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째 단 한줄로 우리 지갑을 여는 남자
‘진심이 짓는다’ ‘의자가 인생을 바꾼다’ 등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는 카피라이터
TBWA Korea 유병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광고를 만난다. 길이나 지하철, TV와 스마트폰 속에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매일 광고를 접하다보면 기억에 남는 장면, 모델, 음악, 문장이 생긴다. 광고엔 소비자의 지갑을 열기 위한 다양한 장치가 숨어 있다. 그 중 하나가 광고 문구다. 광고에 나온 한 줄의 문장이 유행어처럼 번질 때도 있다. 한 줄의 문장이 브랜드나 제품을 기억하게 만들고 결국 지갑을 연다. T
BWA 코리아 유병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CD)는 20년째 이런 광고 문구를 쓰는 카피라이터(Copywriter)다. 지금껏 시디즈 ‘의자가 인생을 바꾼다’, e편한세상 ‘진심이 짓는다’, 비타500 ‘착한 드링크’, ABC마트 ‘세상의 모든 신발’, 겔포스 ‘겔의 포스가 함께하길’ 등의 광고와 SBS의 슬로건 ‘함께 만드는 기쁨’을 작업했다. 유병욱 CD에게 카피라이터의 세계에 대해 물었다.
TBWA 코리아 유병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유병욱 제공 |
-카피라이터는 어떤 일을 하나요?
“카피라이터 하면 한 문장을 쓴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광고에 들어가는 모든 말과 글을 만드는 사람이에요. 카피는 문장일 때도 있고 대화일 수도 있어요. 나레이션이나 대사일 때도 있습니다. 광고에 나오는 모든 형태의 글을 쓰고 책임지는 게 카피라이터의 일이에요. 그렇다고 글만 쓰진 않습니다. 광고주나 광고 기획자, 아트디렉터 등과 의견을 나누고 광고에 필요한 영상, 그래픽에 대한 아이디어도 내고 광고 모델도 제안합니다. 광고를 완성하기 위한 모든 과정에 카피라이터가 있어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역할은 뭔가요?
“CD는 광고 제작을 총괄하는 책임자입니다. 대체로 경력이 충분히 쌓인 카피라이터 또는 아트디렉터가 CD가 됩니다. 기획·마케팅 업무를 하는 AE(Account Executive)와 카피라이터, 아트디렉터들과 함께 광고의 방향성을 잡고 실제 제작물을 만는 모든 과정을 진두지휘해요. 대표로 PT도 합니다. 필요한 경우 직접 카피를 쓰기도 하고요. CD라고 무기를 놀릴 필요는 없으니까요.”
-왜 카피라이터란 직업을 선택했나요?
“학창시절 글짓기, 논술대회에서 상을 자주 받았어요. 자연스레 글 쓰는 일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글을 쓰거나 생각을 하면서 돈을 버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카피라이터와 다큐멘터리 감독, 라디오 피디, 스포츠 기자… 막연하게 나열했던 꿈 중 하나가 카피라이터였어요. 대학을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직업에 대해 고민했고 카피라이터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카피라이터는 감각적이면서 센스 있는 일을 하는 직업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드라마나 영화에서 카피라이터가 멋있게 나오기도 했고요. 카피라이터를 꿈꾸면서 책과 자료도 열심히 찾아보고 광고 회사에서 인턴도 했습니다. 2002년 졸업하자마자 카피라이터 일을 시작했습니다.”
비타500 ‘착한 드링크’ 광고도 유병욱 CD가 만들었다. /비타500 CF 캡처 |
-카피라이터가 되려면 글을 잘 쓰는 게 중요하겠죠?
“카피라이터에게 문장력은 기본이죠. 글쓰는 재능이 필요해요. 그렇다고 재능만 있어선 안 됩니다. 지적인 호기심이 많아야 해요. 저건 왜 저럴까, 저 사람은 왜 그럴까 계속 궁금해하고 의문을 가져야 해요. 그래야 참신한 카피가 나옵니다. 대중 문화에도 관심을 갖고 세상의 변화를 다양하게 경험해야 해요. 끈기도 필요하고요.”
-카피라이터가 되는 건 어렵나요?
“사실상 어려워요. 신입을 잘 안 뽑으니까요. 제일기획이나 HS애드, 대홍기획 같은 대형 광고회사에서도 카피라이터는 1년에 10명을 뽑을까말까예요. 제가 일하는 TBWA 코리아도 1년에 1~2명을 뽑고요. 최근엔 경력 있는 친구들이 신입으로 지원하고 있어요. 점점 진짜 신입은 취업하기가 힘듭니다. 신입보다는 경력 채용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다면 작은 광고회사나 제작사 등에서라도 일하며 경력을 쌓는 게 좋습니다.”
크레딧잡에 나온 주요 광고회사 신입 초임 연봉은 3500~4000만원이다. 크레딧잡은 국민연금에서 제공받은 정보를 기반으로 전국 42만개 기업의 업력과 사원수, 연봉 정보를 제공한다. 연봉은 회사가 내는 국민연금 납부액을 기준으로 집계한다. 차·부장급 이상인 CD는 7000만원에서 최대 1억4000만원의 연봉을 받는다. TBWA 코리아의 평균 연봉은 5659만원이다.
-카피라이터가 일하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먼저 광고주에게 광고 제작 의뢰가 들어옵니다. AE가 광고주와 함께 광고의 방향을 정하고 언제까지 어떤 광고를 만들어달라고 해요. 해당 브랜드를 조사하고 시장 트렌드와 경쟁사를 분석해 광고 문구와 디자인을 만듭니다. 카피라이터가 광고 문구를 만드는 시간은 짧게는 3일, 길게는 2~3주 정도예요. 문구가 정해지면 아트디렉터와 그래픽, 영상, 음악, 모델 등을 상의하고 결정해요. 수많은 회의와 수정을 거쳐 광고를 완성합니다.”
유병욱 CD가 카피를 쓴 e편한세상 ‘진심이 짓는다’와 시디즈의 ‘의자가 인생을 바꾼다’. /각 광고 캡처 |
-처음 썼던 카피 기억하나요?
“‘중년의 건강 안녕하십니까’. 비뇨기과 광고 문구였어요. 내가 쓴 문장이 광고로 나온다는 게 너무 신기해서 광고 지면을 오려두기도 했죠 제가 카피라이터가 됐다는 그 자체가 좋고 신기했던 시절이에요.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공들여 만든 카피가 세상에 나올 땐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진심이 짓는다’ ‘의자가 인생을 바꾼다’...이런 카피의 영감은 어디서 얻나요?
“메모를 자주 해요. 지하철 타고 출퇴근을 하다가, 길을 걷다가 떠오르는 문장이나 발견한 단어를 스마트폰 메모장에 적어두곤 해요. 그렇게 모아둔 단어와 문장을 필요할 때 꺼내요. 새롭게 조합하고 문장을 구축하죠. 영감만으론 좋은 문장을 쓰기 힘들어요. 평소에 만들어둔 저만의 아카이브가 도움을 줍니다.”
-CD님이 생각하는 좋은 카피는 무엇인가요?
카피의 핵심은 문제 해결이에요. 기업이나 브랜드가 제시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야 해요. 기업 브랜드가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담아야 합니다. 그걸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한 게 좋은 카피라고 생각해요. 광고 문구도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뻔한 문장, 단어 대신 시간을 들여 조금 더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게 필요합니다.
-직접 쓴 카피 중에 기억에 남는 카피를 꼽아주신다면?
"시디즈에서 만든 아이를 위한 의자 링고에 쓴 문구예요. '엄마 무릎에 앉던 아이가 스스로 의자에 앉기 시작한다는 건/ 뛰어놀던 아이가 생각으로 놀기 시작한다는 것/ 답을 묻던 아이가 답을 찾기 시작한다는 것/ 그래서 좋은 의자가 필요합니다/ 생각하는 힘은 앉아있는 시간만큼 자라니까요/ 의자가 인생을 바꾼다/생각하는 힘을 키워주는 의자' 광고 반응도 좋았고 저도 마음에 들고 기억에 남는 카피예요. 최근에 쓴 상조회사 예다함의 광고 문구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3일, 그 곁에 누가 있습니까' 장례지도사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메모로 가득한 유병욱 CD의 책상. /유병욱 제공 |
-카피를 쓰는 방식이나 습관이 있나요?
“저는 카피를 연필로 써요. 카피를 쓰기 전 연필을 깎는 게 일종의 의식 같기도 해요. 머리에 있던 문장이 글로 나오는 과정, 그 느낌을 좋아해요. 연필로 쓰면 그게 확실히 느껴져서 좋아요. 카피용 노트를 펼치고 한 장을 채우는 사이 보통 카피가 완성됩니다. 10년이 넘게 훈련한 결과예요. 유난히 카피가 안 나오는 날도 있어요. 그럴 땐 장소나 시간을 바꿔 써봐요. 도저히 안되겠다 싶을 땐 다음 날로 넘깁니다. 같은 자리에서 오래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카피라이터로 일하면서 힘들 때는 언제인가요?
“신입 시절이 가장 힘들었어요. 내가 못한다는 느낌을 계속 받았거든요. 글이라면 자신 있었는데 아트디렉터 선배가 저보다 더 잘 쓰는 걸 보면서 재능이 없다는 생각도 했어요. 6~7년차쯤 되고 일이 익숙해지고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괜찮아지더라고요. 그러다 작년 말부터 올해 초 일이 몰리면서 힘든 시기를 보냈어요. 코로나로 올스톱 상태였던 광고가 한번에 몰려들기도 했고 광고 방식도 더 다양해지면서 일이 정말 많아졌어요. 경쟁 PT를 할일도 많아졌고요. 일과 생활 밸런스가 무너지면서 번아웃 직전까지 갔다온 것 같아요.”
-반대로 뿌듯할 때는요?
“카피에 대한 반응을 느낄 때입니다. 카피가 유행어가 되거나 광고 음악을 따라하는 사람들을 볼 때 뿌듯해요. 가끔 카피라이터를 꿈꾸는 친구들이 제 카피를 필사했다고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보람을 느끼죠. 그래도 가장 뿌듯할 땐 광고의 메시지를 잘 전달하고 계획했던 목표를 달성했을 때입니다.”
TBWA 코리아 유병욱 CD. /컨셉진 제공 |
-올해로 카피라이터로 일한 지 19년째인데, 오랫동안 이 일을 하는 원동력은 뭔가요?
“광고 일이 저랑 잘 맞아요. 내 생각이 문장으로 빠져나오는 과정이 좋아요. 그렇게 나온 문장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게 매력적이고요. 광고는 매번 다른 클라이언트를 만나 새로운 걸 만들잖아요. 이번엔 여행 다음엔 은행, 매트리스, 보험…. 새로운 회사, 제품을 만나요. 지루할 틈이 없어서 오래 일할 수 있는 것 같아요.”
-20년차 카피라이터면서 3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카피라이터 일만으로도 바쁠 텐데 꾸준히 책을 쓰는 이유가 있나요?
“TBWA 코리아 직원 중에 책을 쓴 작가들이 많습니다. 박웅현 CCO님이 대표적이죠. 제게도 책을 써보라고 권하셨어요. 목차라도 한번 써보라고 해서 써봤는데 그러고 나니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렇게 첫 책 ‘생각의 기쁨’을 썼습니다. 책에 대한 피드백을 받으니 기분이 좋았어요. 책은 모두 제 글이니까요. 사실 카피는 제가 아무리 잘 써도 광고주의 생각이 들어가서 완전한 제 글은 아니잖아요. 두번째 책은 그 경험 덕에 좀 더 쉽게 쓸 수 있었어요. 최근엔 세번째 책 ‘없던 오늘’을 냈어요. 카피라이터의 시선으로 들여다본 코로나 이후 시대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예요. 8개월 동안 원고를 썼습니다. 코로나로 카페도 마음대로 갈 수 없으니 차 조수석에 간이 테이블을 두고 작업했어요. 힘들었지만 책이 나오니 만족스럽습니다. 카피라이터는 메시지를 전하는 직업이고 책은 저만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채널이라고 생각해요. 일과는 별개로 제 생각을 정리하고 책을 쓰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좋고 즐겁습니다.”
-코로나 이후 카피라이터가 일하는 방식이나 카피의 방향도 바뀌었나요?
“광고는 시대를 반영합니다. 아무래도 코로나 이후엔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상처받을 수 있는 메시지를 지양하고 있어요. 광고가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상처 주지 않도록 카피를 쓸 때도 여러 번 확인하고 고민합니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진정성이 중요해졌어요. 앞에서 ‘척’하는 건 더이상 통하지 않아요. 기업들도 메시지를 진정성 쪽으로 바꾸고 있어요. 자극적이고 센 것보다 진짜를 보여주는 게 중요해졌어요. 카피를 쓰는 작업은 혼자 하는 거라 크게 달라진 게 없어요. 하지만 회의 방식은 많이 바뀌었죠. 화상 회의가 많아졌어요. 얼굴을 직접 보고 회의를 하다보면 상대방이 내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금방 알 수 있잖아요.화상으로는 그게 느껴지지 않아서 금방 끝낼 회의도 오래 하게 되더라고요. 가끔은 소통이 아니라 혼자 얘기하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PT도 종종 온라인으로 합니다. 모두가 마스크를 낀 채로 경쟁 PT를 하는 모습도 낯설었는데 이제는 익숙해졌어요.”
-책에선 꼰대가 되고 싶지 않은 시니어 직장인의 고민도 느껴집니다. 후배들과 소통하는 CD님만의 팁은요?
“지금 우리팀 5명 중 3명이 90년대 생이에요. 나이도 연차도 15년 이상 차이가 나요. 그들과 소통하려면 제 말은 줄이고 들어줘야 해요. 선배라고 조언을 하지 않아요. 후배들이 물어왔을 때 답을 주면 됩니다. 세대 차이는 어느 시대나 세대에나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거대한 차이가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오히려 기성 세대가 그걸 신경쓰고 있는 것 같아요. 여기선 글을 쓰는 공통점이 있고 같은 일을 하잖아요. 세계관이나 취향이 맞으면 할 얘기가 많아집니다. 오히려 기성 세대들이 후배들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내가 선배라서, 내가 부장이라서 이런 위계 질서를 무시하는 순간 자유로워집니다. 후배들도 그런 선배를 편하게 대하고요.”
Q.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 목표가 있다면?
“이제는 누구나 자기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대예요.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할 채널이 많아졌잖아요. 저는 카피로, 또 3권의 책으로 제 메시지를 전달했어요. 저만의 채널로 제가 앞으로도 계속 많은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광고인으로도 잘하고 싶어요.”
글 CCBB 키코에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