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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걷다 보면 길에서 나를 만난다

신정일 작가는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두 발로 걸으며 길 위의 역사를 발굴하고, 우리나라에 걷기 열풍을 일으킨 도보답사 선구자다.

부산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동해 바닷길에 이어 해파랑길을 완성했고 소백산자락길, 변산마실길, 천년고도옛길 등 을 만들어 많은 사람에게 느리게 걷기를 권했다. 또 <신정일의 新택리지> 시리즈부 터 <왕릉 가는 길> <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 고을을 가다> 등 부지런히 평생을 걸 어온 길의 여정을 글로 기록해 100여 권의 책을 냈다. “왜 걷느냐”고 막연히 물으 니 “걷다 보면 나를 만나게 된다”는 분명하고 확신에 찬 답변이 돌아왔다.

개량 한복 차림에 등산화 한 켤레 신고 온 산천을 누비고 있는데, 그동안 얼마나 걸어왔나요?

1995년 동학농민운동에 관한 책을 시작으로 27년간 102권의 책을 썼고, 많을 때는 1년에 열 권 이상 책을 낼 때도 있었어요. 제가 그간 걸어온 모든 길이 바로 그 책 속에 담겨 있죠. 대한민국 구석구석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길을 직접 두 발로 답사 다니며 쓴 기록들이에요.


저는 현장에 답이 있다고 생각해요. 보지 않은 것은 알 수가 없잖아요. 내가 직접 걸으며 느끼고 본 것만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죠. 그렇게 저 혼자 걸었던 길을 2005년부터는 ‘우리 땅 걷기’ 모임 회원들과 다시 걷기도 해요. 태백에서 김포 한강과 부산 낙동강까지, 장수에서 군산 금강까지, 진안에서 광양 섬진강까지 우리나라 강이란 강은 대여섯 번씩 다녀왔어요. 또 영남대로, 삼남대로, 관동대로, 해파랑길, 소백산자락길, 변산마실길, 천년고도옛길 등 온 산천을 안 가본 곳 없이 돌아다니며 길을 발견하고 걷고 또 걷고 있죠.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책을 읽는 것과 같고,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산천을 유람하는 것과 같아요.

도보 답사를 떠나기 전 어떤 과정을 거쳐 채비하는지, 그리고 답사 현지에서는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걷는지 궁금합니다.

답사를 가기 전에는 대동여지도나 5만분의 1 지도를 보고 코스와 일정을 대략 정해요. 그리고 <한국지명총람>을 펼쳐 그 지역의 지명과 유래 등을 공부하고 숙지한 다음 책 몇 권과 카메라, 그리고 필기도구 정도만 꾸려서 길을 나서죠.


1시간에 4~5km 정도 걷는데, 한번은 낙동강을 걸을 때 잘 데를 찾지 못해 아침 7시에 출발해 저녁 9시까지 대략 64km를 걸은 날도 있었어요. 숙소는 그날그날 걸으며 찾아서 해결해요. 모든 걸 걱정하고 위험요소를 모두 걸러낸 다음 나서려고 하면 아무것도 못 해요. 일단 저질러야 하죠.


첫 번째는 뜻을 세우고, 두 번째로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시도하는 것이 의미 있는 거죠. 그러니 길을 떠날 때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이에요. 먼 길을 떠날 때는 눈썹까지 빼놓고 가라는 말이 있어요. 마음만 가지고 떠나면 되는데, 우린 너무 많은 것을 가져가는 것 같아요.

걸을 때 무엇을 느끼고 깨닫는지 생각의 여정도 궁금합니다.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 그리고 나무 한 그루에도 다 영혼이 있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 친구잖아요. 그렇게 길로 나가면 사물을 보는 새로운 눈이 생겨요.


길 위에서 만나는 사물들이 나에게 말을 건네고, 그 길이 결국은 나의 스승이고 동반자고 친구가 되는 거죠. 풍경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다 내 책이 되기도 하고요. 도보 여행이 그런 거예요. 집을 나서서 돌아오는 순간까지, 자분자분 곱씹으며 보이는 모든 것들을 스쳐 지나가지 않고 눈여겨보면 나한테 말을 걸어오죠. 그렇게 저는 걸으며 해찰(일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쓸데없이 다른 짓을 한다는 뜻)을 많이 해요. 단순히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걷기와는 방식이 다르죠.

그렇게 걷기에 가장 좋은 길을 꼽는다면요?

제가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가 영월 법흥사 소나무 숲인데, 오랜만에 그곳에 가면 소나무를 탁 안아주고 안부를 묻습니다. 강을 따라 걸을 땐 강물과 이야기를 나누지요. 그렇게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경이로움이 가장 즐거운 거고, 그 과정에서 나를 만나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끊임없이 질문하고 바라보는 사물을 통해 나를 투영하는 과정인 거죠. 마르셀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보면, 작가는 길에서 어떤 사물을 만나면 거기에 빠져서 그냥 지나가질 못했대요. 하염없이 깊이 바라보는 거죠. 그러다 기가 막힌 의식의 흐름을 잡아내어 20세기 최고의 문학작품을 써낼 수 있었던 겁니다. 니체 역시 “걷지 않고 떠오르는 생각은 믿지 말라”고 했어요. 니체뿐 아니라 헤세, 칸트, 쇼펜하우어 등 많은 시대의 문인과 철학자들이 걸으면서 자신의 사상을 완성했죠.

그간 길 위에서 많은 책을 써왔는데, 책으로 읽는 인문학과 길에서 만나는 인문학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서 “강변의 모래들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다. 내가 그것을 감각을 통해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다”라고 해요. 말 그대로 “강변의 모래들이 아름답다”라고 쓰여 있는 글자를 읽는다고 해도 과연 그게 진짜 아름다운지 우리가 느낄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직접 강변으로 나가 햇살 아래 반짝반짝 빛나는 모래를 보고, 그 까슬까슬한 감촉을 느껴보면 그제야 그 아름다움이 내 것이 되는 거죠. 한마디로 책과 길이 하나가 되어야 진정한 내 것이 되는 거예요.


하지만 길을 나선다고 해서 모두가 그 길에서 답을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제가 늘 강조하는 걷기 여행에서 지켜야 할 세 가지가 있어요. 아무렇게나 먹고, 아무렇게나 자고, 바라보는 모든 것에 경탄할 것. 경탄할 줄 알아야해요. <지상의 양식>에 보면 “그대들의 눈에 비치는 사물들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바라보는 모든 것에 경탄하는 사람이다”라는 문구가 나와요. 우리가 보고 느끼고 경탄했던 것들은 절대 잊어버릴 수가 없어요. 내 안에 각인이 되는 거죠.


뇌를 깨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 여행을 통해 많은 것들을 경탄해야 해요. 조선의 유학자 서경덕은 아름다운 경치를 만날 때 덩실덩실 춤을 췄고, 매월당 김시습 선생은 주저앉아서 막 통곡을 했다고 해요. 어떤 아름다운 경치를 보다 보면 여한이 없잖아요. 무아지경에 빠지는 거예요. 그런 경탄이 반복되고 그것들이 쌓여서 모두 내 것으로 체화되는 거죠. 길에서 만난 모든 순간을 기적이라 여기고 보면 아마 매 순간이 새로울 거예요.

사단법인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를 만들어 많은 사람과 함께 걷고 계신데, 혼자 걷기와 함께 걷기의 매력은 각각 무엇일까요?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걷기’는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단체 중 하나죠. 어딜 가든 역사 유적과 문화 유적을 답사하고 배우며 걸어요. 인문학 걷기라고 하면 진지하고 따분할 거라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연 속에서는 진지할 필요 없어요. 그저 자연에 동화되어야죠.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다 떨어지잖아요. 그럼 낙엽이 소복히 쌓인 곳에 모두 눕자고 해서 나뭇잎 이불을 덮어주죠. 낙엽 방석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고요. 벚꽃이 만개한 봄날에는 향긋한 꽃 방석에 앉아서 잔을 앞에 두고 바람결에 떨어지는 꽃잎을 띄워 술 한잔 나누기도 해요. 같이 걸으면 그런 재미가 있죠. 저는 늘 공부는 연애하듯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슴 설레게 말이죠. 그래야 인생을 살아가는 내내 자양분이 됩니다.

노년을 준비하며 도보 여행을 시작해보려는 중년들에게 조언을 한다면요?

<동의보감>에서 허준 선생이 말하길 “약보보다 식보가 낫고, 식보보다 행보가 낫다”라고 했어요. 약보다는 밥이 보약이고, 그보다 더 좋은 보약이 걷는 것이란 말이죠. 그리고 다산 선생은 걷기를 ‘맑은 청복’이라 했죠. 맑은 즐거움, 그렇게 경쾌한 것이 없는 거죠.


한마디로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영위하는 데 걷기가 큰 도움이 된다는 거예요. 저 역시 1954년생인데, 평생을 쉬지 않고 걸은 덕분인지 몰라도 큰 병치레 한번 없이 무탈해요. 다른 사람들은 걷다가, 등산하다가 다치기도 한다는데 자잘한 부상 없이 40대 때나 지금이나 기세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많은 분이 용재 성현 선생의 말을 명심했으면 좋겠어요. “산다는 것은 떠돈다는 것이고, 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다.” 죽기 싫으면 일단 걸어보세요.

작가님 이야기를 들으니 일단 어디라도 걸으러 가고 싶네요. 요즘 특히 걷기 좋은 코스가 있을까요?

낙동강 석포에서 안동 도산서원까지 이르는 퇴계오솔길이 참 예뻐요. 한 사나흘 걸리는 길인데, 정말 조용하고 한적해서 한나절을 걸어도 만날 사람도, 말 물어볼 사람도 없을 거예요.


한겨울 추울 때는 한탄강이 좋아요. 깊은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강이 단단하게 얼어버리는데, 그 위를 사각사각 걸으면 기가 막혀요. 회원들이 춥다고 웅크리고 포기하려고 하면 영국 시인 피터 비에렉의 ‘눈 위의 산보’ 중 한 소절을 열 번 외치자고 하죠. “나는 냉담하지 않아, 내 속은 온통 따뜻해.” 그럼 몸이 후끈후끈 달아올라 하나도 안 추워요.


눈이 내리는 날에는 김제 호남평야를 걸어도 좋아요. 마치 망망한 만주 벌판을 걸어가는 것 같아요. 그리고 부산에서 통일전망대까지, 탁 트인 수평선을 바라보며 걷는 해파랑 길은 언제 걸어도 아름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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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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