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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석희 “폭로 뒤 고통 컸지만 후회 없어…이제, 당당히 나아갈 거예요”

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스포츠계 폭력·성폭력 고발한 심석희 선수

경향신문

지난 23일 경향신문 인터뷰실에서 심석희 선수가 그간의 심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조재범 전 국가대표 쇼트트랙 코치로부터 고교 2학년 때부터 3년4개월간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는 내용의 고소장을 2018년 12월 제출한 그는 “이제는 당당하게 세상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조재범 전 코치 성범죄’ 고소 1년

깊은 내상 입은 만큼 단단해진 그

2022년 베이징 올림픽 ‘금빛 꿈’


“피해자로서의 저의 존재를 오랫동안 부정해왔어요. 말하지 않으면 없었던 일이 될 거라고 믿고 싶었던 거죠. 하지만 벼랑 끝에 선 심정이었어요. 숨고 숨고 숨다가 결국 벼랑 끝까지 몰려서 떨어져 죽게 생긴…. 말하지 않고 혼자 품고 죽는다면 후회하지 않을까, 많이 생각했어요. 살려달라고 소리친 거예요.”


지난 23일 만난 심석희 선수(23·쇼트트랙·사진)는 느린 말투에 작은 목소리이지만 또렷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답변은 신중했다. 입술을 앙다물거나 자주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내상이 깊어 보였지만 그만큼 단단해진 듯했다. 그가 언론과 심층 인터뷰를 하면서 심경을 밝힌 것은 조재범 전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는 고소장을 경찰에 제출한 날로부터 꼭 1년 만이다.


고소장에 따르면 심 선수는 고교 2학년 때인 2014년 8월부터 3년4개월간 조 전 코치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심 선수는 피해를 입고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운동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조 전 코치는) 피해 사실을 발설하면 선수생활은 물론 가족의 삶까지 지장을 받을 거라고 어렸을 때부터 협박했다”고 말했다.


심 선수가 성폭력 피해에 대해 가장 먼저 고백한 대상은 아버지였다. 심 선수는 “식탁 너머 아버지는 한동안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아버지가 변호사에게 연락하셨다”고 말했다. 심 선수는 “제 일을 겪고 스트레스로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아버지는 최근 담낭 제거 수술을 받으셨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더 당당하게 세상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며 씩씩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한국 쇼트트랙의 간판스타인 심 선수는 “(내년 4월 열리는) 국가대표 선발전을 주목표로 훈련하고 있고, 장기적으로는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목표로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혹시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자신과 비슷한 피해를 입은 이들을 향해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청하라,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 그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작년 4월에 부상으로 국가대표 선발전을 기권해) 대표팀 밖에 있으면서 거의 처음으로 온전한 저만의 시간을 가졌어요. 그리고 사건에 대한 시간도 동시에 흘렀잖아요. 제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조금씩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제 더 이상 숨지 않으려고 해요.”


- 어떤 깨달음 같은 게 있었나 보군요.


“음… 제 안에는 수많은 모습이 있잖아요. 운동선수로서의 저도 있고, 가족이나 친구에게 보여지는 모습도 있고, 또 피해자로서의 저도 있어요. 그런데 성폭력 피해자로서의 제 존재에 대해서는 아주 오랫동안 부정해왔어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될 거라고 믿고 싶었던 거죠. 하지만 이제는 그 존재도 인정하게 된 거예요.”


계속 이어져 온 수사·재판

최근 두 차례 법정 증인 출석

기억하고 싶지 않은 당시 일들

상기하는 과정 상당히 힘겨워


- 지난 11월29일과 12월20일 두 차례에 걸쳐 ‘조재범 성폭행 사건’ 공판의 증인으로 출석했어요. 심리적 안정을 위해 법정이 아닌 화상 증언실로 출석하도록 조처했다지만,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걱정과 긴장을 많이 하기도 했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다시 끄집어내고 상기해야 하는 과정이 많이 힘들었어요. 또 진술이나 증언하는 시간도 워낙 길어지다보니까 더 힘겨웠던 것 같아요.”


- 조 전 코치는 첫 공판에서 30여개에 달하는 성폭력 혐의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무죄를 주장했어요. 그걸 보며 어떤 심경이었나요.


“(한동안 생각에 잠기다가)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들이 오갔어요. 그래도 그 사람의 대응에 대해 어느 정도 예상했던 거라, 그로 인해 흔들리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재판 준비에 더 집중하려 했어요.”


- 조 전 코치 측으로부터 합의 등의 이유로 연락을 받거나 사과를 받은 적은 없습니까.


“(성폭력 고소 11개월 전인 2018년 1월16일 전치 3주의 폭행을 당하고) 진천선수촌을 뛰쳐나오면서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을 차단했기 때문에 어떤 연락이 와도 모르는 상태였어요. 다만 아버지께 그 사람이 직접 했는지 주변 분이 했는지 모르겠는데 폭행사건이 처음 불거졌을 때 합의를 위해 연락을 해왔던 것 같아요.”


조 전 코치는 심 선수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2014년 8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태릉·진천 선수촌과 한국체육대학 빙상장 등 7곳에서 심 선수를 30차례에 걸쳐 성폭행하거나 강제로 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범죄사실 중 심 선수가 고등학생이던 2016년 이전의 혐의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기소했다.

"숨고 숨다가…날 살려달라고 소리친 거예요"

- 여성으로서, 또 세계적으로 촉망받는 선수로서 성폭력 피해 폭로를 결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해요. 공개를 결심한 특별한 계기나 어떤 심적 동요가 있었던 건가요.


“먼저 (조 전 코치의) 폭행사건에 대한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면서 벼랑 끝에 선 심정이었어요. 숨고 숨고 숨다가 결국 벼랑 끝까지 몰려서 떨어져 죽게 생긴…. 제가 만약 (성폭력 피해를) 말하지 않고 혼자 품고 죽는다면 후회하지 않을까, 많이 생각했어요. 또 지금도 저 같은 피해자가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당시 많은 분들이 저를 응원해주셨는데 그중에는 성폭력 피해자도 계셨어요. 더 용기를 내 살려달라고 소리친 거예요.”


더 이상 숨지 않겠다는 다짐

폭로로 운동 못하게 될까 두렵고

2차·3차 가해 공포 밀려왔지만

말하지 않는다고 없던 일 아냐

세상에 외쳐야 고통 덜 수 있어


- 후폭풍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습니까.


“두려움은 항상 있었어요. 앞으로 운동을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과 2차, 3차 피해에 대한 공포심이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용기를 내기까지 시간이 많이 흘렀어요. 충분히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지만 제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고통이 크더라고요.”


- 누구에게 가장 먼저 성폭력 피해 사실을 알렸나요.


“아버지예요. 식탁에 마주 앉아 말씀을 드렸어요. 화를 내실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한동안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어요. 아버지가 변호사에게 연락하셨어요.”


빙상계에서 아버지 심교광씨(56)의 헌신은 잘 알려져 있다. 스케이트에 재능이 있는 초등학생 딸을 위해 다니던 직장도 미련없이 버리고 함께 강릉을 떠나 서울행을 결행했다. 상경 초기엔 돈이 부족해 찜질방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지금껏 심 선수가 훈련장을 오갈 때도 늘 함께한 사람이 아버지였다.


나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어

아버지 스트레스로 담낭 수술

나도 악몽에 심리치료 중이지만

쇼트트랙 선수 된 것 후회 없어

많은 분들의 응원 정말 감사해


- 아버지가 얼마 전 수술을 받으셨다고 들었어요.


“제 일을 겪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어요. 체중도 엄청 줄고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셨어요. 그러다 담낭에서 결석이 발견돼 결국 담낭까지 떼어내셨어요. 지금 회복 중이시지만 아직 식사나 움직임을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 심 선수도 스트레스 장애, 우울증, 공포성 불안장애, 수면장애 등으로 약물 치료를 받았고, 매일 악몽에 시달린다는 보도가 있었어요. 지금은 어떤가요.


“지금도 계속 병원에 다니고 있어요. 최대한 좋아지려고 노력 중이에요. 여전히 밤마다 불면에 시달리고, 피해 사실과 관련한 악몽을 꾸지만요.”.


- 수사에 이어 재판이라는 고단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데, 피해 공개를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없어요. 다만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인데,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피해 사실을 알리라고 권해도 되는 것인지 생각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 힘든 것이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이야기하는 게 고통을 더는 일일 거라고 생각해요.”

경향신문

심석희 선수는 23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많은 분들의 응원에 힘입어 용기를 낼 수 있었다”며 “다른 피해자들도 목소리를 내고 세상에 당당히 나서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 전직 유도선수 신우용씨가 심석희 선수를 보고 용기를 내어 자신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드러내고 가해자를 고소해 처벌을 이끌어냈어요. 어떤 마음이 들던가요(신씨 성폭력 사건 가해자에게는 징역 6년이 선고됐다).


“목소리를 함께 내줘서 감사해요. 다른 많은 피해자들도 용기를 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검찰은 심 선수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되는 데다 과거 심 선수가 성폭행 피해를 본 뒤 날짜와 장소, 당시의 감정 등을 적어놓은 메모장을 제출한 것을 근거로 조 전 코치의 혐의가 입증된다고 봤다. 또 조 전 코치가 심 선수를 8세 때부터 정신적으로 지배했다며 ‘그루밍 성폭력’의 전형이라고 했다. 심 선수는 강릉에 살던 초등학교 1학년 때 오빠를 따라 강릉빙상장에 갔다가 스케이트에 입문했다. 그때 조 전 코치를 만났다. 조 전 코치는 심 선수가 5학년 때 서울로 전학왔을 때도 함께 상경해 줄곧 심 선수를 지도했다.


- 심 선수에게 조 전 코치는 어떤 존재였나요.


“어렸을 때부터 맞는 일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되게 무서운 존재였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아이스하키 채로 맞아 손가락뼈가 부러졌고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부터 폭행 강도가 더 세졌어요.”


- 폭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조 전 코치가 협박도 했다고요. 어떤 협박이었나요.


“그 사람(조 전 코치)은 제가 피해 사실을 발설하면 앞으로 선수생활은 물론 가족의 삶까지 지장을 받을 거라고 어렸을 때부터 늘 협박했어요. 저는 운동을 포기할 수 없었어요.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예요.”


성폭력에 앞서 먼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조 전 코치의 폭행이었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인 2018년 1월17일 문재인 대통령이 올림픽 출전 선수 격려차 진천선수촌을 방문했는데 여자 쇼트트랙 대표팀 주장이던 심 선수가 사라진 일이 계기가 됐다. 심 선수는 전날 조 전 코치에게 전치 3주의 폭행을 당한 뒤 선수촌을 이탈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 전 코치는 심 선수 등 국가대표 쇼트트랙 선수 4명을 상습 폭행한 혐의로 2018년 6월 기소돼 지난 2월 징역 1년6월이 확정돼 복역 중이다. 2018년 12월 심 선수는 성폭력 피해에 대한 추가 고소장을 제출했고 현재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 조 전 코치의 사건을 계기로 국가인권위원회가 전국 초·중·고 선수를 상대로 조사한 결과, 응답한 5만7557명 중 2212명(3.8%)이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어요. 만약 지금 현재 심 선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후배가 있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습니까.


“(한동안 생각에 잠기다가) 우선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청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 선수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지도자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척 감출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들도 범죄인 줄 알면서 (범행)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 재판을 통해 무얼 얻고 싶은가요.


“잘못에 대한 엄벌을 통해 이 사회가 많이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심 선수는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공개하고 심신이 힘든 상황에서도 2019년 2월1일 독일 드레스덴에서 열린 2018~2019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5, 6차 대회에 출전했다. 그러나 결과는 아쉬웠다. 감기 증세까지 겹치면서 메달을 하나도 따지 못했다. 이어 4월에는 허리와 발목 부상을 이유로 국가대표 2차 선발전을 기권했다. 팬들은 그의 안위를 걱정하며 안타까워했다.


- 지금 처한 상황이 성적을 내는 데 지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겠죠.


“그런 영향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고 제 자신도 많이 준비가 안됐던 것 같아요. 심적으로도 안정돼 있지 못했고, 또 한참 사건과 관련해 조사를 받으러 다니느라 훈련에 집중을 못했거든요.”

경향신문

2022년 세번째 올림픽 꿈

하루 일과, 낮 재활·변호사 미팅

오전과 저녁 시간에 빙상훈련

내년 4월 국대 선발전 1차 목표


- 요즘 하루 일과는 어떻게 짜여져 있습니까.


“오전에 빙상훈련을 하고 낮에는 재활운동을 하거나 병원에 가거나 변호사 미팅을 해요. 그리고 저녁때 다시 지상훈련과 빙상훈련을 해요. 빙상 4시간, 지상 2시간 해서 총 6시간 훈련해요. 제가 한참 많이 훈련할 때는 8시간까지 했는데 조금씩 올리고 있는 단계예요. 작년 시즌에 워낙 기량이 떨어져 있었는데 차근차근 올려가야죠.”


- 어떤 대회를 준비하고 있나요.


“우선 국가대표 선발전(내년 4월)을 주목표로 훈련하고 있어요. 차근차근 제 경기력을 올려보고 싶고 장기적으로는 2022년 베이징 올림픽을 목표로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심 선수는 화려한 빙상 질주 이면에 숨겨진 오랜 큰 고통 속에서도 “지금껏 단 한 번도 쇼트트랙 선수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삶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싶다”고도 했다. 그리고 이 말을 꼭 넣어달라고 당부했다.


“많은 분들이 응원을 해주고 힘이 되어주시면서 제가 더 용기를 내었고 그동안 부정해오던 피해자로서의 저의 존재도 인정할 수 있었어요. 저는 이제 더 당당하게 세상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요. 그런 제가 혹시 또 다른 피해자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드릴 수 있다면, 그분들도 용기를 내셔서 일어서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2시간여에 걸친 인터뷰가 끝났다. 심 선수는 훈련을 해야 한다며 한국체육대학 빙상장으로 향했다.

경향신문

지난 23일 경향신문 인터뷰실에서 심석희 선수가 그간의 심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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