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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집사' 숙종의 두 얼굴…부인들도 그렇게 아꼈다면


고양이는 주인을 자기 자신과 동격이나 심지어는 자기 집을 관리하는 집사 취급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을 ‘집사’라 하고, 주인은 고양이를 ‘주인님’이라 한다죠. 재미있는 건 약 250년 전의 저작인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은 바로 그러한 고양이의 습성을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숙종의 퍼스트캣 ‘김손(김묘)’

“고양이는 여러 해를 길들였다 해도 하루 아침만 제 비위에 틀리면 주인도 아는 체하지 않고 가버린다.”


제가 고양이 집사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는데요. 맞는 이야기인가요. 참 고양이 가운데 대통령이 키우는 고양이라면 ‘퍼스트 캣’이라고 하는데요. 문재인 대통령이 키우는 고양이 ‘찡찡이’는 유기묘에서 일약 ‘퍼스트 캣’으로 신분이 상승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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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잘 그려 변묘(卞猫)라는 별명을 얻은 변상벽의 ‘묘작도’. 고목 위의 참새들을 향하여 나무를 기어오르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고양이와, 웅크리고 앉은 채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는 고양이를 소재로 다루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런데 지금부터 340여 년 전인 조선시대 숙종(재위 1674~1720) 임금에게도 ‘퍼스트 캣’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이름까지 있었는데요. 문헌에 따라서 김묘(金猫) 혹은 김손(金孫)이라고 합니다.


실학자인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 ‘만물문’조에 바로 숙종의 ‘퍼스트캣’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 숙종대왕도 일찍이 김묘(金猫)라는 고양이를 길렀다.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 고양이 역시 밥을 먹지 않고 죽으므로, 명릉(明陵) 곁에 묻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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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추일한묘’. 가을날 한가로운 고양이를 그렸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이 기록을 뜯어보면 숙종의 퍼스트캣은 범상치않은 고양이였던 같아요. 숙종 연간의 인물인 김시민(1681~1747)의 시문집(<동포집>)에는 이 퍼스트캣을 읊은 시(김묘가)가 있는데요.


“궁중에 황금색 고양이 있었으니 임금께서 사랑하여 이름 내려주셨네. ‘김묘야’ 하고 부르면 곧 달려왔네. 김묘만 가까이서 임금을 모시고 밥 먹었네…차가운 밤에는 몸을 말고 용상 곁에서 잠들었네. 비빈들도 감히 고양이를 길들이지 못하는데…임금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며 고양이만 사랑하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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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의 <성호사설> 은 숙종의 퍼스트캣인 ‘김묘’ 를 자세하게 기술했다.

숙종 승하 후 ‘확’ 달라진 고양이

그런데 1720년(숙종 46년) 숙종이 승하하자 퍼스트캣의 행동이 달라졌다는 겁니다.


“고양이가 궁궐 분위기가 이전과는 다른 것 알고 문에 들어서자마자 슬퍼하며 위축됐네…밥에 이미 마음 없거늘 고기인들 먹으랴. 김묘가 달려가 빈소를 바라보고 통곡했네. 통곡소리 너무 서글퍼 차마 들을 수 없으니 보는 사람 사람마나 눈물 절로 떨구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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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숙종의 퍼스트캣을 다루고 있는 김시민의 <동포집> . |규장각 소장


김시민은 “김묘는 이후 20일동안 곡만 하다가 결국 죽었는데, 피골이 상접하고 털이 다 거칠어져서 참혹한 모습이었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김묘를 결국 비단으로 머리 감싸주고 선왕(숙종)의 능과 가까운 길 옆에 묻어주었다”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고양이가 인(仁)을 마음에 품고…죽음으로 주인에게 보답했다고 칭찬했다”는 겁니다. 김시민은 “충신이 털 난 짐승에게서 나왔는데, 모두 숙종 임금의 덕이 짐승에게 미친 덕분”이라며 “사람들은 이 고양이를 본받아야 한다”고 한마디 던집니다.


“말세 사람들아. 이 고양이보고 부끄러운 줄 알거라. 은혜를 저버리면 곧 난신적자가 되느니….”


역시 동시대의 시문집인 이하곤(1677~1724)의 <두타초>에도 이 퍼스트캣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궁녀들은 이 고양이를 김손(金孫)이라 불렀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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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곤의 <두타초> . 숙종의‘퍼스트캣’ 이야기는 조선시대 내내 화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대행대왕(승하한 숙종을 지칭)이 고양이를 무척 아껴서 궁중에서 십수년간 길렀다. 대궐에서 궁녀들은 이 고양이를 김손(金孫)이라 했다. 항상 숙이고 엎드려 있다가 임금이 먹이를 던져주어야 먹었다. 숙종 임금이 승하하자 고양이가 돌연 곡을 하면서 뛰어다녀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이에 궁녀가 김손에게 고기와 생선을 주었는데도 먹지 않았다는 겁니다.


“결국 수십일이 지난 뒤 김손이는 굶어죽었다. 그러자 혜순대비(숙종의 3번째 부인인 인원왕후·1687~1757)가 명릉(숙종릉) 곁에 묻어주도록 지시했다.”(<두타초> ‘서궁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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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곤 역시 김손(김묘)의 이야기를 쓰면서 김시민과 마찬가지로 “숙종의 인과 덕이 지극하여 금수에까지 미쳤다”는 사실을 찬양합니다. 이 퍼스트캣과 관련된 출생의 비밀이 알려지는데요. 숙종의 아버지인 현종(1659~1674)이 궁중에서 굶어 죽게 된 고양이를 발견해서 먹이를 주어 살려냈답니다.


이때 살아난 고양이가 김손의 어미(김덕·金德)이었다는 겁니다. 결국 김손은 어미 김덕의 은혜를 갚은 고양이였던 겁니다. 그리고 숙종은 바로 김손의 어미인 김덕의 죽음을 슬퍼하며 추모시(‘매사묘·埋死猫’)까지 지었답니다. 그래서 김덕의 자식인 김손(혹은 김묘)이 숙종 임금만을 따랐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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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면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숙종의 제1계비), 인원왕후 김씨(제2계비)의 무덤이 있는 명릉(서오릉 중 하나)에는 무덤 하나가 더 조성되었다는 얘기네요. 인원왕후가 숙종의 퍼스트캣을 명릉 곁에 묻으라고 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숙종의 퍼스트 캣 무덤을 ‘김묘원’ 혹은 ‘김손원’이라 해야 하나요.


정사가 아니라 야사가 아니냐구요. 그래서 믿을 수 없다구요. 아닙니다.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 격인 승정원에서 임금의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승정원일기>는 엄연한 정사라 할 수 있는데요. 영조 즉위 직후인 1925년(영조 1년) 11월9일 <승정원일기>에 바로 이 숙종과 김손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숙종대왕은 고양이에게 김손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셨는데, 그 은혜가 동물에까지 미쳤다”고 했습니다. 숙종이 퍼스트캣인 ‘김손’을 엄청 아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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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에 의해 사사된 우암 송시열의 초상화(국보 제 239호). 희빈 장씨의 소생(경종)을 세자로 삼겠다는 숙종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양이 사랑의 ‘반의 반’ 만이라도

그러나 저는 끔찍한 고양이 집사인 숙종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고양이를 사랑하는만큼 부인들과 신하를 아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앞서 인용한 <승정원일기>를 더 읽어보면 의미심장한 내용이 나옵니다. 핬


“숙종의 은혜가 금수(김손)에게 미쳤지만 임금을 모함하고 나라의 기강을 흔드는 죄를 저지르는 자에게는 절대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숙종은 46년간 장기집권 하면서 3번의 친위쿠데타인 환국정치를 통해 피의 숙청을 단행했습니다. 남인정권을 붕괴시킨 경신환국(1680년), 서인을 실각시키고 남인을 다시 중용한 기사환국(1689년), 그리고 또다시 남인을 퇴출시키고 서인이 재집권하는 갑술환국(1694년)이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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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뿐입니까. 그 과정에서 애꿎은 부인 두 명이 희생됐습니다. 서인의 후원을 받은 인현왕후(1667~1701)를 쫓아냈다가(1689년) 5년 만에 복위시켰습니다.(1694년) 남인의 후원을 받은 희빈 장씨(1659~1701)를 중전으로 올렸다가 마침내 사약을 내려 죽였습니다.(1701년)


인현왕후를 쫓아낼 때는 가마도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빨리 나가라”면서 버선발로 내보냈답니다. 인현왕후는 5년 만에 복위됐지만 못된 남편(숙종)을 둔 탓에 마음 고생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7년만(1701년)에 승하하고 맙니다. 그럼 희빈 장씨는 어땠을까요. 숙종은 한때는 죽고 못살았을 정도로 아꼈던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먹여 죽일 때 이런 말을 했답니다. “이 약을 상으로 알고 받으라”고…. 그것도 모자라 장씨의 입을 강제로 벌린 채 세 사발이나 들이부었답니다. “빨리 먹이라!”면서요.(<인현왕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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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뿐입니까. 숙종의 총애를 얻어 연잉군(훗날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1670~1718) 역시 중전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숙종이 희빈 장씨의 죄를 물으면서 “다시는 후궁이 중전의 자리에 오를 수 없게 하라”(<숙종실록> 1701년)는 명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이래놓고 자신은 1702년(숙종 28년) 당시 15살의 인원왕후(1687~1757)를 세번째 정부인으로 맞이했습니다. 이 무슨 억하심정입니까. 저는 이 대목에서 희빈 장씨가 죽으면서 했다는 마지막 말이 떠오릅니다.


“내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전하께서 정치를 밝히지 않으니 그것은 임금의 도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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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황묘농접’, 고양이가 나비를 놀리는 모습을 그렸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곱씹어보면 정치의 달인 소리를 듣는 숙종이지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돌려가며 괴롭혔고 죽였습니다.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며느리인 인현왕후에게 이렇게 경고했답니다.


“주상(숙종)은 평소에도 희로(喜怒)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시는데, 만약 꾐을 받게 되면 나라의 화가 됨은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숙종실록>)


타고난 성정이 그렇다는 것인가요. 한낱 미물이라는 고양이를 사랑한 것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부인과 신하들을 아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경향신문 선임 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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