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한 시간… 신안 ‘순례자의 섬’
대기점도·소기점도·소악도·진섬 …
전남 신안 4개의 섬에 예수 12사도 이름 딴 예배당 12개
스페인 산티아고는 40여일 걸린다지만
부지런히 걷는다면 이곳은 1박2일간의 순례
작고 이국적인 예배당서 고요히 기도하는 시간…
1만원짜리 ‘소박한 섬밥상’도
베드로의 집 |
새해가 되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37년째 ‘팩트폭행’ 중인 록밴드(U2, New year’s day)도 있지만, 그래도 연초가 되면 두 손 곱게 모으고 기도하는 심정이 된다. 종교가 있든 없든 마찬가지다. 절대자에 바치는 간절한 기원이든 스스로를 향한 내밀한 다짐이든, 새 출발에 앞서 고요한 묵상의 시간은 필요한 법이다.
마침 그런 기도의 순간에 어울리는 공간이 있다. 지난해 11월 문을 연 전남 신안 ‘순례자의 섬’이다. 증도면 병풍리에 속한 대기점도·소기점도·소악도·진섬 등 4개의 섬에 예수의 12사도 이름을 딴 12개의 작은 예배당을 짓고 길을 만들었다. 주민(110여명)의 80%가 개신교 신자라 예배당이란 형식을 빌렸을 뿐, 누구나 와서 걷고 쉬면서 차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길이다.
개펄 위 산토리니
출처 | 신안군청 |
순례길은 대기점도 방파제 끄트머리에 들어선 1번 예배당 베드로의 집에서 시작한다. 종점인 12번 가롯 유다의 집까지 거리는 12㎞. 각 예배당을 잇는 거리는 짧으면 300m, 길어야 1.2㎞다. 부지런히 걸으면 하루 만에 다 돌아볼 수도 있다.
베드로의 집은 짙푸른 원형 지붕을 인 순백의 건물이다. 누가 봐도 그리스 산토리니의 풍경을 닮았다. 육지에서 섬으로 들어오는 관문인 선착장 자리에 지어진 예배당은 대합실 역할도 한다. 좁은 실내엔 십자가와 촛불, 들꽃을 그린 벽화와 벤치가 오밀조밀 들어찼다. 여행자들은 예배당 옆 키 작은 종탑의 종을 울리며 길을 떠난다.
작은 야고보의 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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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점도에 세워진 예배당은 모두 5개다. 섬에 난 길을 돌다보면 다 만나게 된다. 2번 안드레아의 집은 러시아에서 순교한 사도 안드레아를 기려 러시아정교회 건축양식을 따랐다는데 탑은 섬 주민들이 많이 기르는 양파 모양으로 만들었다. 어느 집에선가 쓰던 돌절구는 반으로 뚝 잘라 종으로 만들어 매달았다.
들판 한가운데 자리한 4번 요한의 집은 육지의 등대처럼 하얀 몸뚱이를 주위에 뽐내고 섰다. 건물 안팎엔 생명·평화를 염원하는 작가의 바람이 타일아트 부조로 새겨졌다.
요한의 집 내부(왼쪽) | 안드레아의 집 |
지역색을 살리고 주민들의 참여를 더해 완성한 예배당은 4개의 섬이 2017년 전남도의 ‘가고 싶은 섬’ 사업 공모에 당선되며 만들어졌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본떠 길을 만드는 데 전남도와 신안군이 40억원의 예산을 댔다. 공공미술협동조합 소속 한국인 작가 6명과 프랑스 작가 1명이 작업에 참여했다.
낙후한 섬이 활기를 되찾길 바라는 마음에 주민들은 품앗이를 하고 음식을 나르며 예배당 짓는 일을 도왔다. 예배당의 절반은 주민들이 기부한 땅에 지어졌다. 덕분에 거무튀튀한 갯벌 말고는 볼 게 없던 섬에 ‘스몰웨딩’ 촬영을 해도 좋을 만큼 근사한 풍경이 만들어졌다.
외딴섬 잇는 순례길
시몬의 집(왼쪽), 필립의 집 |
기점도는 기묘한 점처럼 생겼다는 뜻이고, 소악도는 섬 사이를 지나는 물소리가 크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기점·소악도와 진섬은 ‘어미 섬’인 병풍도에 딸린 새끼 섬들이다. 병풍도부터 진섬까지는 국내 최장인 14㎞의 ‘노둣길’로 연결된다. 썰물에 드러난 개펄을 건너기 위해 섬사람들이 징검다리 만들 듯 돌을 던져넣어 만든 길이 노둣길이다. 지금은 시멘트로 덮어 차도 오갈 수 있는 도로가 됐지만 밀물 때 수위가 3.8m를 넘기면 길이 사라지는 것은 예전과 같다. 길이 물에 잠기면 여행자도 꼼짝없이 발이 묶이고 만다.
대기점도에서 소기점도로 넘어가는 노둣길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자리 잡은 5번 필립의 집은 순례길 작업에 참여한 유일한 외국 작가인 장 미셸 후비오의 작품이다. 전형적인 프랑스 남부지방의 건축양식을 따랐다는데, 나무판자를 물고기 비늘처럼 덧댄 지붕이 유려한 곡선으로 솟아오른 모습이 인상적이다. 꼭대기에 달린 물고기 조형물도, 근처 바닷가에서 주워다 벽돌 사이에 꼼꼼히 채워놓은 갯돌도 그가 섬 주민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여준다. 예배당 안에는 무릎 꿇고 기도할 수 있는 나무판이 놓여 있다. 촛불을 켜고 석양을 맞으면 좋을 법한 공간이다.
노둣길을 건너 소기점도 저수지 한가운데에서 아직 짓고 있는 6번 바르톨로메오의 집도 후비오의 작품이다. 바다 한가운데 섬처럼 저수지 위에 떠 있는 예배당은 유일하게 출입할 수 없는 공간으로 지어진다.
소기점도에서 소악도로 넘어가는 노둣길 중간에 한창 마무리 작업 중인 8번 마태오의 집(김윤환 작가)도 밀물 때면 바다 위에 뜬 형태의 건물로 완성될 예정이다.
소기점도엔 순례길을 안내하는 여행자센터가 있다. 센터 건물엔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와 식당도 포함돼 있다. 식당에서 1만원짜리 ‘소박한 섬밥상’을 주문하면 도시 사람에겐 낯선 김국에 김전이 딸린 근사한 식사를 할 수 있다.
앞으로 순례길 중간에 12개 예배당을 소재로 한 기념품을 파는 가게와 섬 특산품 판매장 등도 문을 열 계획이다. 길에서 생긴 수익을 마을로 돌려 주민과 여행객이 상생하자는 취지다.
누구나 ‘가고 싶은 섬’으로
유다 타대오의 집 |
소악도에서 진섬으로 넘어가면 새하얀 외관에 4개의 지붕 곡선이 이어진 10번 유다 타대오의 집이 반긴다. 이탈리아산 타일을 깔고 해안식물을 심어 산뜻하게 꾸민 건물 주변은 원래 버려진 어구가 지저분하게 쌓여 있던 장소였다는 설명을 믿기 힘들 정도다. 진섬 남쪽 언덕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11번 시몬의 집은 출입문이 따로 없고 앞뒤로 뚫린 형태다. 열린 문으로 바람과 파도소리와 바다 풍경이 자유롭게 넘나든다.
시몬의 집에서 대숲 사이로 난 길을 통과하면 모래사장 건너편 언덕에 마지막 예배당인 가롯 유다의 집이 보인다. 가롯 유다의 집이 서 있는 언덕 쪽은 밀물이면 길이 막혀 딴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딕양식으로 날카롭게 올린 건물은 붉은 벽돌을 나선형으로 돌려 쌓은 종탑이 독특하다.
예술가들을 모으고 주민들 힘을 합쳐 순례자의 섬을 만들어낸 기획자는 윤미숙 신안군 가고싶은섬TF팀장(58)이다. 지역언론 기자와 시민단체 활동가를 거친 윤 팀장은 ‘마을만들기’ 전문가다. 통영시의 철거계획에 맞서 달동네에 벽화를 그려 한 해 15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동피랑 마을’로 탈바꿈시킨 게 바로 그다. 순례길을 만들면서도 섬 주민 모두를 인터뷰해 그들 입장을 반영한 길을 만들었다. 여행자들이 늘면서 섬에는 지난해 말부터 마을버스가 생기고 하루에 오가는 배편도 늘었다. 여행자들을 위한 전기자전거도 50여대 마련됐다. 소외된 섬을 “사람 사는 동네”로 만들어가는 변화는 이제 막 시작됐다.
순례자의 섬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압해도 송공항에서 배를 타고 대기점도로 들어가면 선착장의 베드로의 집부터 곧바로 순례를 시작할 수 있다. 지도읍 송도선착장에서 병풍도 보기선착장까지 배를 탄 뒤 노둣길을 건너 대기점도로 이동해 여정을 시작할 수도 있다. 송공항에선 오전 6시50분·9시40분, 낮 12시50분, 오후 3시30분 등 하루 네 차례 배가 뜬다. 대기점도까지 70분 소요된다. 송도선착장에서도 오전 7·9·10시, 오후 2시 등 네 차례 배가 뜬다. 병풍도까지는 25분가량 걸린다. 두 노선 모두 승용차를 실을 수 있는 차도선을 운항한다. 승객은 3000~6000원, 차량은 9000~1만5000원의 요금을 받는다. 배 시간은 계절과 물때에 따라 바뀔 수 있으니 사전에 확인해둬야 한다. 송공항 해진해운(061-279-4222), 송도항 정우해운(061-247-2331).
노둣길이 잠기면 섬을 오갈 수 없다. 여행자센터(061-246-1245)에 전화해 물때를 확인하고 일정을 짜는 게 좋다. 여행자센터에 딸린 게스트하우스에는 남녀 구분된 8인실 도미토리룸이 두 개 있다.
신안 | 글·사진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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