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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에 호화 당구장… 나라 잃은 시름 달래졌을까

고종ㆍ순종의 황실 당구장

한국일보

주식회사 일승정 카탈로그에 실린 사진 ‘창덕궁 인정전 내 당구장(옥돌실ㆍ玉突室)’. 순종이 일승정에서 구입한 2대의 당구대와 두 병풍 사이에 세워져 있는 당구 큐대, 커튼 아래 원형 테이블에 놓인 당구 계산기가 보인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조선을 이은 대한제국 황제, 고종과 순종은 새롭게 변화하는 정세 속에서 여러 서구 문물을 선별적으로 수용해 국제 사회 속에서 당당한 독립국을 확립하고자 했다. 고종 황제가 퇴위한 후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궁궐인 덕수궁에는 석조전, 정관헌 등과 같은 서양식 건축물이 들어섰으며, 순종 황제를 비롯한 황실 가족이 마지막까지 거주했던 창덕궁의 인정전 대조전 희정당 등 일부 전각 내부는 서양식 가구로 꾸며지는 등 전통적인 궁궐 모습과는 사뭇 달라진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근대화의 의지를 드러내고자 했던 새로운 궁궐 환경 속에서 황제의 여가 생활에도 신문물의 영향으로 변화가 나타나는데, 바로 ‘당구’다.


오늘날 당구는 국제대회가 있을 정도로 스포츠의 한 분야로 정착한 지 오래며, 어느 동네를 가더라도 당구장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을 만큼 대중적 오락이기도 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당구를 치며 짜장면을 먹는 장면은 단골 소재가 될 정도로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렇다면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과 순종은 어떻게 당구를 즐겼고 황실 당구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구는 당시 ‘옥돌(玉突)’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렸는데, 한국에 머물렀던 윌리엄 프랭클린 샌즈(Willam Franklin Sandsㆍ1874~1946), 호머 B 헐버트(Homer B. Hulbertㆍ1863~1949), 리하르트 분슈(Richard Wunschㆍ1869~1911) 등 외국인들의 회고록을 통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사이 서울 정동의 외국인 사교클럽에 유입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서울뿐 아니라 전주 광주 등 지방 도시에도 당구가 보급돼 클럽이 형성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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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이 당구대를 주문한 일본 업체 일승정의 영업 안내 카탈로그 표지.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왕실 관련 당구에 대한 기록은 민간보다 늦은 1912년 신문 기사를 통해서 비로소 확인된다. 매일신보 3월 1일 기사 ‘이왕가 개설(李王家 開設)의 옥돌실(玉突室)’ 사진 및 3월 7일 ‘이왕전하 옥돌(李王殿下 玉突)’ 기사에 따르면, 순종이 일본 도쿄(東京) 소재 주식회사 일승정(日勝亭)에 주문해 2대의 옥돌대(玉突臺), 다시 말해 당구대를 구입했고 창덕궁 인정전 동행각(東行閣)에 옥돌 운동장, 즉 당구장을 마련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순종은 월ㆍ목요일을 옥돌 운동일로 정했는데 정해진 날짜 이외에도 당구장에 빈번하게 왕림하는 등 상당히 당구에 심취해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순종이 당구대를 주문했던 일승정의 영업 안내 카탈로그에는 창덕궁 인정전 내 당시 당구장(옥돌실ㆍ玉突室) 모습이 실려 있다. 사진 속 당구장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면, 당구대에 대한제국의 상징 무늬인 오얏꽃이 장식돼 있고 4구의 당구공 모습이 눈에 띈다. 당구대 뒤 배경에는 매화도병풍과 나전백경도병풍(螺鈿百景圖屛風)이 펼쳐져 있는데 두 병풍 사이에는 당구 큐대가 세워져 있고, 커튼 아래 원형 테이블에는 당구 계산기가 놓여 있는 등 화려하게 꾸며진 황실 당구장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사진 속 인정전 동행각의 당구장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대리석 당구대로 추정되는 일부분과 당구 계산기, 그리고 당구장을 꾸몄던 나전백경도병풍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으로 전해지고 있어 당시 화려했던 당구장의 일면을 확인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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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 당구장에 놓였던 당구 점수 계산기.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순종이 당구에 심취했던 건 1910년 국권 피탈의 한과 적적함을 달래기 위한 취미이자, 건강 회복을 위한 운동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1898년 김홍륙(金鴻陸)은 고종과 당시 태자였던 순종에게 해를 가할 목적으로 그들이 즐기던 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넣도록 사주했다. 고종은 커피 맛이 이상하다는 걸 알고 곧장 뱉었지만 순종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커피를 마시는 바람에 치아가 빠지고 며칠간 혈변을 누는 등 고생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순종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병을 앓았는데, 운동을 하면 개선될까 해 간간이 시신(侍臣)들을 데리고 큐대를 잡았다고 전한다. 이 내용은 순종국장록에 ‘운동의 필요로 옥돌’이라는 제목으로 짤막하게 실려 있다.


또한 순종은 외국인 당구 선수가 경성(京城)에 이르면 반드시 한 번씩은 만나봤을 정도로 당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당시 순종의 적수가 되는 사람은 창덕궁 경찰서장이었던 야노(矢野)라는 성씨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점수를 내 득점에 따라 승패를 가르는 당구를 즐기면서도 순종은 굳이 이기려는 욕심 없이 항상 재미있게 마치려는 마음으로 대했는데, 점수가 60~70점 내외에 이르렀다. 현재 점수 체계와 비교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수는 없어 순종의 당구 실력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순종이 맛세이(masséㆍ공이 당구대에 접근해 있거나 공과 공 사이가 좁아 칠 수 없을 때, 큐를 수직으로 세워 공을 깎아 치는 방법)를 즐기지는 않았는지, 승패를 떠나 당구 자체를 즐기는 진정한 고수가 아니었을지 상상해 본다. 시대일보 1926년 5월4일 기사에 의하면 순종 비 순정효황후와 함께 당구를 치기도 했다고 하니, 황실에서 당구는 남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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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인정전의 당구장에 장식돼 있던 나전백경도병풍. 춘하추동의 여러 풍경을 자개로 장식한 병풍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황실 당구장은 창덕궁뿐 아니라 퇴위한 고종이 머물렀던 덕수궁에도 마련됐던 것으로 보인다. 덕수궁 이태왕 전하, 즉 고종은 아침에는 11시까지 함녕전 침실에서 취침하고 밤 2~3시까지 침실에 들지 않은 채 덕홍전에 설비해 놓은 당구장에 나아가 공을 치는 데 극히 재미를 붙였다. 여관들을 데리고 공을 치게 했다는 내용도 매일신보 1913년 8월 29일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종이 애용했던 덕수궁 덕홍전 당구장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안타깝게도 사진이나 관련 유물이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같은 기록으로 볼 때 순종뿐만 아니라 아버지 고종 역시 거처하던 궁궐에 당구대를 비치했고, 궁중 여성들까지도 당구를 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궁궐에서의 당구는 일본에 의한 국권 피탈과 강제 퇴위로 황제에서 왕으로 강등된 고종과 순종의 건강을 위한 운동이자 무료한 일상 속의 새로운 취미 생활로 자리매김했다. 혹자는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까지 누렸던 호사스러운 황실 생활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으나, 근대기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 힘을 잃은 황제의 시름을 달래기 위한 위락(慰樂)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안보라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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