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이 만든 주상절리 틈새로 세찬 물줄기 ‘불과 물의 합작품’
경기도 포천 ‘비둘기낭폭포’
절벽 틈 산비둘기 사는 계곡, 드라마 ‘선덕여왕’ ‘추노’ 배경
석회 녹아 영롱한 초록 물빛, 장마철엔 풍부한 수량으로, 겨울이면 역고드름으로 장관
한탄강 주상절리길 따라 산책, 바람에 흔들리는 하늘다리, 중간중간에 유리바닥 ‘아찔’
‘화적연’ 볏짚 쌓은 형상의 바위, 1억년 전 마그마 식은 화강암, 모두 시간이 빚은 예술품이다
천연기념물 하면 멸종위기의 새나 물고기, 곤충이 먼저 떠오른다. 죽을 때까지 내 눈으로 직접 보는 일은 왠지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가까이서 실컷 볼 수 있는 천연기념물도 있다. 게다가 전체 천연기념물 중 약 10%는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있다. 가족과 함께 나들이 삼아 찾아나서기 좋은 천연기념물로 경기도 포천의 비둘기낭폭포를 골랐다. 한탄강 자락을 낀 포천엔 현무암 주상절리(용암이 급격히 굳으며 생성된 다각형 기둥 모양의 현무암)가 절경을 이룬 멍우리 협곡과 화적연 등 명승도 여러 곳이다. 지난해 구리~포천 고속도로가 개통하며 서울에서 1시간이면 닿을 정도로 접근성도 좋아졌다.
동네 사람들도 잘 몰랐던 ‘숨은 명소’
17m에 이르는 폭포가 떨어지며 일으킨 하얀 포말은 에메랄드빛 소로 사라진다. 비둘기낭폭포는 2012년 천연기념물 537호로 지정됐다. 김형규 기자 |
원래 비둘기낭폭포는 변변한 안내판 하나 없어 지리를 잘 아는 동네 사람 아니면 찾아가기도 힘든 숨은 명소였다. 10여년 전부터 <선덕여왕> <추노> <최종병기 활> 등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그 비경이 소개되며 인기를 끌었다. 우렁찬 폭포소리와 에메랄드빛 소(沼)가 어울린 풍경은 감탄을 자아내지만, 여름철이면 행락객들이 고기 굽는 연기가 계곡에 자욱할 정도로 무질서한 곳이기도 했다. 201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537호)되면서 나무데크 진입로가 깔리고 출입통제구역을 만드는 등 체계적인 보존과 관리가 시작됐다.
비둘기낭은 폭포가 형성된 절벽 틈바구니에 산비둘기가 살고, 그 아래 하식동굴(하천이 돌을 깎아내 형성된 동굴)이 주머니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주머니 낭(囊)이 아니라 낭떠러지 지형이라 비둘기낭이 됐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폭포 입구는 경사가 급하다. 나무가 우거진 진입로 시작점에선 폭포가 보이지도 않는데 물 떨어지는 소리가 벌써 요란했다. 눈이 아니라 귀부터 시원해진다고 해야 할까.
높이가 17m에 이르는 폭포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물줄기를 뿜어댔다. 방문 직전 며칠간 비가 많이 내린 덕분이었다. 폭포 주변은 물이 잘 빠지는 현무암 지형이라 비가 와도 오래 물을 담고 있지 못한다. 비둘기낭폭포는 그래서 예전부터 여름 장마철에 손꼽히는 여행지였다. 물빛이 영롱한 초록색을 띠는 건 석회 성분 때문이다. 물가 바위에 걸터앉아 가만히 폭포가 만들어내는 소리와 색에 집중하다보면 묘하게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 좀처럼 일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폭포 옆 동굴 천장의 주상절리는 조각품처럼 아름다웠다. 돌 틈으로 물이 줄줄 떨어지는 곳도 있었다. 겨울이면 그렇게 동굴 안에 역고드름이 만들어지며 장관을 이룬다 했다.
“폭포 옆 현무암 절벽을 자세히 보면 결이 다른 세 겹의 지층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동행한 국립문화재연구소 공달용 학예연구관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니 과연 그랬다. 현무암 하면 제주도에서 보던 것처럼 검은색에 작은 구멍이 많이 뚫린 모습을 흔히 떠올리지만 모든 현무암이 그렇진 않다. 용암의 겉과 속 부분에서 생성된 것의 모양과 색이 각각 다르고, 용암의 냉각 속도에 따라서도 가스가 빠져나가며 생기는 구멍의 개수가 다르다. 비둘기낭폭포에 보이는 세 겹의 현무암층은 이 지역에 여러 차례 용암이 반복적으로 흐르며 대지가 형성됐다는 걸 보여주는 지질학적 증거다. 폭포 외에도 한탄강 줄기를 따라 100㎞가 넘는 현무암 지대에는 50만년 전부터 휴전선 이북 평강군 일대의 화산이 폭발하며 최소 열 차례 이상 용암이 흐른 자취가 곳곳에 남아있다. 지질학자들이 이 일대 지형을 ‘물과 불의 합작품’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굽이굽이 주상절리길
겸재 정선이 그린 화적연. 간송미술관 소장 |
비둘기낭을 찾은 관광객은 지난해 18만명에서 올해 들어 8월까지만 38만명으로 크게 늘었다. 바로 앞에 포천시가 운영하는 캠핑장이 생기고 도로와 주차장 등 주변 인프라가 대폭 개선된 덕분이다. 폭포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지난 5월 개장한 한탄강 하늘다리도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포인트다. 강바닥에서 50m 높이에 세워진 다리는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중간중간 바닥을 유리로 만들어 더 아찔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비둘기낭폭포를 기점으로 하는 한탄강 주상절리길은 1시간 내외로 가볍게 산책하기 좋다. 현재 4코스까지 개통했는데, 3코스 벼룻길이 가장 경치가 좋다. 명승으로 지정된 멍우리 협곡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벼룻길의 벼루는 벼랑을 뜻한다. 그 말처럼 평균 높이가 20~30m 되는 멍우리 협곡의 주상절리는 무려 4㎞에 걸쳐 한탄강변 양쪽에 펼쳐져 있다. 현무암 주상절리가 해안가가 아닌 내륙 하천에 이처럼 광범위하게 분포하는 것은 국내에서 한탄강이 유일하다.
멍우리 협곡의 주상절리를 잘 관찰할 수 있는 장소가 두 곳 있다. 먼저 한탄강과 그 지류인 부소천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부소천교다. 조그만 다리 위에 서면 우거진 나무와 담쟁이덩굴 사이로 몸을 가린 기암괴석이 반긴다. 부소천 물줄기는 약 10㎞ 떨어진 산정호수까지 연결된다. 지금은 대형 리조트와 펜션, 음식점이 밀집한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산정호수는 원래 일제강점기에 농작물 생산과 수탈을 가속화하기 위해 만든 농업용 저수지였다. 부소천교에서 한탄강 하류 쪽으로 2㎞ 정도 내려가면 멍우리 협곡 캠핑장이 나온다. 캠핑장을 지나 숲길을 5분쯤 걸으면 전망대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보는 주상절리는 U자형의 강을 끼고 양쪽으로 펼쳐진 모습이 장관이다.
경기도와 강원도는 한탄강 일대를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받기 위해 다음달 최종 서류를 제출할 계획이다. 포천시청 최동원 학예연구사는 “세계지질공원으로 선정되면 4년마다 재인증을 받는데, 남북관계 진전에 따라 향후 북한과도 협의해 북측에 있는 한탄강 화산지형도 포함시킬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남북에 걸친 한탄강 유역은 지질학적 가치에 평화의 상징성까지 더해질 것이다.
화적연은 연못 위에 솟은 바위가 볏짚단을 쌓아올린 모양이라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김형규 기자 |
멍우리 협곡에서 가까운 화적연은 조선시대부터 이름을 날린 명승이다. 화적연은 벼 화(禾), 쌓을 적(積), 연못 연(淵)자를 쓴다. 연못 위에 우뚝 솟은 바위가 꼭 볏짚단을 쌓아올린 모습이라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농경사회다운 발상이다. 조선 숙종 이후 화적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많다. 다른 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도 계속 날이 가물면 마지막에 오는 곳이 화적연이었다. 볏가리를 닮은 돌덩이 앞에서 정성껏 제를 올렸을 선조들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지 상상이 간다.
바위를 중심으로 왼쪽 강 상류에서 흐르는 물은 콸콸 소리를 내며 달음질치다 바위 앞에 이르러선 고요한 호수처럼 물살이 약해진다. 강폭이 갑자기 넓어지고 수심이 깊어지면서 물의 흐름이 급변한다. 모래사장에 앉아 짙은 녹색으로 빛나는 물길이 서로 엇갈리며 소용돌이 치는 모습을 보면 절로 시 한 수 읊고 싶어진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절경 앞에서 많은 문인·화가들이 시화를 남겼다. 대부분은 금강산으로 유람을 가는 길에 ‘영평(포천의 옛 지명) 8경’을 구경하러 들른 것이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도 화적연의 수려한 산수를 화폭에 담았다. 겸재의 스승인 김창흡과 평생지기 이병연은 각각 화적연을 다룬 시를 남겼다. 두 사람의 시는 공통적으로 ‘검은 물빛’을 언급한다. 깊은 수심이 만들어낸 짙은 물색은 지금도 시구 그대로다.
화적연은 약 1억년 전, 그러니까 중생대 백악기에 지하 5㎞ 깊이에서 마그마가 식어 생성된 화강암이다. “저 깊은 땅속에서 1년에 0.05㎜씩 서서히 융기해 솟아오른 뒤 비바람에 깎이는 풍화작용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변하기까지 그야말로 억겁의 시간이 걸린 셈이죠.” 이광춘 상지대 명예교수(전 문화재위원)의 설명을 듣자 눈앞의 경치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문득 비둘기낭폭포에서 시작한 한탄강 여행을 요약한 한 문장이 떠올랐다. 시간이 빚어낸 예술품을 감상하는 길.
포천 |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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