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78년째 변함없는 국물맛과 인심으로 '해장국'에 진심인 곳
<63> '청주 남주동해장국'
청주 남주동해장국 김미숙(오른쪽) 사장과 며느리 한수정씨가 13일 오후 주방에서 일을 하던 도중 잠시 짬을 내 카메라 앞에 섰다. 육아중인 한씨는 짬나는 대로 식당일을 돕고 있다. |
충북 청주는 예로부터 우시장이 유명했다. 경기 수원, 경북 의성과 더불어 전국 3대 시장으로 꼽혔다. 영호남과 경기도 사이에 자리한 내륙 한복판의 쇠전에는 장날이면 소몰이꾼과 장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우시장이 열리는 곳엔 으레 해장국집이 생기기 마련. 우골·양·선지 등 소고기 부산물로 푹 끓여낸 국밥 한 그릇은 장돌뱅이들의 속을 든든하게 채워줬다. 전국에서 몰려든 소장수들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며 위안을 삼던 것이 ‘해장국에 소주 한 잔’ 이었다.
청주 무심천변 남주동에 자리한 우시장도 그랬다. 쇠전거리에 푸줏간이 줄줄이 들어서더니, 여기서 식재료를 받은 해장국집이 속속 등장했다. 성업 중인 국밥 집만 수십 곳에 달하던 남주동 시장은 ‘해장국 거리’로 통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떠들썩하던 그 시절 해장국집들은 하나둘 사라졌다. 하지만 모두가 떠난 그 자리를 홀로 지키는 해장국집이 있다. 해방 전인 1943년 개업한 이래 78년째 한자리에서 영업 중인 ‘청주 남주동해장국’이 그곳이다.
김미숙 사장이 진하고 칼칼한 남주동해장국 국물 맛의 비법을 설명하고 있다. |
70년 된 테이블... 78년째 한자리에서 손님맞이
지난 13일 오후 4시 무렵 청주시 상당구 무심동로 남주동해장국집. 한산할 시간으로 예상하고 찾아간 식당은 붐볐다. 가족, 관광객으로 보이는 손님이 다섯 팀이나 됐다. 90㎡의 아담한 내부에서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흑백사진을 담은 벽걸이 액자. 빛바랜 사진 구석에 ‘1950년 청주 남주동해장국 우시장 모습’이라고 쓰여 있다. 주인 김미숙(63)씨는 “2대 주인인 시어머님이 6·25 때 피란 갔다가 돌아와 해장국 장사를 다시 시작할 당시의 남주동 우시장 풍경”이라고 설명했다.
오래된 가게임을 알려주는 남주동해장국집의 탁자와 의자. 해방 직후 조선 소나무로 제작됐다. |
액자 아래에 놓인 나무 탁자와 의자에서는 긴 시간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해방 직후 조선 소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70년을 훌쩍 넘긴, 두 벌의 골동품 탁자는 지금도 손님 식탁으로 쓰이고 있다. 그동안 집기를 현대식으로 다 바꿨지만, 이 식당의 역사나 다름없는 소나무 탁자·의자는 기념으로 남겨놓았단다.
주방 한편에선 여느 해장국집처럼 기본 육수와 장을 더한 해장국 육수를 담은 솥단지 2개가 쉼 없이 끓고 있다.
경기 성남에서 온 60대 부부 손님은 “옛 대통령 별장 청남대에 놀러 왔다가 대물림 맛집을 검색해 찾아왔다”며 “이렇게 국물 맛이 진한 선짓국은 처음”이라고 했다.
1950년 청주 우시장 풍경. 전국 3대 우시장으로 이름난 이 쇠전 주변엔 소고기 부산물을 이용한 해장국집이 즐비했다. 남주동해장국집 벽면에 이 사진을 담은 액자가 걸려 있다. 청주문화원 제공 |
남주동해장국집의 창업주는 1986년 91세로 작고한 이승호 할머니. 현 주인 김씨의 시어머니이자 2대 주인인 장경례(93)씨의 친정어머니다.
10년 발효 고추장이 맛의 비결
해장국이란 개념조차 낯설던 시절, 이 할머니는 특유의 진하고 얼큰한 국물을 개발해냈다. 맛의 비결은 숙성된 고추장이다. 이 고추장은 통마늘과 무, 깻잎 등을 박아 넣고 맛이 우러나도록 10여 년간 발효시킨 것이다. 오랜 시간을 거친 이 특별한 장이 소고기 육수와 만나면 칼칼하면서도 구수한 맛을 낸다.
할머니는 우시장에서 구해 온 소뼈에 근대를 넣고 장시간 팔팔 끓여서 육수를 만들고, 여기에 자신만의 고추장을 풀어 감칠맛을 살렸다. 이 맛에 이끌린 손님들이 간판도 없는, 딸과 함께 단둘이 운영하는 오두막 국밥집에 물밀 듯 밀려들었다. 남주동 시장통에 있는 이 집을 사람들은 ‘남주동해장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식당 이름은 그렇게 시나브로 굳어졌다.
24시간 끓고 있는 남주동해장국의 솥단지. 하나(왼쪽)는 소뼈를 끓인 기본 육수, 또 하나는 장을 더한 해장국 육수가 담겨 있다. |
세월은 가도 남주동해장국집은 정통 해장국만 고집하기로 평판이 나 있다. 1970년대 들어 해장국은 식재료가 다양해지며 다채롭게 분화한다. 콩나물, 북어, 황태, 올갱이, 뼈다귀 등 여러 가지로 개발됐다. 하지만 남주동해장국은 소고기 부산물만 줄곧 쓰고 있다. 그래서 메뉴도 소고기해장국, 선지해장국 등 단 두 가지뿐이다.
상차림도 단출하다. 주문이 들어오면 고기와 양, 선지 위에 파를 송송 올린 후 깍두기, 배추김치 반찬과 함께 낸다. 깍두기와 배추김치는 2, 3일 간격으로 담가 알맞게 익었을 때 낸다. 깍두기는 상큼한 맛이 한결같고, 배추김치는 약간 덜 익은 싱싱한 질감이 살아 있는 게 특징이다. 메뉴는 간단해도 해장국만큼은 풍성하기 그지없다. 소고기해장국에는 고기와 양이 넉넉히 들어가고, 선지해장국에는 잡내가 전혀 없고 식감이 탄탄한 선지가 가득하다.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른 메뉴는 없냐는 손님이 있어서 한때 돼지등뼈해장국을 시도한 적이 있다. 하지만 대다수 손님들로부터 ‘잘하는 걸 놔두고 다른 걸 왜 하냐’는 핀잔을 듣고선 바로 메뉴에서 빼버렸다고 한다.
단출한 선지해장국 상차림. 선짓국과 김치 깍두기가 전부다. |
이 집에는 국물 맛 말고도 변함없는 것이 또 있다. 푸짐한 인심이다. 창업주 이 할머니는 배고픈 이들에게 아낌없이 퍼주는 인심으로 유명했다. 이를 2대, 3대 주인이 그대로 넘겨받았다. 이들은 지금도 선지나 국물을 달라는 대로 맘껏 퍼준다. 할머니의 인심까지 대를 이은 셈이다. 전통 얘기가 나오자 김씨는 “우리 집에서 바뀐 게 있다면 바닥이 닳아 뚫어진 무쇠솥을 몇 차례 교체한 것뿐”이라고 했다.
'병든 소 사건'에 휘청... 재기... 4대 물림 중
남주동해장국도 한때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도한 적이 있다. 분점을 내달라는 친척들과 지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가맹점을 허용했다. 서울, 대전, 공주, 구미, 울산 등지에 분점이 20여 개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본연의 국물 맛을 유지하는 곳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1년여 만에 거의 모든 매장을 정리해버렸다. 지금은 좋은 재료를 쓰면서 국물 맛을 제대로 내는 구미 한 곳만 분점으로 운영 중이다.
해장국 명가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위기도 있었다. 10년 전인 2011년, 청주의 한 분점에서 불법 도축한 소 부산물을 사용하다 적발된 것이다. ‘병든 소 사건’이라 불린 이 일로 지역 사회가 들끓었다. “불법 도축된 줄 모르고 썼다”는 항변은 소용이 없었다. “병든 소고기를 팔았다” “주인이 교도소에 갔다”는 루머가 퍼지며 남주동해장국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지자체가 선정하는 ‘전통음식 대물림 맛집’ 자격이 박탈됐다. 6개월 후 재판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추락한 이미지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았다.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아예 문을 닫아버릴까 고민도 했어요. 하지만 비법을 물려주신 어머님과 단골손님들이 눈에 밟혀 그럴 수가 없었죠. 대대로 이어온 전통이 내 대에서 끊기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김씨는 다시 묵묵히 솥에 불을 땠고, 2018년 ‘백년가게’로 선정되는 등 옛 명성을 되찾았다. 김씨는 “그때 그 사건으로 인해 ‘전통이 사라지면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말을 새삼 되새기는 계기가 됐다”고 회고했다.
청주시 상당구 남주동시장통에 자리한 남주동해장국집. 도심 공동화로 대부분의 가게가 신도시로 떠나거나 영업을 접었지만, 남주동해장국집은 78년째 한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
현재 남주동해장국집은 4대 물림이 진행되고 있다. 김씨의 맏며느리인 한수정(33)씨가 비법을 전수받겠다고 나선 것이다. 요리를 좋아하는 한씨는 결혼 직후 집안 어른들께 “가업을 잇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힘든 일을 하겠다는 젊은이가 없는 세태에, 한씨의 결정은 가족들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한씨는 3년 전부터 시어머니 김씨로부터 해장국의 온도를 좌우하는 토렴 요령 등을 배우고 있다. 처음엔 뜨거워서 뚝배기 잡는 것조차 힘겨웠지만, 이제는 촉감으로 국의 온도를 짐작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왔다. 최근 육아에 전념하고 있는 그는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우고 나면 곧바로 해장국 비결인 숙성 고추장 제조법을 배울 참이다.
김씨는 집안 사업을 며느리와 함께할 수 있어서 힘이 난다고 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며느리는 청주 한씨, 저는 청주 김씨예요. 둘 다 본관이 청주랍니다. 청주 토박이 고부가 청주의 대표 음식인 남주동해장국을 지역의 소중한 문화 자산으로 키워보고 싶습니다.”
청주=글·사진 한덕동 기자 ddhan@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