 작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썰물이라 죽방렴 안 바닷물은 어른 무릎 높이까지 빠져 있었다.


작업복을 입고 뜰채를 든 채 천천히 돌다보니 헤엄치는 물고기가 여럿 눈에 들어왔다. 대추알만 한 호래기(꼴뚜기)와 졸복 무리가 물 위를 유영하고 그사이로 손바닥만 한 병어와 전어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바닥엔 꽃게와 도다리가 꼼짝 않고 몸을 숨기고 있었다. 세멸, 중멸, 대멸 등 크기에 따라 이름이 다르고 모양도 빛깔도 제각각인 멸치 떼도 이리저리 군무를 췄다. 뜰채를 휘휘 젓자 커다란 아귀 한 마리와 갑오징어 두 마리가 빨려 들어왔다. 잡는다기보다 숫제 쓸어 담는다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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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방렴에 든 아귀와 병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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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게도 여러 마리 잡혔다.

죽방렴은 물때에 맞춰 한 달에 15일, 하루 두 번씩 작업이 이뤄진다. 안에 들어온 고기를 가둬놨다가 필요할 때마다 들어가 건져온다는 말이 실감났다. 이씨는 “온난화 때문인지 한 3년 전부터 멸치 어획량이 30~40% 줄었다”면서 “노래미, 도다리, 주꾸미, 낙지도 예전엔 많았는데 요즘은 얼굴 보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죽방렴은 주로 멸치잡이에 사용되는데, 그물로 잡은 멸치와 달리 뜰채로 건져내기 때문에 어획 과정에서 손상이 전혀 없어 비싼 값에 팔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상품 죽방멸치는 일반 멸치에 비해 수십 배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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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줄기 초록빛 무늬가 선명한 대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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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손가락만 한 호래기와 졸복 무리

수심이 얕은 바다가 잔잔하게 보였는데 돌아 나오는 길 뱃전에 부딪히는 물살이 꽤 셌다. 유속이 시속 15㎞쯤 된다고 했다. 지족해협은 좁다는 뜻으로 ‘손도’ 바닷길이라고도 불리는데, 물목이 좁아지는 구간이라 조류가 세고 그에 적응해 사는 물고기도 탄력 있고 맛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저 지형도 진흙과 모래, 자갈, 조개껍데기 등이 혼합된 퇴적물로 이뤄져 있어 죽방렴 설치에 좋은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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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해협엔 모두 23개의 죽방렴이 있다. 각각의 죽방렴은 조류가 흐르는 방향을 정확히 계산해 물고기가 많이 몰리는 장소에 설치돼 있다.

바다에 늘어선 죽방렴을 감상하려면 지족해협을 가로지르는 창선대교에 올라도 되고, 지족마을에서 관광객 체험을 위해 설치한 나무다리를 이용하면 더 가까이에서 재래식 어항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지족어촌체험마을(055-867-8249)에선 매년 4~11월 죽방렴 체험행사를 진행한다. 기왕 방문했다면 좁은 바닷길에 늘어선 죽방렴을 배경으로 붉게 물들어가는 석양도 놓치지 말자.

계단논에 스민 간난신고의 세월

남해 가천마을의 다랑이논(명승 15호)은 바닷가 산비탈에 펼쳐진 그림 같은 경치 덕에 관광지로도 드라이브 코스로도 인기가 높은 곳이다. 하지만 엽서 표지처럼 예쁘기만 한 풍경 속에 주민들의 신산한 삶이 녹아있다는 걸 아는 이는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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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유채꽃이 층층이 핀 다랑이논은 짙푸른 남해 바다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포구를 중심으로 부락이 형성된 남해의 여느 마을과 달리 가천마을 앞바다는 파도가 센 탓에 항구가 들어서지 못했다. 고기잡이를 할 수 없으니 농사를 지어야 했고, 산골짜기 급경사지에 좁고 기다랗게 경작지를 100층 이상 만든 게 다랑이논이다. 논밭이 계단 모양을 형성한 건 농사지을 땅을 한 뼘이라도 늘리기 위해 석축을 수직으로 쌓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가천마을을 병풍처럼 두른 설흘산과 응봉산 비탈엔 석축 쌓기 좋은 돌들이 널려 있었다.


어느 농사꾼이 하루 종일 일을 하다가 저녁 무렵 자기 논을 헤아려 보니 한 배미가 없어져서 한참을 찾다 땅에 내려둔 자기 모자를 들어보니 그 아래 한 배미가 숨어 있었다는 옛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 손바닥만 한 땅조차 억척같이 일궈낸 지역민들의 간난신고를 짐작하게 한다. 가축도 드물어 비료를 마련하기 힘들었던 가천마을 주민들은 여수까지 수산물을 지고 가 인분과 맞바꿔 오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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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천마을 암수바위. 왼쪽이 숫바위, 오른쪽이 암바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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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후의 높은 산과 넓게 트인 바다 풍경이 아름다운 가천마을엔 60여가구가 살고 있다. 암수바위와 밥무덤 등 민속신앙의 흔적도 잘 남아있다. 암수바위는 조선 영조대인 1751년 남해현령이 꿈을 꾼 뒤 발견한 높이 4~6m의 기다란 돌덩이 두 개를 말한다.


수미륵으로 불리는 수바위는 남성의 성기를 닮았고, 암미륵인 암바위는 임신해 만삭이 된 여성이 비스듬히 누운 모양새다. 어민들은 지금도 바위를 발견한 날인 음력 10월15일마다 바위 앞에서 제사를 지내며 뱃길 안전과 풍어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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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이 신성히 여기는 밥무덤

제사에 올린 밥을 묻어두는 밥무덤은 마을 중앙과 동·서쪽 세 군데에 있다. 3층 탑 모양의 밥무덤에 밥을 묻을 땐 정갈한 한지에 서너 겹으로 싸고 흙으로 덮어 짐승들이 해치지 못하게 한다. 벼농사가 어려운 남해에서 귀한 쌀밥을 땅에 묻어 바친 건 농사와 고기잡이가 잘돼서 마을을 풍요롭게 해달라는 간절한 염원이었을 것이다.


멋모르고 밥무덤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던 기자는 옆집 할머니에게 “당장 나가라”는 한마디 호통을 들었다. 지금도 주민들은 마을 제사를 돌아가며 모시는데, 당번을 맡은 이는 살생을 금하고 초상집도 가지 않고 심지어 부부관계도 중단할 정도로 몸가짐을 단속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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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이논 한쪽에 하얀 파꽃이 무더기로 올라왔다.

영험한 숲의 기운

물건리 방조어부림(천연기념물 150호)은 물건항 백사장 뒤로 1.5㎞에 걸쳐 활 모양으로 펼쳐진 커다란 숲이다. 약 300년 전 주민들이 조성한 숲은 바닷바람을 견뎌내는 방풍림이자 거친 파도를 막아주는 방조림이었고, 물고기 떼를 불러들인다 해서 어부림(漁付林)이란 이름이 붙었다. 해안가에 나무를 많이 심으면 그늘이 생겨 더위에 지친 물고기들이 모여든다는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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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을 따라 둥글게 이어진 숲은 성벽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다.

작은 담장처럼 심었을 나무들은 이제 높이 20~30m의 고목이 되어 거대한 녹색 성채를 이뤘다. 빽빽이 들어찬 2만여그루가 내뿜는 녹색 기운은 숲에 들어서자마자 머리를 맑게 해준다.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건 포구에 흔한 팽나무와 느티나무다. 어른 두세 명이 안아도 남을 만큼 커다란 밑동엔 마삭줄과 담쟁이 같은 덩굴식물이 초록빛 융단처럼 휘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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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물건리 방조어부림. 폭 30여m로 1.5㎞에 걸쳐 숲이 이어져 있다.

오래오래 푸근하고 넉넉하고 편안한 그늘을 만든다는 푸조나무, 고된 농사일에 쩍쩍 갈라진 촌로의 손발을 연상시키는 말채나무 껍질도 차례로 눈길을 끌었다. 입하(立夏) 무렵 흰 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마치 쌀밥을 고봉으로 담아놓은 것 같다는 이팝나무도 사방으로 큰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물건마을 사람들은 하얀 밥알을 닮은 이팝나무 꽃으로 그해 운을 점친다고 한다. 꽃이 일시에 화려하게 피면 풍년이 들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는 것이다. 올해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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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된 농사일로 쩍쩍 갈라진 촌부의 손발을 연상시키는 말채나무

숲속을 가로지르는 나무데크 산책로는 봄을 알리는 새잎들로 연둣빛 터널을 만들고 있었다. 높다란 우듬지에선 이름 모를 새가 울고 거목 사이로 파란 바다가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방조어부림은 19세기 말에 한 번 벌채된 적이 있다고 한다. 그해 큰 폭풍이 덮쳐 마을에 피해를 입힌 뒤, 숲을 해치면 마을이 망한다는 믿음이 자리 잡았다고 한다. 숲의 나무를 베면 이유를 막론하고 큰 벌금을 매긴다는 약속도 했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숲은 제 모습을 잃지 않았고, 2003년 태풍 매미 때 옆 마을은 바다에 묶어둔 배가 지붕 위로 올라갈 정도로 난리가 났지만 물건리만은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인근 산자락에 위치한 남송가족호텔에 오르면 이 영험한 숲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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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리 주민들은 방조어부림의 이팝나무 고목에 꽃이 수북히 피면 풍년이 든다고 믿는다. 올해는 얼마나 많은 꽃이 하얀 꽃망울을 터뜨릴까.

남해 | 글·사진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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