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세 노장의 도전 “그림으로 죽겠구나!”
황규백 작가 가나아트센터 개인전
황규백 작가가 12일 오후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개인전 간담회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신지후 기자 |
87세 노장도 작품과의 이별은 여전히 아프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전시를 위해 지난해 그린 작품들을 화실에서 미술관으로 보낸 직후였어요. 며칠 간 몸에 힘이 죽 빠지더라고요. 기운이 하도 없어서 병원까지 찾아갔죠.” 그렇게 절절하게 자신의 업(業)을 사랑하는 작가, 황규백. ‘메조틴트 판화’(색과 선을 부드럽고 예리하게 표현하는 동판화)로 업을 높이 쌓아 올린 그는 지난해 새로운 도전에 몰두했다. ‘회화’로만 한 해를 채우는 일이었다. 꼬박 1년간 매일 아침 6, 7시부터 늦은 오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농익은 열정으로 그린 아크릴 유화 20점을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열리는 개인전에서 선보이고 있다.
노장의 그림이라고 예스럽기만 할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황 화백의 회화 세계는 서정적이고 섬세하며 천진난만하다. 자줏빛 가운과 노란 나비, 둥글둥글 백조, 금빛 수가 놓여진 테이블보 같은 따뜻한 오브제가 캔버스를 채운다. 딱딱한 벽돌집엔 어김없이 넓은 창문이 나 있고, 창문 너머로 푸릇한 잎들이 보인다. 그가 그리는 밤은 환한 달빛으로 따스한 밤이다. 그의 상상 속에서 생성되고 조합된 풍경과 오브제들이다. 얼마 전 만난 황 화백의 말. “실은 체력이 달려서 회화를 시작했는데, 판화 작업 때보다 몇 배 더 즐거웠어요. 판화에선 세밀할 수 없는 사물의 모습을 페인팅을 통해 더 충실하게 그렸어요.”
황규백 작가의 작품 '달과 백조(Moon and Swan)'와 '나무와 나비들(A Tree and butterflies)'. 가나아트 제공 |
판화가로서 황 화백의 성공도 ‘천진난만함’ 덕분이었다. 그는 1968년 더 넓은 세상을 찾아 프랑스로 떠났고, ‘손수건’을 모티브로 한 메조틴트 판화로 1970년대 미국, 유럽 등에서 이름을 알렸다. 손수건 판화가 탄생한 사연은 이렇다. 프랑스에서 미국 뉴욕으로 옮긴 직후인 1970년쯤, 그는 맨해튼 공원 잔디밭에 누워 ‘예술가로서 먹고 살 길’을 궁리했다. 장난스러운 마음으로 손수건을 꺼내 하늘에 대 봤다.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이거다 싶더라고요. 마음 속에서 손수건 네 모퉁이에 못을 박았어요. 그 상상을 작은 판화로 작업했는데, 많은 화랑에서 관심을 가져줬어요.” 황 화백의 판화는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영국 빅토리아앤알버트박물관 등에 소장돼 있다.
황 화백의 서정성은 회화에서 더 따사롭게 피어났다. 살바도르 달리 같은 20세기 초현실주의자들의 작품과도 닮아 있다. 황 화백이 서정에 마음을 쏟는 건 평화를 염원해서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그는 6ㆍ25 전쟁에 참전해 3년간 참상을 목격했다. 그 때 입은 상처를 “늘 예쁘고 행복한 것들을 그리자”는 마음으로 달랬다. 이번 전시에 나온 ‘남북회담(South and North summit)’은 지난해 4월 남북 정상회담을 지켜 본 감격을 그린 것이다. 벽돌 집 창문 밖으로 푸른빛 판문점 도보다리가 펼쳐진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단독회담을 한 그 다리다. 도보다리는 비극이라고는 모르는 듯한 천연한 색감이다.
황규백 작가의 신작 '남북회담(South and North summitㆍ왼쪽)’과 '의자와 우산(Chair and Unpella)'. 가나아트 제공 |
황 화백의 그림엔 인물 대신 우산이 주연으로 자주 나온다. 대부분 접어 세워 둔 긴 우산이다. 일자로 곧게 뻗은 우산은 당당해 보이다가도, 그림자를 드리우고 벽에 우두커니 기대어 있는 모습이 어쩐지 쓸쓸하다. “평생 외로움을 달고 산다”는 황 화백은 “인간은 우산을 닮았다”고 했다. “외롭지만 떳떳하려고 애쓰는 우산의 모습이 인간을 빼 닮았어요. 인물이 그림 분위기를 확 깰까 봐 대신 우산을 그립니다.”
황규백 작가와 그의 작업실. 가나아트 제공 |
황 화백은 2000년쯤 영구 귀국했다. 그는 요즘도 매일을 작품 속에서, 작품들과 산다. 서울 방배동 작업실은 거대한 작품이다. 벽과 천장을 그림으로 채웠다. 천장에는 구름과 하늘을, 벽에는 유럽 성당 풍의 기둥을 그렸다. 그 위에 판화, 유화를 걸어 ‘작품 속 작품’을 만든다. “밖에 나가지 않아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그림을 그립니다. 하루 종일 쳐다보고 있어도 지루할 틈이 없어요. 매일 생각하죠. 아, 나는 그림으로 살다가 그림으로 죽겠구나!”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이후 4년 만에 여는 이번 전시는 3월10일까지 열린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