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럽 국가가 되어가는 한국?
Summary
- 환율 상승에도 쌓여만 가는 무역적자
- 유로존 가입으로 쾌속 성장 기록했다가 재정위기 맞은 남유럽 국가들
- 남유럽국과 달리 경제 위기 때 환율 효과로 수출 호재 누렸던 한국
- 제조업 생산 기반을 해외로 옮기는 추세가 지속된다면 남유럽의 전철 밟을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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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이 무너지는 걸까요? 환율이 상승하면 수출 기업들의 국제 경쟁력이 높아져 수출이 늘어야 하는데, 최근 상황은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1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1400원까지 넘보는 상황에서 무역수지 적자가 5개월 이상 지속됐습니다. 과거 20여 년동안 국내 물가가 치솟더라도 수출 호조를 통해 위안을 삼았으나, 이 상황이 펼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10년 넘게 재정위기와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유럽 국가들처럼 우리도 장기 불황을 겪게 되는 게 아닐까요? 일단 남유럽 재정위기를 살펴보고 한국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봅시다.
남유럽 재정위기는 왜? 유로화를 사용하는 경제공동체 ‘유로존’에 속해 있지만 10년 넘게 위기를 겪고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리스와 스페인 등 소위 남유럽 국가에 속하는 나라들입니다. 정부 빚 증가에 따라 초래된 위기인지라 ‘남유럽 재정위기’로까지 불립니다.
그리스와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 남유럽 국가 경제가 최근 10년간 ‘겔겔’되고 있다지만, 이들이 속한 시장은 꽤 큽니다. 총 인구 5억 명의 유럽연합(EU) 시장은 우리 경제 규모의 10배에 달합니다.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하고 있지만, 이들보다 훨씬 작은 나라들도 속해있죠. 내수 시장이 작아 수출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툭하면 중국이나 일본 등 거대 주변 나라로부터 무역 보복을 당해야 하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남유럽이 부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유로존 국가 © 위키피디아
독일, 프랑스 등 든든한 이웃을 둔 덕분에 남유럽 국가들은 여러 호재를 맛보기도 했습니다. 2000년대 유로화에 대한 국제적 신뢰가 높았고, 싼 이자로 국채를 발행할 수 있었습니다. 예컨대 그리스는 우리나라보다 경제 규모도 작고 신용등급도 낮았지만, 유로존 국가라는 이유 하나로 더 싼 이자를 주고 빚을 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지는요.
돈을 빌리기 쉽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바로 채무 부담이 빠르게 증가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금리가 낮을 때 가계대출이 ‘훅’ 늘어나는 것처럼요. 금리가 떨어지면 대출을 받아 집을 사는 것처럼 남유럽 국가들도 부동산을 비롯한 관광자원 등에 투자를 했습니다. 빚을 내 한 투자였지만, 2000년대 남유럽 국가들은 쾌속성장을 기록했습니다.
실제로 그리스는 2001년 유로존에 가입하면서 국운이 크게 상승했습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국민 소득도 높아졌습니다. 2006년 그리스 성장률은 4.4%에 이릅니다. 1980년대 암흑기를 충분히 잊게 할 정도였습니다.
사실 2000년대는 세계 경제가 대체적으로 좋았던 때입니다. 인터넷 정보 산업이 성장했고,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중국이 싼값에 공산품을 내다 팔고 있었죠. 미국 등 선진국들은 ‘저물가·고성장’이라는 전무후무한 상황까지 맞았습니다. 고속 성장하는 중국에 한국 경제도 부지런히 수출을 하면서 준수한 성장을 했습니다.
관광으로 먹고사는 남유럽 국가의 수입도 늘어납니다. 경기가 호황인데다 관광객이 몰려들자 관광시설에 대한 투자가 늘고 부동산 가격도 상승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로존 가입의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었습니다.
양날의 검이 된 단일 통화 유로화 앞서 살펴보았다시피 ‘호황’과 ‘불황’은 주기적으로 옵니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 호황도, 영원한 불황도 없는 것이죠.
남유럽 국가들의 위기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함께 왔습니다. 굴지의 은행이 망하는 상황에 미국 정부가 수조 달러의 돈을 들여 경기를 살려야 할 상황이 된 것이었죠.
독일 정치 사회학자이자 프랑크푸르트학파 2세대 격인 ‘클라우스 오페’가 지은 『덫에 걸린 유럽: 유럽연합, 이중의 덫에 빠지다』 책에서 오페는 ‘미국에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로존 내 내부 모순’이 합쳐져 유로존 위기를 키웠다고 해석했습니다.
실제 유럽연합 내 실물경기가 위축되고, 채권자들이 급거 자금 회수에 들어가면서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은 부채 압박에 시달립니다. 관광객이 줄고 자산 가치가 하락하면서 은행은 부실화됩니다.
은행의 부실화는 해당 국가의 경제 위기 신호로 비칩니다. 더불어 그 나라의 통화 가치는 떨어지게 됩니다. 아무도 그 나라 통화 자산에 투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죠.
이때 환율 메커니즘이 작동합니다. 통화 가치가 떨어지게 되면 수입 물가는 오르지만 수출 가격은 떨어지게 됩니다. 이는 수출 경쟁력 향상으로 이어지고 수출 기업들은 더 많은 외화를 획득하게 됩니다. 국부가 쌓이게 되면서 빚도 갚고 새롭게 투자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는 것이죠. 우리나라가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빨리 졸업할 수 있었던 비결도 환율 상승에 따른 수출 가격 경쟁력 향상 효과가 컸습니다.
그런데 유로존 단일 통화 ‘유로화’를 사용하는 그리스는 이 같은 메커니즘을 기대하기 힘들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라는 경제대국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유로존의 가치 하락을 기대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는 수출 경쟁력 향상도, 이에 따른 외화 획득도 기대하기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오페가 말한 ‘유로존 내 내부 모순’의 한 모습입니다.
외부에서 돈을 벌어오지 못하니 그리스 정부 홀로 빚 갚기는 더 힘들어졌습니다. 구제금융을 받았음에도 나라 경제는 회복하기 어려웠습니다. 10년 넘어 최근까지도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은 ‘유로존의 열등생’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 국채 10년물 수익률, 그래프가 높을수록 국채가 가치 없다는 뜻 © 인베스팅닷컴
게다가 유럽중앙은행이 그리스의 중앙은행 역할을 맡다 보니, 그리스 혼자 기준금리를 낮추거나 통화 발행량을 늘리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리스 정부와 국민들은 한때 국가부도 위기까지 겪었고, 유로존 탈퇴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였습니다.
단일통화 이점 누렸던 한국경제 한국은 어떨까요?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한국은 원화라는 단일통화를 사용한다는 점이죠. 국제 공신력도 꽤 높은 편입니다. 물론 개발도상국 통화와 비교했을 때만이긴 합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한국은 위기에 빠질 때마다 환율이 ‘조정타’ 역할을 해줬습니다. 환율 급등(원화 가치 하락)은 국가 경제의 위기를 의미하는 동시에 수출 기업들에게는 호재였습니다. 한국 상품의 달러 표기 가격이 싸지면서 그만큼 수출을 많이 할 수 있었으니까요. 1997년 말 외환보유액이 36억 달러에 불과했던 한국이 2000년대 들어 2000억 달러 넘게 외환보유고를 쌓을 수 있던 배경이기도 합니다.
이 같은 환율 메커니즘이 작동할 수 있던 비결은 한국이 보유한 제조업 역량에 있습니다. 2000년대 정보화 혁명 시기 한국은 제조업 덕분에 휴대폰과 반도체 등 고부가가치 상품을 만들어 팔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같은 환율 효과를 크게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유 등 국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한 이유도 있지만, 제조업 공동화의 영향이 크기 때문입니다. 기업들이 수출은 ‘우리나라에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해외에서 직접 생산해 직접 파는 상황’이 일반화됐습니다.
한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나라의 대표적 수출 기업인 현대자동차가 최근 발표한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해외 생산량이 국내 생산량을 앞질렀습니다. 2009년 당시 국내 생산량은 160만 대였고, 미국·인도·터키·체코 4개 공장의 총 생산량이 92만 대 정도였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이후 러시아와 브라질에 새 공장을 설립하면서 해외 현지 생산량을 꾸준히 늘려왔습니다. 지난해 기준 해외 생산량은 185만 대를 기록했지만, 국내 생산량은 제자리걸음이었습니다.
미국을 필두로 한 자국 중심주의 확산에 따라 이 같은 해외직접투자와 생산은 더욱 늘 전망입니다. 한국수출입은행의 해외직접투자 통계에 따르면 2022년 1분기 우리나라 해외직접투자액(총투자 기준)은 전년 동기(113억 5000만 달러) 대비 123.9% 증가한 254억 달러를 기록했습니다. 투자 지역은 북미(93억 5000만 달러)와 아시아(69억 5000만 달러)가 중심입니다.
주요 지역별 해외직접투자 추이(단위: 백만 달러)
구분 |
2019년 |
2020년 |
2021년 |
2021.1Q |
2022.1Q |
증감률 |
|
북미 |
16,979 |
18,121 |
30,533 |
4,559 |
9,349 |
105.1% |
|
아시아 |
20,583 |
18,355 |
18,386 |
2,668 |
6,952 |
160.6% |
|
유럽 |
14,465 |
10,310 |
12,347 |
2,121 |
5,901 |
178.2% |
|
중남미 |
10,836 |
8,216 |
12,982 |
1,651 |
2,649 |
60.5% |
|
총투자액 |
65,073 |
57,299 |
76,446 |
11,345 |
25,404 |
123.9% |
© 수출입은행
이 같은 추세가 몇 년간 계속된다면, 더 이상 한국을 제조업 수출 강국이라고 보기 힘들어질 것입니다. 수출할 게 없었던 남유럽 국가와 다를 게 없어지는 셈이죠.
달라진 한국경제의 현실 지금까지 우리 언론은 남유럽 국가들의 방만한 재정 운영을 비판했습니다. 과도한 복지가 그들 나라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겁니다. 이는 초고령화 국가인 남유럽국들의 은퇴 계층이 두터운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는 어떨까요? 한국 정부의 부채는 급속히 올라 GDP의 절반(2021년 기준 47%) 수준에 육박했습니다. 일본 등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 보면 안정적이라고 하지만 결코 안심할 수 없습니다. 한국은 노령화 속도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빠릅니다. 10년 뒤를 안심할 수 없다는 뜻이죠. 초저출산에 따른 생산가능연령인구의 급격한 감소까지 겹치면 정부 재정적자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정부의 재정 악화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지난 2000년대 한국 경제의 성장을 도왔던 중국 시장도 이젠 달라졌습니다. 중국의 기술력이 높아지고 자체 생산력이 고도화되면서 한국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확실히 줄었습니다. 휴대폰은 물론 반도체 등 고부가가치 산업에서도 한국 기업들은 중국 기업과 힘겨운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자신 있게 내다 팔 물건이 줄어들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남유럽 국가와 닮은꼴 될지도 최근 무역수지 적자 상황을 일시적인 악재 정도로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과거처럼 ‘환율이 오르면 수출 기업은 좋겠다’라고 생각하기 어려워졌죠.
오히려 우리가 남유럽 국가들의 상황에 봉착할 수도 있다고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국내 제조업 공동화, 저출산과 인구 고령화, 후발 국가의 부상 등에 따라 우리 경제는 20여 년 전과 같은 회복 탄력성을 보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불황이 계속되는 것이죠.
다만 국내 기업들의 글로벌화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전됐고, 콘텐츠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문화산업이 전 세계적으로 성장했다는 점은 위안 삼을 만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해외에 팔 게’ 없다면 위기 상황 시 우리 경제는 주저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 정부와 기업은 국내 제조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고안하고, 관광상품 등 우리가 수출할 수 있는 새로운 먹거리를 개발해야 하는 것이죠. 다가올 고령화 사회에 대비한 국가경쟁력 제고 정책도 체계적으로 준비 해야 합니다. 현 정부에 기대하는 역량의 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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