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톱’ 굴비만 알았는데, 영광의 주인공 또 있네
지극히 味적인 시장(22)
전라남도 영광
요즘 먹는 ‘보리굴비 정식’엔 보리굴비 대신 말린 부세가 올라간다,
참조기 말린 것보다 가격도 좋고 살이 많아 선물용으로도 인기다
영광 읍내서 차로 15분 거리 설도항 어시장에 가면 높이 111m의 칠산타워…
낙조 구경하며 앉은자리에서 ‘순삭’하는 보리새우를 맛볼 수 있다
보리 특구 영광, 특히 ‘찜떡’은 구수한 향에 간식·식사대용으로 딱…
순댓국 타운에선 몰랐던 게 억울할 만큼 맛있는 ‘인생 순댓국’을 만날 수 있다
영광 하면 굴비, 굴비 하면 영광으로 알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가을 영광엔 겉보리에 넣어 말린 굴비 말고도 맛난 제철 먹거리가 지천이다. |
영광을 처음 찾은 건 2000년 무렵이다. 물론 굴비 때문에 갔다. 지금껏 매해 두세 번은 굴비 찾아 영광에 간다. 조기가 칠산바다를 지날 즈음이 봄이다. 잡은 조기는 소금을 치고 해풍에 말린다. 말리는 작업이 얼추 끝나면 조기 파시(波市)와 봄도 끝났다. 여름 시작과 함께 겉보리를 수확했다. 애써 말려 만든 굴비에 고온다습한 여름 날씨로 쉬이 곰팡이가 끼었다. 냉장창고가 흔하지 않던 시절, 겉보리는 굴비의 수분 침투를 막아주는 훌륭한 습기 방지제였다. 말린 굴비를 겉보리에 보관하던 조상들의 지혜였다. 하지만 1980년대 냉장고 보급과 함께 사라졌다. 2000년대 들어 영광에서 보리굴비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부르는 명칭도 보리굴비가 아니라 마른 굴비였다.
사라진 ‘진짜 보리굴비’
요즘 파는 ‘보리굴비’는 대개 중국산 양식 부세(위)를 말린 것이다. 조기(아래)보다 크기가 실하고 값도 저렴해 많이 찾는다. |
요즘 우리가 먹는 보리굴비는 사실 말린 부세다. 조기 말린 것을 굴비라고 한다. 부세 말린 것은 말린 부세여야 하나 근래엔 보리굴비라며 판매한다. 말린 부세는 전량 중국에서 수입한 양식 부세로 만든다. 수산물 중에서 지역 특산물인데도 원산지가 외국인 경우가 꽤 있다. 대표적으로 강원도 인제의 황태는 러시아산이고, 포항 꽁치 과메기는 대만산이다. 커다란 부세 한 마리와 다양한 반찬이 가득한 상차림으로 점심에 특선 보리굴비 정식이 곳곳에서 팔린다. 참조기 말린 것보다 가격도 좋거니와 살이 많아 선물용으로도 인기다. 찬 바람 불기 시작하는 11월부터 부세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차가운 해풍에 석 달 정도 말려야 비로소 말린 부세가 된다. 소금을 치고 내장은 빼지 않고 말린다. 날이 따듯하면 쉬이 찌든 냄새가 나기에 겨울 초입부터 말리기 시작한다. 반면 굴비는 사시사철 겨우 반나절 정도 물기만 뺀다. 수분 잠깐 털어낸 조기로 사실 이름만 굴비다. 냉동고에 보관 판매하는 굴비(사실 탈수조기가 맞다)는 예전에는 수분 함량이 15%까지 되도록 말렸다. 석 달 말리는 부세가 오히려 옛날 굴비 만드는 방식에 가깝다.
굴비가 탈수조기가 된 사연이 있다. 굴비 본연의 맛은 조기에 소금과 시간을 더해 만드는 숙성에 있다. 참조기가 바다에서 사라지니 굴비가 비싸졌다. 비싼 식품이라 자가 소비보다는 명절 선물용으로 주로 팔렸다. 맛보다는 크기와 무게만 중시했다. 시간이 지나자 모양 바르고 무게가 많이 나가는 굴비가 명품이 됐다. 원래 굴비의 장점인 ‘숙성의 맛’ 따위는 무시했다. 한 마리에 10만원 하는 굴비는 사실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었다. 오래 말리면 수분이 빠지면서 무게와 크기가 줄었다. 오래 말릴수록 손해가 나기에 더는 예전처럼 오래 말리고 겉보리에 보관하지 않았다. 굴비를 보리에 보관한 지혜는 사라지고 굴비 포장에 보리 알갱이가 장식품처럼 돌아다니는 허세만 남았다.
가을 어시장 주인공 ‘보리새우’
가을 끄트머리에 바다에서 건지는 ‘보리새우’도 영광의 먹거리에서 빠지면 안될 듯싶다. 연재 제목이 ‘지극히 미적인 시장’이지만, 사실 영광은 시장 이야기 할 게 별로 없다. 상설시장과 오일장도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다. 고추특화시장에서 열리던 장을 버스터미널 옆 상설시장으로 옮긴 후부터 시나브로 장의 열기가 사라졌다고 한다. 장이 서는 2·7일에 고추특화시장과 상설시장 두 군데에서 장이 서지만 규모가 작다. 영광읍내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횟감과 젓갈, 반찬거리를 파는 설도항 어시장이 있다. 규모는 작지만 호젓한 바닷가를 바라보면서 간단하게 식사도 할 수 있고 높이 111m의 칠산타워가 있어 낙조도 구경할 수 있다. 큰 바구니와 수조에 있는 싱싱한 횟감보다는 바구니에 대하와 함께 섞여 있는 보리새우에 눈이 갔다. 만물에 단맛이 깃드는 가을날, 대하 찜쪄먹는 보리새우에 눈이 가는 것은 당연지사. 쏠리는 내 눈길을 눈치챘는지 흥정이 들어왔다. “산 건 1㎏ 7만원, 죽은 건 3만5000원.” ㎏당 2만~3만원 하는 양식 흰다리새우에 비해 비싸지 않았다. 물론 구워 먹을 생각이라서 죽은 보리새우를 택했다. 이때를 놓치면 제철 음식의 다음은 내년이다. 잠시 후 붉은빛을 띠는 새우가 나왔다. 살아 있을 때 다른 무늬의 보리새우도 익으니 붉은빛 띠는 것은 대하나 흰다리새우와 같았다. 아미노산 중에서 단맛이 나는 글리신(Glycine)의 함량이 가을에 가장 높아진다고 한다. 새우살 씹을 때마다 나는 은은한 단맛이 사람을 홀렸다. 저거 언제 다 먹지 했는데 열댓 마리를 ‘순삭’했다. 설도항 성진호(010-9255-9541)
관광객이 영광에서 많이 먹는 음식은 굴비 정식이다. 잘 구운 굴비와 온갖 반찬으로 차려낸 상차림은 매력적이다. 법성포는 굴비 상점 건너 굴비 정식 파는 곳이 하나씩 있을 정도로 식당이 많다. 영광에 매년 가지만 굴비 정식은 처음 갔을 때 빼고는 먹지 않았다. 오히려 고창이나 함평으로 가서 다른 메뉴를 먹었다. 가끔 영광에서 식사하면 굴비보다는 철에 맞는 생선찜을 먹었다. 육지는 가을이어도 바다는 그보다 계절이 늦어 여름과 가을 사이였기에 병어찜을 선택했다. 꾸덕꾸덕 말린 장어찜도 유혹했지만 병어의 보드라운 살맛이 더 당겼다. 동네 사람들 가는 식당이라 깔리는 찬은 여느 백반집과 비슷했다. 다만 가운데 놓인 병어찜의 자태가 예사롭지 않았다. 찬은 대충 깔렸지만 병어찜만큼은 제대로였다. 병어에 살이 실했다. 차려진 반찬이 무색하게 수저는 밥과 병어찜 사이만 오갔다. 시원한 물 한 잔으로 식사를 끝내니 ‘참 잘 먹었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드림정(061-356-2504)
가을이면 단맛이 깃드는 보리새우뿐만 아니라 밥, 국수, 빵, 술로도 변신하는 구수한 보리도 영광의 맛을 더한다. (위부터 차례대로) 보리새우, 순댓국, 병어찜, 보리밥, 모싯잎송편, 보리찜떡. |
전국 최고의 순댓국밥
영광은 보리특구다. 수확한 보리로 빵, 국수, 면을 만든다. 물론 보리밥집도 꽤 있거니와 보리로 술 만드는 곳도 있다. 보리는 밥 짓기 까다로운 곡식으로 알고 있다. 다 옛날 지식이다. 예전 보리는 잘 익지 않기에 밥하기가 쉽지 않았다. 밥하기 편하게 보리를 먼저 찌고 난 뒤 자르고(할맥), 누르고(압맥) 해서 팔았다. 지금은 그런 보리를 잘 팔지 않는다. 보리 품종이 밥 짓기 편하도록 개량됐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냥 쌀과 함께 밥을 하면 된다. 영광에서 나는 보리 품종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강호청, 자수정, 누리찰 등이 대표 보리다. 강호청은 푸른빛을, 자수정은 붉은빛을 띤다. 보리 특유의 톡톡 터지는 질감이 맛있다. 굳이 보리밥 전문점을 가지 않아도 집에서 편하게 보리밥을 먹을 수 있다. 보리특구에서 파는 가공품 중 간식거리로는 보리빵과 찰보리찜떡이 있다. 보리빵 파는 곳은 전국에 많지만 찜떡은 영광에만 있다. 찰보리 가루, 모싯잎 가루를 막걸리로 반죽했다. 빵과 떡의 중간 정도의 식감이다. 반죽할 때 달걀을 넣어 카스텔라의 풍미가 난다고 하는데 고급 버전의 술빵이다. 보리의 구수한 향이 좋아 간식으로도 좋지만 식사 대용으로 더 좋다. 보리울 판매장(061-351-5250)
영광 버스터미널 옆에 순댓국타운이 있다. 순댓국 전문 식당들이지만 순댓국만 파는 게 아니다. 회도 팔고 가오리찜도 파는 선술집 메뉴 구성이다. 메뉴만 보고는 그냥 동네 순댓국집인가 싶어 나갈까 하다가 순댓국 손님이 아침치고는 많은 걸 보고 궁금함에 주저앉았다. 순댓국의 핵심은 머릿고기인지라 머릿고기국밥을 주문했다. 윤기가 살아 있는 밥을 보니 일단 안심이 됐다. 밥이 좋은 곳은 지금까지 경험으로 국도 훌륭했다. 팔팔 끓이지 않고 적당한 온도로 나온 뚝배기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다. 국물을 맛보자 마음에 쏙 들었고, 머릿고기까지 먹자 흠뻑 빠져버렸다. 지금까지 다니면서 먹었던 전국의 순댓국집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 영광에서 순댓국 먹기 전까지 가장 좋아했던 곳은 광주 양동시장 국밥이었다. 첫 수저에 내 마음대로의 순위가 바뀌었다. 고기는 고소하고 국물은 깔끔했다. 20년 가까이 영광을 다니면서 여기를 모르고 다녔다는 게 억울했다. 식사하고 법성포의 지인을 만나 이야기하니 “몰랐어요? 우리도 순댓국 먹으러 그리로 가는데.” 20년 동안 미운 적이 없던 사람이지만 그날은 미웠다. 영진이네(061-352-1664)
영광에 볼 것 없다고?
2000년 초반까지 영광에서 모싯잎송편을 먹은 기억이 없는데, 요즘은 굴비 다음 가는 영광의 대표 먹거리다. 누군가 모시 잎으로 개떡을 만들었고, 이어서 큼직한 송편까지 만들었다. 영광매일시장 주차장 인근에 있는 송현떡집이 영광 모싯잎송편의 시작점이다. 영광 지역신문의 기사도 있거니와 영광 지인의 이야기도 어릴 때부터 그 집에서 송편을 사다 먹었다고 한다. 한입에 쏙 넣기 좋은 일반 송편과 달리 모싯잎송편은 큼지막하다. 깨로 만든 것도 있지만 모싯잎송편은 동부콩이 들어간 것이 더 맛있다. 구수한 모시 잎과 고소한 동부콩의 궁합이 제법 괜찮다. 모싯잎송편은 지역에서 나는 재료로 만든다. 모자란 동부콩은 일부 수입한 것으로 대체하기도 한다. 떡집이야 동네마다 있지만 동네를 대표하는 떡을 가진 곳은 많지 않다. 원조집이 아니더라도, 법성포의 큰 떡집들이 아니더라도, 아침에 시장에 가면 막 나온 송편이 있다. 5개 2000원에 한 봉지 사서 입에 집어넣으면 떡 크기만큼 눈도 커진다. 맛있다. 집에 두고 먹을 생각이면 막 해서 나온 것보다는 냉동한 것을 사야 한다. 급랭한 떡을 해동하면 막 나온 떡 같지는 않더라도 집에서 냉동한 것보다는 훨씬 식감이 살아 있다. 송현떡집(061-351-5111)
“볼 것 없는디. 예전 같지도 않고.” 영광으로 오일장 취재 간다고 하니 지인이 바로 내뱉은 말이다. 그래도 군 단위 오일장은 아무리 없어도 기본은 하는지라 내려갔다. 지인의 말 그대로 볼 것이 별로 없었다. 시장이 나뉘었다는 것보다는 도로가 발달하면서 인접한 광주 오가기가 수월한 이유가 더 크지 않을까 싶다. 볼 거 없지만 아침나절 맛있는 떡이 나오는 시장이 있고, 그 옆에는 맛있는 순댓국 가게가 여럿 있고, 10여분 차를 몰고 가면 맛있는 수산물을 저렴하게 먹을 수 있다. 영광 간다고 꼭 굴비 정식 먹을 필요는 없다. 굴비 말고도 먹을 게 많은 곳이 영광이다.
필자 김진영 식품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