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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같은 자리, 을지다방 쌍화차와 아침 라면은 옛날 그대로

소싯적 자주 갔던 을지다방을 30년 만에 다시 찾았다.

아침저녁으로 찬 공기가 살갗에 닿는다. 선선한 가을 바람이 이내 쌀쌀한 겨울을 몰고 온 듯하다. 소싯적 이런 날씨만 되면 친구들과 항상 했던 말이 있다. ‘월동준비 하러 갈까?’ 이 얘긴즉슨, 날도 쌀쌀해졌는데 쌍화차 한잔하러 가자는 뜻이다. 내가 젊었을 적 다방은 그런 공간이었다. 날이 선선을 지나 쌀쌀해지면 쌍화차 먹으러 가는 곳.


휴대폰이 없던 시절, 다방은 주로 만남의 장소였다. 새로 친구를 사귀고자 미팅을 하고, 동네 친구와 해질녘까지 신나게 떠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나만의 고민을 유일하게 털어놓았던 공간이면서 내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미래를 사색했던 곳. 그런 곳이 내겐 다방이다.


내가 살던 동네인 을지로에는 식당과 다방이 정말 많았다. 한 골목에만 50개가 넘는 다방이 있었을 정도로 다방은 흔한 장소였다. 여전히 을지로는 변함없는 모습이지만, 이를 새롭게 느끼는 사람들이 을지로를 핫하다고 말한다.


사실 을지로를 핫하다는 표현으로는 다 포장할 순 없지만, 옛날 느낌이 물씬 풍기는 간판과 거리들이 옛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건 사실이다. 마침 날도 쌀쌀해졌겠다, 월동준비를 하러 30년 만에 을지다방을 다시 찾았다.

을지다방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른 아침에 문을 연다. 오전 9시에 옷깃을 여미며 을지다방 앞에 섰다. 세월의 얼룩을 가득 짊어진 간판은 여전히 한눈에 들어온다. 오랜만에 마주한 오래된 나무계단 앞에 서니 감회가 새롭다. 좁은 계단을 올라 다방에 들어서니 주황색 가죽 의자와 낡은 테이블이 시선을 압도한다. 그리고 들려오는 사장님의 반가운 인삿말.


한번 쭉 둘러보니 나도 모르게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여전하구나’ 눈이 닿는 곳마다 옛 물건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손때 묻은 카운터, 배가 볼록 나온 브라운관 텔레비전, 벽걸이형 선풍기, 매일 한 장씩 뜯어내는 일력까지.


여기서 하이라이트는 가스버너에서 끓고 있는 주전자. 커피포트 대신 여전히 주전자로 물을 끓이는 모습이 반갑다. 터줏대감처럼 을지다방에 자리 잡고 있는 모든 실내 소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가 수십 년의 향기를 머금고 있었다.

Q 30년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네요.

겉모습만 그대로예요. 직원이 많이 줄었죠. 옛날에는 다방이 많았어도 을지다방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 직원만 9명이었죠. 그땐 제가 유니폼까지 맞춰줬어요. 겨울이 되면 평화시장에서 노란색 점퍼를 사다가 입혔는데, 길 지나가다가 노란색 옷이 보이면 을지다방 식구인 걸 알아봤을 정도예요. 유니폼이 을지다방의 상징이었죠.


예전에는 전화번호도 두 개였어요. 하나는 손님 안내용, 하나는 배달용. 그때는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다방에 ‘거기 누구 있냐’고 전화해서 ‘있다’고 하면 금방 오곤 했었죠. 사람과 사람을 잇는 창구였었죠. 지금 생각하면 그런 것들이 참 정겨웠네요.


Q 정겨운 단골 손님이 많을 것 같은데요.

아직도 많죠. 25년 단골 손님이 있는데 이곳에 종종 들러요. 다방에 와서 항상 하는 말이 “여기서 70대는 청년이야”라면서 여기만 오면 젊어지는 기분이래요. 여기 있는 누런 소파에 앉으면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대나 뭐래나(웃음).

을지다방이 여느 다방과 다른 점은 아침엔 라면을 판매한다는 것. 주변 공구가게 사장님들은 아침만 되면 을지다방에서 라면을 먹고 하루를 시작한다. 주변 단골 가게들의 요청으로 시작한 일이라는데, 사장님의 넓은 마음씨는 여전하다.


심지어 가격대도 저렴하다. 3000원에 계란 넣은 라면에 김치, 밥까지 준다. 그것도 고봉밥으로. 물론 라면은 오전 10시까지만 판매한다. 다방에 라면 냄새보단 커피 향기가 나야 하지 않겠냐는 사장님의 반응이 재밌다.


을지다방이 따뜻한 이유가 따뜻한 커피와 차를 팔아서만이 아니었다. 라면에 담긴 온정이 을지다방 안을 더욱 따뜻하게 데웠다.

을지다방 '라면'

을지면옥 '평양냉면'

Q 라면은 인기가 많나요?

처음에 주변 가게 사장님들이 부탁해서 몇 번 해주다가 메뉴가 된 거예요. 그래서 사실 다방에 자주 오는 주변 손님들만 라면 메뉴를 알고 있었죠. 어디 써 붙이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노포래퍼>​라는 TV 프로그램에 라면 메뉴가 공개되면서 갑자기 손님들이 라면을 달라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그래서 제한 시간을 정한 거예요. 오전 10시까지만 판매하는 걸로.

Q 커피 손님보다 라면 손님이 더 많은 거 아닌가요?

손님의 유형이 다양한 건 사실이에요. 오전에 라면만 먹고 가는 손님도 있고, 오후에는 냉면 먹고 후식으로 쌍화차 마시러 오는 손님도 많아요. 을지다방이 1985년에 가게를 열었는데, 그때 1층에 평양냉면집 을지면옥이랑 같이 열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을지면옥에서 냉면이랑 수육 먹고 입가심으로 쌍화차 마시러 을지다방에 들러요. 하나의 코스가 된 거죠. 그런데 신기한 건 어르신뿐 아니라 젊은이들도 그래요. 참으로 사람 입맛이라는 게 신기하죠. 입맛에는 세대 차이가 없나 봐요.

정오가 지나면 근처 회사원들, 청계천에 산책 나온 어르신들이 쌍화차 한잔 마시러 을지다방을 찾는다. 쌍화차도 다방마다 맛이 다르고, 들어가는 재료도 다르지만 을지다방은 여전히 달걀노른자와 계핏가루가 잔뜩 뿌려져 나온다. 비율이 생명이라는 사장님의 말처럼 쌍화차에는 국내산 견과류 또한 가득하다.


아직 쌍화차를 안 마셔 본 사람이라면 약국에서 파는 쌍화탕을 상상하면 큰 오산이다. 다방 쌍화차는 달달하면서 견과류가 씹혀 고소한 맛이 난다. 달걀노른자도 먹는 방법이 따로 있다. 한 번도 안 먹어본 척 사장님께 여쭤보면 자세히 알려준다.

Q 쌍화차를 맛있게 마시는 방법이 있나요?

쌍화차를 만들려면 쌍화액이 필요한데, 35년 전통의 비법으로 만들죠. 이건 비밀이에요. 그리고 견과류도 좋은 것을 사다가 직접 말리고 썰어서 대접하는 거라 쌍화차가 맛있을 수밖에 없죠. 하나 팁을 주자면 달걀노른자는 풀면 안 돼요. 차에 살짝 담갔다가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서 톡 터뜨려 먹어야 해요. 비릴 것 같지만 달걀노른자는 비린내가 안 나요. 

Q 그런데 쌍화차에 노른자는 왜 띄우는 거예요?

몸보신하라고 띄우죠. 옛날에는 풍족하지 않아서 끼니를 못 챙길 때가 많으니까, 단백질 보충하라고 한 알씩 넣어준 거죠. 물론 달걀노른자 한 알에 얼마나 몸보신이 되겠냐마는 그리되길 바라는 마음인 거죠. 이런 의미를 알고 마시면 한 모금 한 모금 마실 때마다 힘이 날 걸요? 쌍화차 한잔 다 마시면 하루의 건강을 마신 거나 마찬가지예요.

문득 쌍화차라는 단어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쌍화(雙和)는 ‘서로 합치다’라는 뜻으로 음(陰)과 양(陽)의 기운을 조화롭게(和) 만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몸의 전체적인 균형을 맞춰 주는 좋은 보약인 셈이다.


어쩐지 쌍화차를 마시면 점차 속에서부터 열이 오르면서 온몸에 온기가 돈다. 웅크린 마음마저 열리는 기분이랄까. 어쩌면 쌍화는 몸의 조화뿐 아니라 몸과 마음이 화목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덧 쌀쌀해진 추위에 몸은 잔뜩 움츠러들었지만 쌍화차 한잔으로 몸과 마음의 피로를 풀어낼 수 있었다. 올해 월동준비는 대성공이다.

을지다방

주소 서울 중구 충무로 72-1

가는 방법 을지로3가역 5번 출구에서 도보 1분

문의 02-2272-1886

영업 시간 평일 오전 7시~오후 9시, 토요일 오전 7시~오후 8시

대표 메뉴 쌍화차(5000원), 라면(3000원)


기획 우성민 사진 이대원(스튜디오 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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