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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믿음이 배신당한 ‘이상한 시장’…기존 경제학은 오답이었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떠오르는 ‘새로운 경제학’

양극화 심화·효과 없는 양적 완화에 의문 품는 경제학자들

‘무제한 화폐 발행으로 완전고용’ MMT 같은 파격 이론 출현

재산 소유권 대신 사용권 거래 ‘경매 방식’ 제안하기도

경향신문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는 ‘이상한 상태’에 빠졌다. 각국 정부가 아무리 돈을 풀어도 회복은 더디다. 경기가 회복돼 고용이 늘더라도 물가는 제자리걸음이고, 마이너스 국채 금리 규모가 17조원가량으로 커졌다.


양극화는 19세기 도금시대 이후 최대 수준으로 벌어지고, 주요국들이 세계화와 자유무역체계에서 이탈하려 한다. 기후위기로 인해 인류를 비롯한 전 생태종이 파국을 맞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런 상태가 10년째 계속되자 경제학자들도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이상한 세계의 경제학이 아니라 혹시 경제학이 이상했던 것은 아닐까. 경제학이 이상한 세계를 만들었을까. 이 같은 반성 속에서 경제학은 성장을 예측하는 장밋빛 전망과 동떨어진 학문으로 바뀌었다. 반면 새로운 경제학이 태동할 기회라는 시각도 있다.


“현대 경제학은 시장에 대한 페티시즘으로부터 마침내 벗어나고 있다.” 지난 7월 발간된 미국의 정치·문화 계간지 ‘보스턴 리뷰’에 실린 ‘신자유주의 이후의 경제학(Economics After Neoliberalism)’에 실린 글의 일부이다. 공동 필진인 대니 로드릭 하버드 케네디스쿨 교수, 슈레시 나이두 컬럼비아대 교수, 가브리엘 주커만 UC버클리 교수는 세계화와 불평등 문제를 연구해 온 경제학자들이다.


이들은 시장에 대한 믿음과 지속적인 성장 등을 이론적 배경으로 삼는 기존의 경제학이 불평등의 심화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데다, 디지털화·자동화 물결 속에서 일자리가 위협받는 현상과 기후문제 역시 해결하지 못한다고 진단했다. 이들은 현대 경제학이 합리적이고 균형을 향해 작동하는 시장이라는 기존 경제학의 전제에서 벗어나 인간의 다양한 활동 동기를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평등 문제에 더욱 민감해져야 하고 실증적으로 연구해야 하며 ‘포용적 성장’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기존 경제학의 대전제를 뒤흔드는 파격적인 이론도 주목을 받고 있다. 국제 경제학계와 미국 정치권 사이에 벌어진 현대통화이론(MMT)이 대표적이다. MMT는 금리 인하와 양적완화 같은 기존 통화정책이 ‘낙수효과’를 유발하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정부는 화폐를 얼마든지 발행할 수 있어서 자국 통화 표시 채무의 과다로 파산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정부는 무제한적으로 화폐를 발행해 완전고용을 달성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스테파니 켈튼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 교수가 불을 지핀 이 이론은 주류 경제학계에서는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 미국 경제처럼 잠재성장률을 웃도는 상황에서 화폐를 대량으로 찍어 재정적자를 확대하면 급격한 물가 상승을 부를 것이라고 비판한다. 기축통화국인 미국에서만 가능한 발상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그러나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버니 샌더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등이 이를 주창하면서 정치적으로 널리 주목을 받았다. 경제학계보다는 정치권의 지지를 받았고 그만큼 불평등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시장과 경쟁을 강조하는 관점이지만 전통적 경제학의 전제를 파괴해버린 주장도 나왔다. 미국 시카고대학의 법경제학자인 에릭 포스너와 마이크로소프트연구소 수석연구원인 글렌 웨일이 함께 쓴 <래디컬 마켓>은 오히려 부의 독점을 비판하며 경쟁의 강화를 주문한다. 그런데 경쟁을 주문하는 방식이 독특하다. 사유재산권 제도가 영구적 소유권과 독점을 가져오는 제도라고 비판하며 재산에 대한 소유권 대신 사용권을 자유로이 거래하는 ‘경매 방식’을 대안으로 내세운다. 미국에서 지난해 출간된 이 책은 ‘21세기 자유주의’란 평도 듣고 있다.


방법론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숫자와 실증 연구를 중시하며 이른바 ‘경성과학’을 지향하는 경제학계에 대한 자성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 아켈로프 버클리대 교수는 미국의 가장 권위 있는 경제학 학술지인 전미경제학회지에 기고한 글에서 “경제학이 지나치게 경성과학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경도됐다”고 주장했다.


노벨상 수상자인 게리 베이커 교수 역시 “나는 현실의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경제학에 흥미를 잃었다”고 말한 적 있다. 파이낸셜타임스 칼럼니스트 팀 하퍼드는 이에 대해 “기존 경제학의 방법론에 대해 과도하게 비난할 필요는 없다”면서도 “경제학이 다양한 방법론에 보다 관대해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상한 경제학’들을 뉴노멀 경제학이라고 부르기는 아직 어렵다. 이강국 리쓰메이칸대 교수는 “주류 경제학에 대한 반성이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 본격적인 변화가 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주류 경제학 내 혁신운동이 커지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 주장이 학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지만 주류 경제학이 불평등 문제에 더 고민하고, 특히 양적완화의 실패 원인 등에 주목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불평등에 반대하는 좌파 그룹에 진보적 주류·비주류 경제학이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기존의 경제학 이론이 아직 절대다수이지만 기존의 주류 경제학에도 변화를 가져오고 있으며 경제학이 새로운 사회를 여는 단초 역할을 한다는 시각이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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