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소환된 ‘영원한 꺼거’ 장국영
영화 <아비정전> 스틸컷. |
4월 1일 만우절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땅에 딱 한 번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영화 <아비정전> 속 대사처럼 발 없는 새가 되어 떠난 사람, “마음이 피곤해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 거짓말처럼 간 사람. 홍콩의 배우이자 가수 장국영이 떠난 지 17년이 됐다. 올해도 그는 팬들의 마음뿐 아니라 문화계에 소환됐다.
그 시절 그와의 재회
“중국의 대표적인 5세대 감독 중 한 사람인 천카이거가 연출한 <패왕별희>는 올 칸영화제 대상 수상작. 중국경극단 소속 배우인 2명의 남자와 윤락녀 출신 여자 사이의 미묘한 삼각관계를 축으로 중일전쟁, 공산당·국민당의 투쟁, 문화혁명으로 이어지는 중국 현대사의 흐름을 보여준다. 격동하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부침을 거듭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설득력 있게 그려지고 있다는 평이다.” 1993년 12월 연말 극장가 소식을 다루는 <경향신문> 기사는 이렇게 전한다.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포스터 |
장국영의 대표작 <패왕별희>는 4월 1일 17주기에 맞춰 재개봉할 예정이었다. 1993년 크리스마스이브에 개봉한 지 27년 만이다. 2017년 재개봉하려다 특별상영에 그친 만큼 영화팬들에겐 반가운 소식이었다. 아쉽게도 코로나19의 여파로 개봉은 5월로 연기됐다. 아날로그 필름이 디지털 포맷으로 전환되는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으로 영상은 더 선명해졌다. 156분짜리 극장판에 15분을 추가해 171분으로 늘어났다. 두지(장국영 분)와 시투(장풍의 분)의 우정을 보여주는 장면이 더해졌다고 한다. 재개봉판에는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난 2월 코로나19로 인해 일찍 막을 내린 뮤지컬 <영웅본색>도 장국영을 추억하게 했다. <분향미래일자>·<당년정> 등 그가 부른 OST가 뮤지컬 넘버로 재탄생했다. 몇 해 전부터 지속된 재개봉 바람과 뉴트로 열풍은 장국영의 작품에 숨을 불어넣고 있다.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을 배급하는 조이앤시네마 관계자는 “홍콩영화 호황기, 장국영이 명작에 많이 나왔고 ‘멋진 남자’보다는 특색 있는 역할을 많이 했다. 이른 나이에 삶을 마감하며 대중에게는 ‘전설’이 됐다”면서 “재개봉이 기존 관객들의 추억을 소환하고, 새로운 관객들에게는 명작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에는 자신을 장국영이라고 주장하는 귀신이 나온다. |
3월 5일 개봉한 독립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도 반가운 캐릭터가 등장한다. 자신을 ‘장국영’이라고 주장하는 귀신(김영민 분)이다. 전직 영화 프로듀서 찬실(강말금 분)에게 한 남자가 나타난다. 한겨울에 흰 러닝만 입은 남자는 본인을 ‘장국영’이라 소개한다. 그러고는 오후 3시 매표소에서 자신을 기다린다는 여자를 만나러 간단다. <아비정전> 속 아비와 똑 닮은 모습이다. 찬실의 눈에만 보이는 의문의 사내는 일도, 사랑도 잘 안 풀리는 찬실에게 초심을 깨닫게 해준다. 영화는 극장가 침체기에도 2만 관객을 돌파하며 소소한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배우 김영민은 언론 인터뷰에서 장국영에 대해 “용기 있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홍콩 반환 시기라 작품 선택에 제약이 있었을 텐데 <해피투게더> 속 동성애자 연기를 선택하고 몰입했다는 것부터 시대를 함께하는 배우가 아닐까 싶다. 그런 장국영 역을 연기할 수 있어 굉장히 영광이었다”고 말했다.
‘꺼거’는 영원히
팬들의 ‘꺼거(哥哥, 장국영의 애칭. 형·오빠라는 뜻)’ 사랑도 현재 진행형이다. 장지희씨는 브런치에 <나의 레슬리>를 연재하는 작가다. ‘레슬리’는 장국영의 영어 이름이다. 그에 대한 기억은 초등학생이었던 1989년으로 거슬러 간다. 비디오대여점에서 <영웅본색 1>을 빌리기가 너무 어려워 딴 동네까지 가서 <영웅본색 2>를 구해봤다. 아걸 역의 장국영이 댄스 경연장에서 여성의 구두를 흔드는 장면에서 반해버렸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부인에게 갓 태어난 딸의 소식을 들으며 죽어가는 장면에선 엉엉 울었다. 이튿날 장국영의 사진이 인쇄된 책받침을 샀다. ‘덕질’의 시작이었다.
1998년 6워 영화 <해피투게더> 홍보차 방한해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왼쪽). 1989년 9월 내한 당시 호텔 숙소에서 촬영한 사진. 경향신문 자료사진 |
소녀팬은 자연스레 중국음악을 좋아하게 됐다. 21살이던 1998년 중국음악을 소개하는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진행했다. 이듬해 장국영이 영화 <성월동화> 홍보차 한국을 찾았다. 홍보담당자를 집요하게 설득한 끝에 인터뷰 기회를 얻었다. 요즘 말로 ‘성덕(성공한 덕후)’이었다. 장씨는 장국영에게 자신을 ‘모니카(Monica)’라고 소개했다. 장국영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너, 내 팬이구나?” <모니카>는 1984년 발표한 장국영의 대표곡 중 하나다.
“‘아티스트’라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어요. 세간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도를 쉬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에서는 1980~199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굉장히 아이코닉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응답하라 1994>에서 삼천포가 장국영 닮은 역할로 나오고, 영화에선 장국영이라고 우기는 귀신이 나오고, 저처럼 장국영을 가지고 글을 쓰는 사람들도 나오고…. 그때의 장국영을 좋아했던 사람들이 나이를 먹어서 문화를 만들어내는 세대가 되다보니 자꾸 반추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국내 팬클럽도 건재하다. 1999년 개설된 다음 카페 ‘장국영사랑’은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4월 1일 기일, 9월 12일 생일이면 크고 작은 행사를 연다.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100여 명의 팬이 모인다. 장국영의 영화가 TV에 나오거나 재개봉할 때면 ‘늦게 입덕했다’며 팬카페에 가입하는 20~30대도 많다고 한다. 지난 3월 말 1988년작 <살지연>을 함께 보는 영상회를 기획했지만 코로나19 때문에 한 달 미뤘다. 한국에서 개봉되지 않은 작품들은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대사를 번역하고 자막을 입힐 정도로 열성적이라고 한다.
1995년 11월 30일 음반 홍보차 한국을 찾은 장국영이 팬사인회에 참석한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
임국화씨(55)는 ‘장국영사랑’을 만든 22년차 카페지기다. 1998년 <해피투게더>를 보고 장국영에 빠졌다. <영웅본색>이나 <천녀유혼>을 보고 팬이 된 이들보단 한 템포 늦었지만 ‘팬심’은 누구보다 깊었다. “일단 너무 잘생겼잖아요(웃음). 연기자로서, 가수로서 연기도 노래도 잘하고 항상 맡은 배역과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이 좋았어요. 스태프들이나 주변 사람들도 그가 기본적으로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고 이야기했고요. 인간적인 모습에 반하게 된 것 같아요.”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공생의 덕목을 일깨워준 배우”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연기를 잘한다고 하면 홀로 압도적 연기를 잘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장국영은 어떻게 주변과 잘 어울리는가, 자기도 살지만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새로운 연기의 패턴을 보여준 특별한 배우였다”고 말했다. 전 평론가는 “장국영은 시대의 무게 중심이 여성성으로 가는 상황에서 마초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이미지의 선구자적 존재였다. 그가 맡은 캐릭터의 애틋함이 맞물리며 진정성 있는 팬들을 많이 확보하게 됐다”며 “진정한 팬들의 바탕에는 ‘생명력’이 있기에 세월과 함께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