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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성 멎은 지 70년… 원시림 계곡엔 평화가 내려앉았다

<205> 화천 비수구미, 파로호유람선, 백암산케이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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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 해산령에서 평화의댐 아래 비수구미마을까지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인간의 간섭이 거의 없어 원시의 자연이 잘 보존돼 있다.

청명한 날씨에 바람까지 시원한 지난 1일 오후 북한강변 화천 산천어파크골프장에서는 부부골프대회가 한 달 일정으로 열리고 있었다. 일명 ‘거례리 사랑나무’ 양쪽으로 18홀 3개 코스를 갖춘 골프장이다. 잔디를 식혀줄 분수에 햇살이 부서지는 풍경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화천은 겨울 산천어축제로 전국에서 수십만의 관광객을 불러모으지만 읍내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가도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민통선 지역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총성이 멎은 지 70년, 인간의 간섭이 적어 상대적으로 원시의 자연을 보존하고 있다. 남북이 대치한 최전방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고요하고 평화롭다.

숨겨진 비경 들킬라… 걸어서만 갈 수 있는 비수구미마을

화천읍에서 평화의댐으로 가자면 해산령을 넘는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거친다. 해산령터널을 통과하면 해오름휴게소가 나타난다. 해산은 화천읍에서 동쪽에 위치한 해 뜨는 산, 일산(日山)의 다른 이름이다. 해발 650m 언저리 해산령터널은 길이 1,986m다. 터널을 완공한 1986년에 숫자를 맞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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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읍내에서 평화의댐의 이어지는 길목의 해산령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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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구미마을 어귀에 '비소고미금산동표(非所古未禁山東標)’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해오름휴게소 건너편에 비수구미마을로 가는 길이 있다. 4륜 구동 차량만 갈 수 있는 험한 길인데 주민들만 이용할 수 있게 철문이 굳게 닫혀 있다. 외지인은 오로지 걸어서만 갈 수 있다. 이 길도 해산령터널과 마찬가지로 평화의댐 공사를 위해 개설됐다. 그전까지 비수구미 주민들이 외부로 드나드는 유일한 수단은 소형 선박이었다. 1944년 화천댐 준공으로 형성된 파로호 물길을 이용해 간동면 구만리까지 가는 ‘70리 뱃길’이다. 주민들은 요즘도 험한 이 길보다는 뱃길을 주로 이용한다.


비수구미(秘水九美),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독특한 지명이다. '신비로운 물이 빚은 아홉 가지 아름다운 경치'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마을 어귀 커다란 바위에 ‘비소고미금산동표(非所古未禁山東標)’라 새겨진 것으로 보아 옛 이름은 ‘비소고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산동표는 조선 초기 궁궐 건축에 쓸 소나무 군락을 보호하기 위해 무단 벌목을 금지하는 표시다. 해산령에서 비수구미마을까지는 약 6.3km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철문을 통과하자마자 제법 넓은 흙길에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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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령에서 비수구미마을로 가는 길 양편으로 온갖 활엽수가 우거져 원시림을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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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구미계곡의 함박꽃나무.

인위적으로 산림을 가꾸지 않으니 소나무를 밀어내고 온갖 활엽수가 장악한 원시림이다. 물푸레나무와 층층나무 쪽동백나무 다래나무 단풍나무가 계곡을 따라 우거져 있고, 흔히 볼 수 없는 함박꽃나무도 종종 눈에 띈다. 귀하다는 고로쇠나무 박달나무 자작나무도 많아 주민들은 음력 정월부터 석 달 동안 마실 물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였고, 그 수액으로 밥을 지었다고 한다. 더덕과 송이버섯도 지천으로 널렸다니 교통은 불편해도 오지의 축복을 제대로 누린 셈이다.


숲길로 들어선 여행객마다 상큼하고 청량한 공기에 엷은 탄성을 내뱉는다. 내리막이라 발걸음도 가벼운데 청아한 계곡 물소리가 걷는 내내 이어진다. 작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합쳐져 하류로 내려갈수록 계곡의 폭은 넓어지고 수량도 많아진다. 경사가 심한 지점엔 물소리도 요란하다. 그늘 짙은 계곡에 이끼 낀 바위 사이로 흐르는 하얀 물줄기, 크고 작은 폭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비소고미(非所古未), 굳이 해석하면 ‘아무것도 아닌 곳’이다. 혹여 이 비경이 외부에 알려지는 걸 꺼려해 그렇게 지은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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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구미 계곡에는 크고 작은 폭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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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림을 형성한 비수구미 계곡에는 크고 작은 폭포가 끊임없이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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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구미 계곡의 단풍과 시원한 물줄기.

중간쯤에 ‘과부터골’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주인 없는 골짜기에 피란민이 들어와 화전을 일구고 농사를 지었는데, 우연히도 아홉 과부였다고 한다. 사람이 살았던 실제 흔적은 마을을 2km 정도 남긴 지점, 내리막이 끝나고 북한강이 가까워져서야 만날 수 있다. 끊겼던 휴대폰 신호도 이쯤에서 다시 연결된다. 버려진 옛 농지에 잡풀이 무성하고 간간이 바위틈에 놓인 벌통이 보인다.


현재 비수구미마을에는 4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그중 두 가구는 민박과 식당을 겸한다. 비수구미민박에서 산채비빔밥(1만2,000원)을 시켰다. 곰취 취나물 눈개승마 고사리 풍년초가 한 접시에 동그랗게 담기고 매실장아찌와 도라지무침을 비롯한 8가지 반찬이 별도로 나온다. 깊은 골짜기 자연으로 차린 밥상이니 꿀맛 건강식이다.


식당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북한강이다. 강변 언덕을 따라 비수구미 말고도 초소께 방께 법성골 지둔지 너다리 등의 자연부락에 또 20여 가구가 흩어져 살고 있다. 편리함보다는 산 좋고 물 좋은 고향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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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구미마을이 가까워지면 버려진 옛 농지가 보인다. 새 건물을 지으려는지 돌무더기를 부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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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구미 민박의 산채정식. 자연에서 채취한 5가지 나물과 8가지 반찬이 함께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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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구미마을 계곡에 보행자를 위한 다리가 놓여 있다. 평화의댐까지 연결되는 길 초입인데, 현재 이 길은 낙석 위험으로 다닐 수 없다.

비수구미에서 해산령으로 되짚어 올라오기는 사실 힘든 일이다. 계곡을 걸어 마을까지 오는 이들은 대개 단체 여행객이다. 해산령에 여행객을 내려놓은 버스는 평화의댐 인근 싸리골에서 대기한다. 마을 선착장에서 싸리골까지는 비포장 도로가 나 있지만 낙석 위험으로 폐쇄됐다. 어쩔 수 없이 식당에서 운영하는 작은 배로 이동해야 한다.

파로호유람선 탈까, 백암산케이블카 탈까

비수구미 주민들이 유일하게 외부와 통하던 파로호 ‘70리 뱃길’에 현재는 유람선이 운행하고 있다. 간동면 구만리 선착장에서 평화의댐 선착장까지 오전 10시, 오후 2시 하루 두 차례 40인승 평화누리호(왕복 1만9,000원)가 운항한다. 1시간 동안 잔잔한 호수를 미끄러지듯 민통선 인근 깊은 골짜기로 이동한다. 이곳은 광복 이후 북한에 속했던 지역인데 한국전쟁 때 되찾아 이승만 전 대통령이 파로호(破盧湖)라 명명했다. 오랑캐를 무찌른 곳, 즉 중공군을 격파한 호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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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호유람선 평화누리호가 평화의댐에서 구만리 선착장으로 돌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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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로유람선이 평화의댐이 가까워지면 왼편 산자락으로 고립된 마을이 하나둘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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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보트가 이동하면 잔잔한 수면에 비단 물결이 일렁인다.

험준한 산자락 짙은 녹음이 수면에 비쳐 푸른 물빛이 더욱 싱그럽다. 주민들을 태운 작은 선박이 이동하면 거울처럼 매끄러운 수면에 비단 물결이 일렁거리고, 이따금씩 왜가리가 하얀 날개를 펼치며 산모퉁이로 사라진다. 비수구미가 가까워지면 산자락으로 드문드문 한두 채의 집이 보인다. 집 아래 물가에는 어김없이 이동수단인 소형 모터보트가 정박해 있다. 낯선 시간, 낯선 공간을 유람하듯 몽롱하다.


평화의댐 선착장에 내리면 거대한 댐을 중심으로 캠핑장과 국제평화아트파크가 조성돼 있다. 사랑과 평화를 상징하는 삼각탑을 중심으로 낡은 탱크와 비행기를 활용한 30여 설치미술작품이 포진하고 있다. 포신에 평화의 나팔을 달고 비둘기 날갯짓으로 비상하는 탱크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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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임남댐의 수공에 대비해 지은 평화의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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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평화아트파크의 탱크를 활용한 설치미술 작품.

국제평화아트파크 위로 비목공원과 세계평화의종공원이 연결된다. 비목공원은 6·25 전쟁의 아픔과 당시 희생된 젊은 무명 용사의 넋을 기리는 곳이자 가곡 ‘비목’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작사가 한명희는 1960년대 중반 이곳에서 14km 떨어진 백암산 비무장지대에서 군 생활을 했다. 어느 날 우연히 잡초가 우거진 골짜기에서 무명용사의 녹슨 철모와 돌무덤 하나를 발견했고, 무덤의 주인도 자신과 같은 젊은이였을 거라 생각하며 노랫말을 지었다. 후에 작곡가 장일남이 곡을 붙였다. 비목공원에는 면류관처럼 앙상한 십자가 가지에 녹슨 철모가 상징물로 설치돼 있다.


세계평화의종공원에는 이름처럼 대형 종과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기리는 동판이 세워져 있다. 평화의 종은 실제 30여 개 나라 분쟁지역의 무기를 녹여 만들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공원에서 평화의댐 상부로 도로가 연결돼 있다. 지나온 선착장이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고, 물이 거의 없는 댐 안쪽에 넓은 습지가 형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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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십자가에 녹슨 철모가 비목공원의 상징물로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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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목공원 위 세계평화의종공원에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의 약력을 적은 동판이 설치돼 있다.

비목의 배경 백암산(1178m)에는 지난해 케이블카가 놓였다. 한국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금성전투의 현장으로 북한 땅이 코앞에 보이는 대한민국 최북단 케이블카다. 2.12km 길이에 40인승 캐빈이 왕복 운행한다.


원시림 우거진 가파른 산자락을 따라 정상에 오르면 전망대와 연결된다. 넓은 통유리에 ‘임남댐 16.69km, 금강산 53.11km’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날씨가 좋으면 임남댐이 선명하게 보이고 금강산 줄기도 손에 잡히는 위치다. 남측으로 시선을 돌리면 평화의댐도 코앞이다. 평화의댐은 1986년 북한 임남댐 수공에 대비하기 위해 건설했다. 전두환 정권은 당시 실제보다 위협을 과장해 전 국민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전개했고, 반공정서를 정권 유지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남북 2개의 댐을 잇는 물줄기는 험준한 산악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비무장지대에서도 생태의 보고로 평가된다. 케이블카 하부정류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언뜻 양의대습지가 차장으로 스친다. 굽이 도는 물줄기 안쪽에 형성된 거대한 초록 습지다. 백암산의 거친 바위지대에서는 천연기념물 산양도 종종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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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산케이블카 탑승장 가는 길에 스쳐 보이는 양의대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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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양 한 마리가 백암산케이블카 탑승장으로 가는 차량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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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북단 원시림 위로 연결된 백암산케이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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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산케이블카 전망대에서 보이는 북한 임남댐. 여행객은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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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 파로호와 비수구미 주변 여행 지도. 그래픽=강준구 기자

백암산케이블카 정상에서는 군사보안상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다.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산하를 눈으로 보고 가슴에 새긴다. 최전방 관광지라 제약이 많다. 백암산케이블카 홈페이지(baegamcable.ihc.go.kr)에서 최소 3일 전 출입 신청을 해야 한다. 그래도 개인 차량으로는 갈 수 없고 읍내 화천체육관에서 신분 확인을 한 후 셔틀버스를 타고 단체로 이동해야 한다. DMZ평화의길(durunubi.kr/dmz-main.do) 화천코스를 예약하거나 여행사 패키지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끝없이 평화를 갈구하지만 긴장이 팽팽한 것이 현실이다.


화천=글·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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