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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이 넘어도 계속되는 '김밥 할머니'의 나누는 삶

지난 3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의 손을 잡고 청와대 복도를 지나 ‘기부·나눔단체 초청 행사장’에 들어서며 박춘자 할머니(92)는 젊은 날 돌아가신 홀아버지를 생각했다. 평생 모은 재산 6억3000여만원을 기부한 그를 향해 기자들의 플래시가 갈채 소리처럼 터졌고 박 할머니는 행사 내내 울었다.


“나는 여기 와서 청와대 구경도 하는데…”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박씨가 두 살 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 생각에 환담장에 앉아서도 굽은 어깨를 내내 출렁였다.


경향신문

박춘자 할머니가 지난달 23일 경기 성남시 한 복지시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중력은 벗기 힘겨웠고 삶은 줄곧 신산했다. 김밥부터 홍합탕, 다방, 소라탕까지 안 해본 장사가 없다. 쓰는 돈 없이 일만 하니 돈이 모이긴 했다. 달동네였던 경기 성남시 구시가지에 마련한 집의 가격이 올라 목돈을 만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재산을 자신보다 낮은 곳에 베풀었다. 지금도 새 옷 대신 헌 옷을 산다. 욕심을 모르고 그저 “나누면 기분이 좋다”고 말한다. 지난 23일 성남시의 한 복지시설에서 평생 모은 재산 6억3000여만원을 기부한 박춘자 할머니(92)를 만났다. 이 집도 박 할머니가 기부한 집이다.

'김밥 꼬맹이’에서 ‘기부 천사’로, 92년 나눔의 역사

1929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박 할머니에게 어린 날은 “생각만 해도 자꾸 눈물이 나는” 시절이다. 두 살배기 박 할머니를 어머니 없이 돌보느라 아버지는 생업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약 살 돈이 없어 된장을 발랐다. 어린 박 할머니는 따가워서 울고, 아버지도 따라서 울었다.


서러운 가난은 악착을 남겼다. 열 살 무렵부터 온갖 장사를 했다. 돈을 모아야 했다. 오전 11시40분, 경성역(현 서울역)에 열차가 들어오는 시간이면 늘어선 승객들에게 김밥을 팔았다. 불법 장사를 막으려고 순찰을 도는 일본 순사들을 피해 외투 안에 엉성하게 만 김밥을 숨긴 채 “아줌마 김밥 사세요”라고 속삭이며 팔았다.


곡절 끝에 결혼을 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했다. 성남시 중앙시장 인근에 다방을 열었지만 사업이 어려워져 접었다. 시장에서 멀지 않은 곳엔 당시 한창 인기를 끌던 유원지 남한산성이 있었다. 옷가지를 다 뒤져 마련한 차비로 서울에 가 친구에게 돈을 빌렸다. 남한산 중턱 버려진 움막에 자리를 잡고 어릴 적 팔던 김밥을 다시 팔았다. 시장에서 산 홍합과 소라도 지고 올라와 탕을 끓이고, 도토리를 주워 묵을 했다. 은행 갈 시간도 없어 걸레에 돈을 싸두면 누구도 훔쳐가지 않았다.


추파를 던지는 남성들에게 욕바가지를 해 가며 버틴 10년. 돈이 꽤 모였다. 집과 가게를 마련했고, 땅값이 올라 큰돈을 만졌지만 허투루 쓰지 않았다. “내가 힘들어서 울기도 하고 참 고생 무진장하며 살았는데, 돈? 돈이 많아도 내가 쓰면 안 돼. 내가 돈 없어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불쌍한 사람 줘야지.” 부러진 다리에 된장을 바르던 시절부터 “커서 돈을 벌면 나처럼 불쌍한 사람에게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리를 다친 이에게 기부금을 전하는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TV 광고를 우연히 본 건 30여년 전이었다. “어머, 저기다 싶었지. 나는 그런(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는데 세상이 바뀌었구나 했어.” 장사해 번 돈과 집을 팔아 받은 3억3000만원을 쾌척했다.


경향신문

박춘자 할머니는 문재인 대통령 부부의 초청으로 3일 청와대에서 열린 ‘2021 기부·나눔단체 초청행사’에 참석했다. 연합뉴스

‘울지 마, 우리 집에 가자’ 11명의 엄마가 되다

‘남한산성 김밥 할머니’로 불리는 박 할머니는 11명 장애인의 ‘엄마’이기도 하다. 40여년 전 다니던 성당 신부가 거리에 버려진 발달장애인 아이들을 데려왔다. 좁은 방을 하나 빌려 살던 아이들은 마구 울었다. 그나마도 곧 비워줘야 하는 방이었다. 상가를 사서 형편이 풀렸던 박 할머니는 “울지 마, 걱정 마라. 우리 집에 가자”며 아이들을 데려왔다. 3억원을 들여 집을 마련하고 생활비를 댔다. 정부의 보조금이 나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정부 지원금도 나오지만 박 할머니는 그때 만난 장애인 11명 중 4명을 여전히 돌본다. 변을 본 옷을 직접 빨고, 요리부터 보약까지 해 먹이다 보니 가족이 됐다. 고령인 지금은 직접 궂은일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이들과 함께 지내는 세월은 현재진행형이다. “애들이 많이 똑똑해졌지. 그 전에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옷도 없고….”


박 할머니의 나누는 삶은 아흔을 넘긴 지금도 계속된다. 지난 9월 LG복지재단으로부터 받은 의인상 상금 5000만원도 이곳저곳에 모두 기부했다. 지난 5월에는 살고 있던 집의 보증금 일부인 2000만원을 기부하고 시설로 거처를 옮겼다. 내 손에 남는 것 없이 그저 나누는 일에 그는 별다른 이유나 거창한 철학을 붙이지 않는다. “나는 돈을 두고는 못 살아” “(첫 기부 때) 말도 못하게 좋았지” “나눠주면 좋아, 기분이 좋아” 정도가 그의 소감이다.


데려올 때만 해도 울고 보채기만 하던 아들은 어느덧 중년의 나이로 성장했다. 밖에 나갔다가 그룹홈에 돌아오면 2층에 올라가 2000년대 댄스 음악을 틀어놓고 런닝머신에서 운동을 한다. 그전에 1층 거실에 앉은 박 할머니에게 “엄마”라며 뽀뽀를 하고 껴안는다. “(그럴 때면) 아이고 좋아 죽어.” 박 할머니가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시간이다.


조해람 기자 lennon@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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