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마른 낙엽을 부여잡고 버텨본다…따스한 네가 올 때까지

홍릉 숲과 천장산 하늘길…겨울과 봄 사이, 거기 ‘나무’가 있었다

경향신문

홍릉과 영휘원·숭인원 등지는 천장산 자락에 들어간다. 이 일대는 나무 전시관이라 할 만하다. 사진은 영휘원·숭인원 내 느티나무.

지난 23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국립산림과학원(홍릉 숲)에서 복수초밭부터 찾았다. 꽃망울을 터뜨렸는지 궁금했다. 목재이용연구동 앞 복수초밭엔 두 송이의 꽃잎이 봉우리를 밀어낸 채 암술, 수술을 드러냈다. 만개하진 않았다. 밑바닥이 넓게 퍼진 접시보다는 반원통형의 도자 같은 모양이다. 옆에서 보면 ‘금빛 잔을 닮은 꽃’(금잔화) 같다는 뜻의 이름 ‘측금잔화(側金盞花)’에 비유할 만했다.

경향신문

지난 23일 홍릉 숲 복수초밭에서 망울을 터뜨린 복수초. 촬영시간은 이날 오후 3시16분.

1시간30분가량 숲을 한 바퀴 돌고 과학원을 나서기 전 다시 밭에 갔을 때 꽃은 볼 수 없었다. 누군가 낙엽으로 덮어 숨긴 듯했다. 19일 과학원을 안내한 연구기획실 민숙 주무관의 말이 떠올랐다. “야생초 사진을 찍고는 다른 사람들이 못 보게 나뭇잎이나 잔설로 덮는 분들이 더러 있어요. 뽑아가는 분들도 있고요.” 어딜 가나 사람 욕심을 확인한다.


과학원은 사람들에게서 복수초를 보호하려 덱을 만들고, 울타리를 쳤다. 그런데도 캐가는 사람들이 있나 보다. 과학원은 24일 트위터(@nifos_news)에 이렇게 썼다. “복수초는 이른 아침에 꽃잎을 닫고 있다가 일출과 함께 꽃잎을 활짝 펼치기 때문에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홍릉숲의 복수초를 매년 만나기 위해서 꺾어 가거나 캐가는 것을 자제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겨울-나무로부터

경향신문

홍릉 숲 낙우송 지역.

헐벗은 나무도 푸른 상록수도

저마다의 힘으로 겨울을 나는 중


복수초는 겨울에 꽃을 피워 ‘봄의 전령’으로 불린다. 서울에서 이 전령을 맞이하는 곳이 홍릉 숲이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야생화다. 복수초(福壽草)란 이름엔 ‘행복과 장수’의 기원이 들어 있다. 언 땅과 잔설에서 피어난다고 설련(雪蓮)이나 얼음새꽃 같은 이름도 얻었다. 사람들은 이 꽃에서 기복을 바라면서 눈과 얼음을 이겨내는 야생초의 강인함을 읽어낸다.


이 야생화만 그런가. 헐벗은 나무들은 저마다의 힘으로 겨울을 이겨낸다. 여러 사람들이 겨울 나무를 보며 이 시를 떠올린다. 척박한 세상에서 가까스로 버티며 사는 자신을 나무에 대입해 읽는다.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起立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零下에서/ 零上으로 零上 五度 零上 十三度 地上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일본인들이 보러 오는 나무

경향신문

반송은 홍릉 숲 상징 나무다. 길가엔 금강소나무를 심었다.

홍릉 숲엔 일본인도 반한 반송과

버려진 나무가 그 존재를 발하고


상록수도 많다. 대표적인 상록수는 산림보전연구동과 본관 사이 잔디밭에 있는 반송이다. 홍릉 숲 상징 나무다. 소나무 변종인 이 반송은 줄기가 지표면에서 1m 정도 올라왔다. 굵은 가지가 여러 개로 갈라져서 우산 형태를 이룬다. 잎은 10m 내외로 넓게 퍼졌다. 이런 모양 때문에 ‘분재’ 같다는 평도 듣는 나무다. 과학원 자료를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온다. “총독부는 아사가와 다쿠미(1891~1931)라는 임업연구관을 파견했다. 시험장 앞뜰에 일본 상징의 나무를 심으라는 지시도 내렸다. 아사가와는 한국 고유 수종을 심어야 한다고 반대 주장을 폈다. 지금의 홍릉초등학교 뒷산에서 반송을 한 그루 옮겨심기로 했다.” 1922년 일이다. 과학원 전신인 임업시험장이 생긴 해다.


아사가와 다쿠미는 한복을 입고, 한국 음식을 먹으며, 한국 생활용품을 애용했다고 한다. ‘일본어를 잘하는 조센징’ 취급을 받았다. 1931년 급성폐렴으로 숨져갈 때 “조선식 장례로 조선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경기 양주군 이문리에 묻혔다가 망우공원으로 옮겨졌다. 망우공원 묘역 기념비엔 이런 글귀가 새겨졌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일본에서는 1984년 그의 일대기를 다룬 책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1994년 영화 <백자 같은 사람>을 만들었다. 2012년엔 한·일 합작 영화 <백자의 사람>도 나왔다. 민 주무관은 “코로나19 사태 이전에 일본인들이 일부러 이 나무를 보러 많이 왔다. 아사가와 다쿠미에게 감정이입한 것 같다”고 말했다.


문배 나무도 봐야 한다. 연구기획실 권순덕 연구관이 말했다. “세계서 단 하나뿐인 기준 표본목이죠. 이것과 비슷한 나무를 발견하면 친족인지 아닌지를 과학원에서 와서 확인해야 해요.” 북한 풍산가문비 나무도 심었다. 남한에서 단 한 그루뿐이다. 홍릉 숲은 2021년 현재 총 157과 2035종, 2만여개체의 식물을 전시 중이다.

#버려진 나무, 죽어가던 나무

경향신문

고사목 산사나무는 영휘원 쪽에 보존되고 있다.

홍릉 숲엔 사서 심은 나무보다 버려진 나무, 아사 직전의 나무가 많다고 한다. 과학원의 설립 목적과 존재 의의가 여기 있는 듯하다. 민 주무관은 “지금도 (임학 전공) 박사님들이 산이나 길을 지나가다 이런 나무를 보고 종종 (과학원에) 연락을 한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영휘원·숭인원에서 바라본 청량리 일대 부도심.

Tip!

이 쯤에서, 여행지가 더 궁금해졌다면?!

호텔 예약은 호텔스컴바인에서! 

과학원 정문 맞은편이 세종대왕기념관이다. 기념관은 영휘원과 숭인원으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말라 죽은 나무를 봤다. 영휘원 쪽 산사나무다. 정부는 2009년 10월 천연기념물 제506호로 정했다. 이 나무는 2012년 8월 말 태풍 볼라벤이 왔을 때 강풍에 파손됐다. 생리적 노쇠도 더해졌다. 2015년 3월 지정에서 해제했다. 고사목(枯死木)을 땔감이 아니라 전시물로 보존하는 게 홍릉 숲의 가치와 일맥상통하는 듯했다. 이곳 나무도 홍릉 숲의 그것처럼 다 명찰을 달았다. 수종은 적지만, 나무 공부하기 좋다. 입구 쪽 헐벗은 느티나무에서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던 여름의 나날을 떠올려본다.

#하늘길, 두물길, 가로수길

경향신문

천장산 하늘길에선 홍릉 숲 너머 도시 풍경을 볼 수 있다.

길 따라 천장산 자락에 들어서면

하늘이 숨겨놓은 비경이 한눈에

영휘원~홍릉공원 ‘힐링 산책길’


홍릉 숲도, 영휘원·숭인원도 다 천장산(140m) 자락이다. 회기동, 청량리동, 석관동에 걸쳤다. 풍수지리로 보면 명당 터라고 한다. ‘하늘이 숨겨놓은 곳(天藏山)’이란 이름을 얻었다. 조선 왕조는 홍릉, 의릉, 영휘원·숭인원 같은 왕족의 무덤을 천장산 자락에 조성했다. 중앙정보부가 의릉 쪽에 있었다. 국가가 숨겨놓은 이곳은 지난해 1월에야 열렸다. ‘천장산 하늘길’이라 이름 붙였다. 길은 홍릉 숲을 따라 간다. 홍릉 숲의 규모와 의의를 더 잘 볼 수 있다. 남산타워와 롯데월드타워가 길목에서 다 드러난다. 도봉산 능선도 곳곳에서 확인한다.

경향신문

천장산 하늘길에서 바라본 홍릉 숲과 부도심 일대 건물. 왼쪽이 남산타워다.

이 일대가 다 길이다. 하늘길은 홍릉두물길, 청량가로수길과 연계된다. 힐링 산책길은 영휘원과 숭인원에서 출발해 홍릉근린공원을 잇는 길이다. 청량리 주택재개발 제7구역을 지난다. 철조망이 숭인원과 제7구역을 가른다. 제7구역 내 곧 스러질 집 대문에 “출입금지 범죄예방” 같은 스티커가 붙었다. 조합은 ‘점유자’들이 집을 비운 뒤 공실 확인을 받으면 명도 소송을 진행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경고를 ‘안내’ 현수막에 실었다. 이 길 한쪽은 힐링보다 욕망과 고통의 기운이 감돈다.

경향신문

청량리 주택재개발 제7구역 일대. 영휘원·숭인원과 연결해 ‘힐링 산책로’로 불린다.

#녹지축에서

경향신문

홍릉 숲 산림과학관. 집성재를 이용해 전통의 뜰집 형태를 구현했다.

청량리 같은 번잡한 부도심에 들어선 이 대규모 녹지축을 보며 새삼 놀란다. 숲과 나무의 역할을 상기한다. 홍릉숲은 인근 기상청 무인자동기상관측장비(AWS) 동대문지점보다 여름철에는 1.2도, 겨울철엔 1.0도 정도 낮다. 숲은 이렇게 도시열섬현상을 완화한다. 무지했던 터라 숲에서 빗물을 머금어 저장한 뒤 비 그친 다음 계곡에 물을 흘려보내는 게 나무가 아니라 흙이라는 것도 과학원 산림과학관에서 알았다. 과학관은 전통적인 뜰집의 형식을 계승해 지은 목구조의 건축물(건축가 김홍식, 명지대 건축학부 교수)이다. 이 건축물도 독특한 모양으로 2000년 화제가 됐다. 과학관은 ‘나무 이용’ 방법론과 효용에 관한 내용도 전시한다.


홍릉 숲은 다른 ‘수목원’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식물을 보존·관찰·실험하는 시험림이다. 국립 광릉 수목원엔 도시락을 싸 가져갈 수 있지만, 이곳엔 음식을 반입할 수 없다. 토·일요일에만 개방한다.


직원들은 식물 훼손을 걱정한다. 민 주무관은 “이렇게 연구 과제를 개방하는 곳은 없다. 같이 보존해 미래에 줘야 한다”고 말했다. 권 연구관은 “시민들과 공유하는 공간이다. 서울미래유산으로도 선정됐다. 시민들이 나무 이름을 알고, 관찰하면서 숲에서 힐링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글·사진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Tip!

여행 계획의 시작! 호텔스컴바인에서

전 세계 최저가 숙소를 비교해보세요. 

오늘의 실시간
BEST
khan
채널명
경향신문
소개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다, 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