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풍당당 귀환…둘째가라면 서러울 천재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라
둘째 이모 김다비, 김신영이 소환한 새로운 예능 캐릭터
밑도 끝도 없이 웃길 수 있는 능력만 따지면 비교 대상이 없는 ‘배우’
이모님의 목소리를 빌려 토해내는 ‘세상을 향한 일갈’
막무가내로 몰아치고 단순에 몰입시키는 힘은 변함이 없다
반갑다, 특유의 천연덕스러움으로 간만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니
궁금하다, 다재다능한 ‘천재’가 한국 예능에 어떤 자극을 줄지
딱히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로 시작하겠다. 김신영은 천재다. 혹시라도 동의할 수 없다면, 유튜브에서 쉽게 검색할 수 있는 그의 과거 애드리브 모음 영상을 몇 분만 보면 된다. 바쁜 시간에 각기 다른 메뉴를 시킨 것에 단단히 화가 난 백반집 주인, 예약 시간이 아니니 지금은 때를 밀어줄 수 없다고 손님을 달래는 세신사, 김장 중인 모녀에게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경상도 남자 등 그의 즉흥 연기는 즉흥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대상을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동시에,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할 만큼 빠르게 몰아치는 기세로 그 공간에 있는 모두를 장악한다.
‘가족이라 하지 마이소… 내 가족은 집에 있어요’ 노래에 대한 열정을 접어야 했던 한 많은 45년생 ‘둘째 이모 김다비’의 캐릭터를 쓴 김신영은 할 말 있는 이들을 위한 스피커 역할을 해내며 여성 예능의 새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미디어랩 시소 제공 |
10년 전 TV에서 보고 탄복했던 QTV <여자만세>의 대학 신입생 MT 상황극에서, 그는 우는 친구를 달래는 친구, 시니컬한 친구, 민박집 아저씨까지 1인 3역 연기를 선보였고, 역시 천재적 희극인인 이경실·정선희 같은 선배들조차 그의 연기에 숨을 헐떡이며 깔깔댔다. 방송 칼럼니스트 복길은 책 <아무튼, 예능>에서 “제일 재능 있는 코미디언이 누구냐고 물으면 많은 후보 중에서 주저 없이 김신영을 말할 것”이라 자신하기도 했지만, 한 개인으로서 밑도 끝도 없이 웃길 수 있는 능력만 따지면 그와 비교할 만한 후보군조차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이제는 너무 아무에게나 발급되어 무의미해진 ‘예능 치트키’란 수식은 그래서 오직 김신영에게만 부여되어야 마땅한데, 방송계가 그의 압도적 재능을 일종의 반칙(cheat)으로 규정했다고 가정하지 않고선, 지금껏 그를 중용하지 않은 것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성 방송인 거의 전부에 해당하는 문제이긴 하지만, 만약 김신영이 은퇴하고 방송에 얼굴을 내민 남자 운동선수들의 반만큼만 푸시를 받았다면 지금쯤 넷플릭스엔 그의 이름으로 된 쇼가 세 편 정도 올라왔을 것이다.
그러니 최근 그가 ‘주라 주라’라는 곡을 발매하며 만들어낸 트로트 가수 둘째 이모 김다비 캐릭터는 반가운 동시에, 예상보단 늦게 도래한 미래처럼 보인다. 둘째 이모 김다비에게서 가까이는 유재석의 유산슬을, 조금 멀게는 유세윤의 UV를 떠올릴 수 있고 또한 실제로 유사한 점들도 있지만 김다비의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는 김신영이기 때문이다. 음원 발매 전 소속사 대표인 송은이가 진행하는 <비밀보장>에 전화연결로 등장한 “빠른 45년생” 김다비는 그동안 김신영이 수없이 연기했던 경상도 방언을 쓰는 중년 혹은 그 이상의 여성 캐릭터의 연장선에 있다. 또 다른 진행자 김숙을 “김죽씨”라 부르고 “죽 쑤는 소리 하고 있다”고 핀잔을 주면서 막무가내로 자기 페이스로 몰아치며 청자들을 몰입시키는 힘도 여전하다. 하여 김다비는 유산슬이나 UV의 모방이 아닌 명실공히 ‘김신영표’ 디테일 개그다. 또 다른 디테일 개그의 장인인 강유미와 비교하면 그 차이가 보이는데, 강유미의 경우 모사하고 싶은 대상의 사례들을 귀납적으로 종합한 뒤 그 대상의 어떤 보편적 상을 추상해내고 재현한다면,
김신영은 마치 어디에 실제로 존재하는 독특한 아무개가 그대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듯한 연기를 보여준다. 가령 <비밀보장>에서 노래에 대한 열정을 인정받지 못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말해 뭐해, 아무도 몰라”라고 짧게 치는 연기엔 꿈을 포기하고 살아온 경상도 할머니의 회한이 짧은 상황극 서사 안에 놀라울 정도로 짙게 배어 있다.
김신영이 회사 대표 송은이를 생각하며 만들었다는 ‘주라 주라’의 가사가 둘째 이모 김다비를 통해 발화됐을 때의 시너지는 이 지점에서 만들어진다. 열정적인 CEO가 직원에겐 어떻게 악몽일 수 있는지 다분히 한국적인 디테일 안에서 묘사한 ‘주라 주라’의 가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또 김신영과 송은이의 관계 안에서도 충분히 재밌고 공감 가지만, 한국의 ‘이모님’의 목소리를 빌렸을 때 ‘입 닫고 지갑 한 번 열어주라’라는 가사에 삶의 지혜와 연륜이 수반된다. 즉 해당 곡과 뮤직비디오, 그리고 가끔 MBC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 송은이가 반쯤 가상적으로 수행하는 꼰대 캐릭터에게 더 나이 많은 둘째 이모가 한 수 가르치는 구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설정만으로 이미 하나의 재밌는 이야기가 담긴 이 구도의 확장성은 감히 예측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주라 주라’에서 그러하듯 세상을 향해 또 한 번 일갈하는 두 번째 곡이 나올 수도 있으며, 수장 송은이에게 제동을 거는 콘셉트로 회사 안에서의 관계를 타 프로그램으로 확장하는 것도 가능하다.
상상이지만 가장 기대되는 것은 물론 셀럽파이브와 김다비의 컬래버레이션 과정을 담은 <판벌려> 다음 시즌이다. 앞서 인용한 책에서 복길은 “김신영의 ‘성이 난 아줌마’는 소화가 되기도 전에 식어버린다”며 아쉬움을 표했는데, 김다비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며 이 ‘성이 난 아줌마’는 비로소 상황극의 무명씨가 아닌 하나의 대표성을 띨 수 있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김다비의 등장을 여성 예능의 확장이라는 맥락에서 볼 수밖에 없는 건 그래서다. 송은이와 ‘컨텐츠랩 비보’의 지원으로 셀럽파이브와 김다비 아이디어를 실제로 구현할 수 있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조카 회사 대표에게 ‘가족이라 하지 마이소. 가족 같은 회사. 가족은 집에 있어요’라 말해주는 둘째 이모는 든든하다.
우악스럽고 자기 할 말만 하는 경상도 아주머니라는 스테레오타입은 이제 할 말 있는 이들을 위한 스피커 역할로 전환된다. 여기엔 굳이 권위의 근거가 필요하지 않다. 나이 좀 있는 남성들이 그거 하나로 쉽게 얻었던 말의 무게를, 김신영도 김다비를 빌려 천연덕스럽게 행사한다. 이것이 남성에게만 허용되던 권위를 전유해 반복하는 것일지 아니면 그러한 권위에 대한 풍자적 미러링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동시대 예능 안에서 둘째 이모라는 화자가 김신영 특유의 연기로 위풍당당하게 귀환해(다시 말하지만 그는 여러 장애물 때문에 노래에 대한 열정을 접어야 했던 한 많은 45년생 여성이다) 목에 힘을 준다는 것은 충분히 여성주의적인 전복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다시, 딱히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로 마무리하겠다. 김신영은 과거에도 천재였지만 앞으로 그 천재성으로 할 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 송은이와 김숙의 대활약 이후 이영자, 박나래, 그리고 최근의 장도연 등이 서로의 조력자가 되어 본래 자신들이 있었어야 할 궤도로 오른 것처럼 김신영도 그럴 테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그가 본인의 다재다능함으로 열어갈 예능의 새로운 영역들이다. 지금도 전설로 회자되는 수많은 장면을 만들어냈음에도 그 모든 것이 웃음과 함께 휘발되어 버렸다면, 송은이라는 미더운 제작자의 조력과 김다비라는 성공적 캐릭터의 구현으로 그는 간만에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섰다.
앞서 말했듯 여기엔 이미 상당한 확장성이 내재되어 있으며, 더 무서운 건 그 김다비조차 김신영이 연기할 수 있는 폭의 아주 일부라는 것이다. 과연 그 수많은 캐릭터들은, 그리고 그 캐릭터들의 목소리를 빌려 김신영이 전할 메시지들은 어떤 방식으로 한국 예능에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을까. 아직 알 수 없지만, 당장은 그에게 기회를 지금보다 더 많이 ‘주라 주라’.
위근우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