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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인도 몰래 들어와 기도하는 ‘하늘이 내린 명당’

조선 최대 규모이자 최초의 왕릉, 태조가 잠들어 있는 동구릉(東九陵)


태조부터 선조·영조 등 7명의 왕

10명의 왕비 모셔놓은 곳


이성계의 건원릉, 홍살문 앞엔

높이 다른 두 개의 길 나란히

높은 건 영혼이 다니는 ‘신도’

낮은 길은 임금이 걷는 ‘어도’


언덕 오르는 한 걸음만큼

서서히 보이는 푸르른 봉분

방원이 고향 함흥서 가져온

그 억새풀이로구나

무속인도 몰래 들어와 기도하는 ‘하늘

잉에 올라 바라본 건원릉의 능침. 적송 군락에 둘러싸여 있고 봉분에는 억새풀이 무성하다. 멀리 아차산 자락이 보인다.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조경이 어우러진 조선 왕릉은 ‘신들의 정원’으로 불린다. 왕실과 나라의 안녕을 위해 선왕을 모신 명당자리로 500년 넘게 금단의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시민의 소중한 휴식처가 됐다. 조선 왕릉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큰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東九陵)은 사철 울창한 숲을 자랑한다. 그늘진 숲길을 산책하며 유난히 뜨거웠던 올해 여름과 작별 인사를 나누기에 알맞은 장소다.


동구릉은 현재 부지가 약 195만4100㎡(59만평)에 이른다. 원래는 그 두 배가 넘었다. 왕릉이 화재 피해를 입지 않도록 능 주변 30~50리까지 해자림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난개발로 능역이 크게 줄었지만 여전히 거대한 녹지는 수백년 된 나무들로 빽빽하다. 가장 쉽게 눈에 띄는 건 소나무다. 귀신을 쫓는다 해서 예로부터 왕릉에 많이 심었다. 곳곳에 자리 잡은 참나무와 서어나무, 오리나무, 백당나무 군락도 눈길을 끈다.


동구릉은 천혜의 자연 못지않게 이야깃거리가 풍부하다.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는 조선의 왕들이 여럿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태조 이성계부터 선조와 영조 등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이곳에 묻혀 있다. 능의 형태는 왕이나 왕비 한 분만 모신 단릉부터 왕과 왕비를 함께 모신 합장릉, 한 산줄기에서 뻗은 두 개의 언덕에 나란히 봉분을 쌓은 동원이강릉, 왕과 왕비 두 명을 잇달아 모신 삼연릉 등 다양하다. 초대부터 24대 왕까지 400년 넘는 시기를 아우르고 있어 능 주변 건물과 석상을 보면 조선의 예술사 흐름도 일별할 수 있다.

계단 한 칸씩 오르는 왕릉

무속인도 몰래 들어와 기도하는 ‘하늘

건원릉 홍살문과 정자각.

먼저 동구릉을 대표하는 건국왕 이성계의 건원릉으로 향했다. 건원릉은 형태와 예법에서 이후 조선 왕릉의 표본이 된 능이다. 능 앞에는 아무나 들어가선 안된다는 의미로 금할 금(禁)자를 쓴 금천이 흐른다. 과거엔 능을 관리하는 능참봉의 허락 없이 금천을 건너면 태형에 처해졌다. 이어 등장하는 붉은 칠을 한 나무문은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홍살문이다. 홍살문 앞에는 임금이 제사 지내던 정자각까지 넓적한 박석을 깔아 높낮이를 다르게 한 길이 두 줄로 나 있다. 오른쪽 높은 길은 영혼이 다니는 신도(神道), 왼쪽 낮은 길은 참배하러 온 임금이 걷는 어도(御道)다. 어도는 정자각으로 오르는 계단인 어계로 이어진다. 이곳에 제사 지내러 온 왕들은 반드시 ‘합보’로 계단을 올랐다 한다. 오른발로 먼저 딛고 왼발을 그 옆에 올리며 한 칸 한 칸 올라가는 식이다. 그대로 따라해봤다. 발걸음이 느려지며 절로 차분하고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선왕 앞에서 제를 올리며 국사를 걱정했을 나라님들의 마음가짐이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졌다.


정자각을 지나면 능침(왕의 무덤)이 모셔진 작은 언덕이 나온다. 능 앞에 조성된 이 언덕을 사초지라 부른다. 산자락이 끝나며 마지막 기운이 모이는 곳으로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분류된다. 과거엔 겨울이면 동네 아이들이 이 사초지에서 눈썰매를 타고 놀았다. 동구릉의 각 능은 소풍 온 인근 학교 학생들이 반별로 모여 뛰놀던 놀이터이기도 했다. 안내를 맡은 문화관광해설사 정남선씨는 “그만큼 지역민들에게 친근한 장소였지만 1970년대 사적 지정 이후에도 오랫동안 체계적 관리가 이뤄지지 못했던 왕릉의 과거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무속인도 몰래 들어와 기도하는 ‘하늘

600년 넘게 가꿔온 동구릉의 숲과 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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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가 둘러쳐진 사초지 옆으로 오솔길을 돌고 돌아 능침에 올랐다. 건원릉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잔디가 아니라 억새로 봉분을 덮었다. 아들 태종이 아버지 고향인 함흥의 억새를 뽑아다 심은 것이다. 봉분 위로 수북하게 솟은 풀을 보고 가끔 ‘왜 왕릉에 벌초를 안 하냐’고 항의하는 민원이 들어오기도 한단다. 건원릉의 억새는 1408년 조성 이후 오늘까지 610년 동안 애지중지 가꿔온 것이다. 자주 말라죽는 억새를 걱정해 인조는 ‘매년 한식에 한 번만 벌초하라’는 명을 내렸다. 숙종이 능 주위에 퍼진 억새를 뽑아다 봉분에 다시 심으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지금도 사초지 아래 한쪽엔 능침의 억새가 훼손되거나 죽으면 옮겨다 심기 위한 용도로 억새밭이 조성돼 있다.


능침 위쪽으로 동그랗게 솟은 부분을 ‘잉’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상 좋은 기운이 응축된 곳인데, 건원릉은 잉이 완벽하게 표현된 남한에서 거의 유일한 지형이라고 한다. 가끔 무속인들이 몰래 이곳에 들어와 기를 받기 위해 기도 등을 하다 쫓겨나는 일도 있다고 한다. 그만큼 좋은 에너지가 가득하다는 얘기다. 잉 위에 올라 남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멀리 조산(풍수지리 용어로, 혈(穴)에서 가장 멀리 있는 용의 봉우리)인 아차산이 보였다. 왼쪽으로 한강이 보여야 할 자리는 아파트에 가려 있었지만 좌청룡 우백호에 완벽한 배산임수 지형이 눈에 들어왔다. 명나라 사신이 건원릉 자리를 보고 “하늘이 내린 명당이다. 인공적으로 만든 게 분명하다”고 했다는 감탄이 실감났다.


평소에는 금지구역이라 가까이 가기 힘든 건원릉 능침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문화재청은 올해 11월까지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에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건원릉 능침에서 ‘동구릉 역사탐방 문화해설’을 진행한다. 매회 20명으로 인원이 제한된다. 조선왕릉 홈페이지(http://royaltombs.cha.go.kr)에서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자세한 사항은 조선왕릉관리소 동부지구관리소(031-563-2909)에 문의하면 된다. 초등학생·중학생은 전통의복을 착용하고 능지기의 하루 일과를 체험해보는 ‘동구릉 지킴이’ 프로그램(올해 11월까지 매주 토요일 운영)에 참여할 수 있다.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을 대상(1회 60명)으로 하는 ‘왕의 숲 생태 및 문화체험’ 행사도 올해 10월까지 열린다.


동구릉은 지난해부터 돗자리와 음식물 반입을 금지하고 있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뒤 왕릉 복원과 관리를 철저히 하는 과정에서 시행된 조치다. 먹을거리를 싸 들고 소풍을 즐겼던 예전 기억을 간직한 관람객들이 가끔 항의하는 일도 있다. 문화재청은 대신 관람객들이 쉬어갈 수 있는 휴식공간을 늘리고 투호, 비석치기, 사방치기, 제기차기 등 각종 전통놀이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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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릉 능침의 무인석.

경기도의 고구려 흔적

구리시는 경찰서 앞에 광개토대왕 동상과 광개토대왕비 복제품을 커다랗게 세워놓은 남한의 대표적 고구려 유적지다. 아차산에선 1994년 구리시의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고구려 유적이 대거 발굴됐다. 아차산 산봉우리에 형성된 20여개의 보루(군사 진지)에선 간이대장간 터도 발견됐다. 고구려가 한강 유역까지 내려와 백제·신라와 패권을 다툰 삼국시대의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다.


고구려대장간마을은 아차산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모아놓은 전시관과 상상을 더해 재현한 고구려인들의 마을 등으로 구성된 공립박물관이다. 전시관엔 칼, 창, 도끼, 화살촉 등 고구려의 발달한 철기문화를 보여주는 유물이 많다. 고구려 병사들이 쓰던 이름이 적힌 식기도 전시돼 있다. 야외에 조성된 고구려마을은 드라마 <태왕사신기>와 <선덕여왕>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황진영 문화관광해설사는 “7~8년 전까지만 해도 배용준을 닮은 아차산 ‘큰바위 얼굴’과 <태왕사신기> 촬영지를 보겠다고 국내는 물론 일본 등 해외 관광객들을 실은 버스가 하루에도 몇대씩 왔다갔다 했다”고 한다.

무속인도 몰래 들어와 기도하는 ‘하늘

고구려대장간마을에서 이어진 등산로로 한 시간 정도 산을 오르면 고구려 군사들의 흔적이 남은 보루에 닿는다. 보루 터에선 강 건너 백제 유적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중랑청과 왕숙천, 이어지는 한강까지 물길의 흐름도 손에 잡힐 듯 보인다. 왜 해발 300m도 안되는 아차산이 삼국시대 군사 요충지로 쟁탈의 대상이 되었는지 알 법하다. 꼭 산에 오르지 않아도 고구려대장간마을에서 시작하는 아차산 생태문화길과 구리둘레길을 따라가면 1시간에서 4시간까지 코스별로 여유롭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아차산 인근의 한강 조망이 가능한 곳이 또 있다. 쓰레기 소각장 굴뚝을 활용한 구리타워다. 전망대와 갤러리로 쓰이는 30층은 100m 높이로 남쪽으로는 잠실벌과 팔당댐, 북쪽으론 구리 시내와 다산신도시까지 360도 시원한 전망을 즐길 수 있다. 입장료도 무료다. 구리타워와 바로 붙어있는 구리시 곤충생태관도 아이를 동반한 나들이 장소로 적당하다. 호랑나비 등 다양한 나비를 키워 방사한 나비관과 물방개 등 각종 곤충을 전시한 곤충관으로 구성돼 있다.


글·사진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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