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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나는 주인공은 옛말… 요즘 학원물이 달라진 이유

화제성 1위 MBC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

남녀 주인공이 ‘엑스트라’… ‘폼생폼사’ 학원물 관습 깨고 실험

“정해진 ‘주연’을 위해 살 뿐” 21세기 세습사회 반작용

한ㆍ일 대중문화 ‘소멸된 청소년’ 화두… 존재 불안 극심 반영

한국일보

“하루는 만화 속 설정 값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캐릭터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어요.” MBC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에서 주인공인 하루 역을 맡은 아이돌그룹 SF9 멤버 로운(사진 오른쪽)의 말이다. 하루는 만화를 배경으로 한 극에서 엑스트라로 나온다. 이름도 없다. MBC 제공

10년을 짝사랑만 했다. 부잣집 외동딸의 눈엔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소녀는 심장병을 앓고 있다. 순정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동적 소녀 캐릭터의 모습이다.


‘이 여고생이 주어진 운명을 벗어나 제 뜻대로 삶을 펼쳐간다면?’ MBC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어하루)는 도발적 상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드라마 속 인물들이 사는 세상은 만화다. 극중 인물은 작가가 준 역할대로 사는 만화 속 캐릭터다.


“작가, 부숴버릴 거야.” ‘어하루’의 여고생 은단오(김혜윤)는 작가가 짠 설정을 거부한다. 학교 친구들과 달리 자아가 생겨서다. 자아를 찾고 작가에 반기를 든 만화 캐릭터라니. 돌연변이 은단오는 작가가 자신에 준 설정, 짝사랑 심장병 같은 비련의 요소를 깨기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택한다.

10대 자녀 성화에 40대 부모에게까지 입소문

이 판타지 학원물(학교를 배경으로 청소년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 요즘 인기다. ‘어하루’는 10~20대에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지난달 넷째 주 드라마 화제성 순위에서도 1위(굿데이터코퍼레이션)에 올랐다. 시청률은 3%대로 낮지만, 같은 시간대 시청률 18%대를 기록한 KBS2 화제작 ‘동백꽃 필 무렵’(2위)보다 화제성은 높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온라인에 ‘어하루’ 관련 글이 ‘동백꽃’ 보다 많이 쏟아진 결과다. 본방송 대신 재방송으로 ‘어하루’를 찾아본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10대 자녀들이 열광하다 보니 40대 이상 부모들에게까지 ‘어하루’는 입소문이 났다.


‘어하루’는 웹툰 ‘어쩌다 발견한 7월’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만화처럼 장면이 순식간에 바뀌는 데다 판타지 설정이어서 기성세대에게는 진입장벽이 높을 수 있지만, 10~20대는 오히려 이런 특성을 즐긴다. 드라마 평론을 겸하는 박생강 소설가는 “10~20대가 만화라는 가상 세계와 그 안의 ‘병맛’(B급 취향) 그리고 웹툰의 문법에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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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배경으로 청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학원물들. ‘학교’, ‘꽃보다 남자’, ‘드림하이’(KBS)와 ‘상속자들’(SBS)이 대표작들이다. KBS SBS 제공

학원물 주인공 변화

제목 '학교' ‘꽃보다 남자’ ‘드림하이’ ‘상속자들’ ‘어쩌다 발견한 하루’
방송 시기(년) 1999 2009 2011 2013 2019
주인공 특징 우수에 찬 반항아 ‘얼짱’ 아이돌 지망생 재벌2세 엑스트라(만화)
주제 학교 폭력 ‘폼생폼사’ 공부 보다 예술 학교 빈부격차 현실 부정, 자아 찾기

’학교’와 180도 다른 학원물

‘어하루’가 주목받는 이유는 기존 학원물과 다른 참신함이다. 기존 학원물에서 주인공은 ‘얼짱’(‘꽃보다 남자’ㆍ2009)이거나 아이돌 지망생(‘드림하이’ㆍ2011)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거나 또래 사이 ‘인싸’(핵심 인물)였다면, ‘어하루’는 정반대다.


‘어하루’ 남녀 주인공은 엑스트라로 나온다. 내가 아닌, 만화 속 다른 캐릭터를 위해 존재한다. 학원물의 관행을 깬 ‘어하루’의 세계관은 현실 부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학교 폭력(‘학교’ㆍ1999)과 학교 내 빈부격차(‘상속자들’ㆍ2013)에 주목했던 여느 학원물과 달리 자아찾기란 주제 의식은 더욱 선명해졌다.


‘어하루’가 보여준 학원물의 변화는 사회적 인식 변화와 흐름을 같이 한다. 청소년이 느끼는 존재의 불안감이 드라마에 짙게 깔려 있다. ‘어하루’의 남자 주인공인 하루(로운)는 극 초반 이름도 없이 등장한다. 자아를 찾아 현실(만화)을 바꾸려는 그는 작가에 의해 소멸할 위기에 처한다. ‘어하루’를 즐겨 본다는 김영은(23)씨는 “작가의 뜻을 거역할 수 없는 엑스트라의 모습이 내 모습과 겹쳐 보일 때가 있다”고 말했다. 부모의 힘이 자녀의 대학 입시와 취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21세기 세습사회를 사는 많은 청년은 제 삶의 진짜 주인공이 자신이라 믿지 않는다. 엑스트라가 주인공인 허구의 드라마가 현실에서 적극 소비되는 이유다.

’여러분 중심으로 세상을 보세요’ 뜻밖의 응원

하루를 연기하는 아이돌그룹 SF9 멤버 로운(23)은 한국일보에 “연기하기는 어렵지만 존재 이유가 없는 인물과 그 ‘무(無)의 상태’가 오히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고 작품을 선택한 이유를 들려줬다. 문주희 ‘어하루’ 기획 PD는 “현실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고 느끼게 되는 상황들이 10대뿐 아니라 사회 초년생들에게도 와 닿을 수 있겠다 싶었다”며 “하지만 은단오처럼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본다면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드라마를 기획하게 됐다고 전했다. 드라마를 즐겨보는 시청자들은 ‘여러분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세요’란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와 함께 ‘커피차’를 지난 3일 촬영장에 보냈다.


‘어하루’ 뿐 아니다. 최근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날씨의 아이’(감독 신카이 마코토) 속 소녀는 이상기후를 막기 위해 제물로 바쳐진다. 어른들의 희생양인 된 소녀는 결국 사라진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의 대중문화에서도 청소년의 존재 불안은 캐릭터의 소멸로 이어진다. 공희정 대중문화평론가는 “현실에 이룰 수 없는 게 많아 현실을 반영한 환상을 만들기조차 어려우니 오히려 환상(만화) 속의 환상을 만드는 게 요즘 대중문화 콘텐츠 추세”라며 “헌데 메시지는 더 없이 현실적이라 때론 기괴함을 준다”고 분석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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