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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쓰린 패배와 대통령 별장... 영욕의 쪽빛 바다

<190> 거제 하청·장목면 칠천도와 저도

한국일보

거제 주변 바다는 섬과 육지에 둘러싸여 지형이 복잡하다. 칠천도는 정유재란 때 조선 수군이 일본에 유일하게 패배한 곳이다. 섬에서 동그랗게 돌출된 언덕 위에 이를 역사의 교훈으로 삼기 위한 칠천량해전 공원전시관이 들어섰다.

신공항이 들어설 예정인 부산 가덕도에서 해저터널과 해상교량을 지나면 거제 장목면이다. 거가대교 터널과 교량은 중죽도와 대죽도, 저도 3개의 섬을 거치지만 길은 섬과 연결되지 않는다. 중·대죽도는 사람이 살 만한 크기가 못되고, 저도는 대통령 별장으로 이용돼 오랫동안 일반인의 접근이 차단된 곳이었다. 다리가 놓였지만 배로만 갈 수 있다. 저도를 비롯해 거제도 북쪽 장목면과 하청면 주변 섬과 바다에는 임진왜란부터 근현대까지 영욕의 역사가 녹아 있다.

쓰린 패배도 역사의 교훈, 칠천도

승리의 영광은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지만, 쓰린 패배는 되도록 빨리 잊히기를 바라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래서일까? 거제 하청면 칠천도에는 이렇다 할 관광시설이 거의 없다. 칠천량해전공원도 주변 풍광이 빼어난 데 비해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칠천량해전은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15일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과 벌인 싸움에서 대패한 전투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을 통틀어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싸움이니 자존심 상하는 치욕의 현장이다.


임진왜란 중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1월 다시 조선을 침범했다. 바다를 제패하지 못해 조선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실패했다고 판단한 일본은 수군통제사 이순신을 제거하려 이간책을 꾸몄고, 당정에 휘말린 조정은 결국 이순신을 하옥하고 그 자리에 원균을 임명한 상태였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부산 근해로 유인했고, 원균은 무모하게 출전해 보성군수 안홍국 등을 잃고 되돌아왔다. 다시 경상우수사 배설에게 명해 웅천(현 진해)을 급습했지만, 전선 수십 척을 잃고 말았다. 권율은 책임을 물어 원균을 태형에 처한 뒤 다시 출전하라 명했다.


일본군 본진을 급습하기 위해 16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한 원균은 7월 14일 부산 근해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를 미리 탐지한 적들의 교란작전에 말려 고전하다 되돌아오던 중 가덕도에서 기습을 받아 400여 명의 군사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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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해전공원전시관은 쓰린 패배를 역사의 교훈으로 삼기 위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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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해전공원 주변에 동백꽃이 우수수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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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해전공원의 조형물도 왠지 초라해 보인다.

적은 칠천량(거제 본 섬과 칠천도 사이 물목)에서 무방비로 쉬고 있던 조선 수군을 기습할 계획을 세웠다. 도도·와키사카·가토 등을 앞세운 일본 수군은 7월 15일 달밤을 이용해 일제히 수륙양면 기습작전을 개시했다. 당황한 조선군은 당해내지 못했고 전선은 대부분 불타고 부서졌다.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장수들이 전사하고, 원균은 겨우 육지로 탈출했지만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결국 전사했다. 패배에 대한 원망은 고스란히 전장에서 사망한 그의 몫이었다. 조정은 그제야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 전열을 가다듬게 했다.


칠천량해전전시관은 당시의 쓰라린 패배를 역사의 교훈으로 삼기 위해 세워졌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역사를 훑고 있는 전시관에 비애와 비장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전시관 주변에 끝물인 동백꽃이 우수수 떨어져 있고, 마당에 세워 놓은 수군 조형물도 왠지 쓸쓸해 보인다.


그러나 섬과 육지로 둘러싸인 이 바다에 패배의 아픔만 있는 건 아니다. 그 7년 전 인근 옥포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첫 출전해 조선 수군에 첫 승리를 안긴 전투(옥포해전)가 있었고, 그의 뛰어난 전략이 유감없이 발휘된 한산도대첩이 벌어진 곳도 거제와 통영 사이 견내량이다. 공원 언덕배기에 세워진 전망대 좌우로 펼쳐지는 바다는 400여 년 전의 비극을 잊을 정도로 맑고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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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칠천도의 칠천량해전공원. 섬 오른쪽이 거제 본 섬과의 물길인 칠천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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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도에는 이름난 관광시설이 없어 한적하게 섬을 한 바퀴 도는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 섬 북측에 물안해수욕장이라는 작은 해변이 있다.

칠천량 좁은 물목에는 이제 거제 본 섬과 연결된 다리가 놓였다. 그곳부터 섬을 한 바퀴 도는 해안도로도 깔끔하게 단장돼 있다. 섬 북측에 작은 해수욕장(물안해변)이 하나 있을 뿐, 특별한 볼거리가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한적하게 해안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는 섬이 또 칠천도다.


해안을 낀 거제 산자락에는 대나무가 많아 한겨울에도 풍경이 삭막하지 않다. 칠천량해전공원에서 바다 건너 산자락은 유난히 푸르다. 거제맹족죽테마파크가 위치한 곳이다. 중국이 원산인 맹종죽은 지름 20㎝에 10~20m 높이로 자란다. 대나무 중에서 가장 굵고 커서 죽순 나물과 세공품으로 많이 쓰인다. 이곳 맹족죽은 1926년 인근 성동마을 출신 신용우씨가 일본에서 가져온 3그루를 자기 집 앞에 심은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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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 대나무가 하늘 높이 뻗어 있는 거제맹종죽테마파크. 한겨울 대숲은 오히려 푸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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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재그로 산책로가 연결된 거제맹종죽테마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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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맹종죽테마파크 입구 대나무에 싹을 틔운 연도를 적어 놓았다. 크기와 나이가 상관없어 우후죽순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매표소(입장료 4,000원)를 통과하자마자 조붓한 산책로를 사이에 두고 하늘 높이 쭉쭉 뻗은 대숲이 이어진다. 지그재그 산책로가 산 중턱까지 연결된다. 집라인과 네트 등 숲 놀이시설도 운영하지만, 짙푸른 대숲을 걷는 것만으로도 청량한 기운을 가득 담을 수 있다. 한여름에 대숲에 들어서면 서늘함이 감지되는데, 겨울 대숲은 오히려 푸근하다. 주변의 모든 소음이 차단된 휴식과 사색의 공간이다.

반전 있는 섬, 대통령 휴양지 저도

칠천도가 임진왜란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라면, 인근 저도는 근현대사의 영욕이 서린 곳이다. 돼지 형상이어서 저도라 불리는 섬은 거제 본 섬과 부산 가덕도 사이에 위치한다. 길이 1.3㎞, 폭 700m 남짓한 작은 섬에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군사시설이 들어섰고, 한국전쟁 때는 유엔군이 활용했다. 전쟁이 끝난 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여름 휴양지로 쓰기 시작했고 박정희 시대에는 대통령 별장인 청해대가 들어섰다. 2019년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일반에 개방하기까지 누구도 함부로 발을 들이지 못하는 금단의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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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북측 유호전망대에서 보는 거가대교와 저도. 대통령 휴양지라 하지만 겉보기엔 특별히 빼어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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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유람선이 하루 2회 운항하는 궁농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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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유람선이 궁농항에서 저도로 이동하고 있다.

대통령 휴양지라니 풍광이 아주 빼어날 거라 여기기 쉬운데, 바깥에서 보는 모습은 의외로 볼품이 없다. 2010년 개통한 거가대교 교각에 짓눌린 형국이어서 오히려 초라해 보인다. 그러나 섬 안에 들어가면 ‘과연 대통령 휴양지’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한마디로 반전 매력의 섬이다.


궁농항에서 출항한 유람선은 반달 모양으로 휘어진 농소몽돌해수욕장을 빠져나가 저도로 향한다. 20분 남짓 이동하는 동안 유람선을 운영하는 김재도 대표의 설명이 이어진다. 저도뿐만 아니라 주변 갯마을과 작은 바위섬에 대한 이야기까지 보태지니 여행이 한결 풍성하다.


저도 선착장에 닿으면 거제시청 소속 10여 명의 안전요원이 기다리고 있다. 일반 관광이 허용됐지만 섬에는 여전히 군사시설이 공존한다. 안전요원은 길 안내와 해설을 병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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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보기와 달리 저도 내부는 짜임새 있게 가꿔져 있다. 수목이 조화롭게 자라고 있는 대통령 골프장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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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객이 아름드리 나무에 가려진 청해대(대통령 별장)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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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잔디광장 부근에 누군가가 솔방울로 하트 모양을 그려 놓았다.

소나무 방풍림이 일렬로 선 선착장 부근에 작은 해변이 위치하고, 안으로 발을 들이면 제법 넓은 잔디광장이 펼쳐진다. 대통령의 골프장이다. 아늑한 잔디밭에 벚나무와 배롱나무 등이 조화롭게 자리 잡고 있다. 곰솔과 말채나무 가지가 맞붙은 연리목도 있다. 광장 한쪽 귀퉁이에 자리 잡은 청해대는 키 큰 팽나무 여러 그루에 가려져 있지만, 건물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다.


탐방로는 골프장을 돌아 언덕으로 완만하게 이어진다. 이곳부터 반전이다. 겨울이어서 삭막할 줄 알았던 섬이 의외로 원시림에 가까운 싱그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인공조림을 한 편백나무 산책로를 제외하면 섬 전체가 해송 동백 소사나무 풍개나무 사스레피나무 팽나무 등 자연 그대로의 숲이다. 아름드리로 자란 소나무와 아열대성 활엽상록수가 어우러져 있으니, 차가운 바람만 아니면 겨울임을 실감하기 어렵다.


바다가 잘 보이는 2곳 전망대는 일제강점기 군사시설이 있던 곳이다. 남쪽 끝자락 전망대에는 러일전쟁(1904년) 발발 이후 건설한 포진지 흔적이 남아 있다. 진해만 일대 일본군 연합함대 기지와 가덕도 인근 수로를 엄호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서쪽 끝 전망대에는 지하 벙커 형태로 만든 탄약고 시설이 남아 있다. 전망대 앞으로 검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수평선 부근에 어렴풋이 낮은 산줄기가 길게 이어진다. 일본 쓰시마가 바로 코앞이다. 오랜 옛날부터 왜구에 시달려온 점을 감안한다면, 거제 해역은 유사 이래 최근까지 한반도의 최전방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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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드리 해송과 상록활엽수가 어우러진 저도 탐방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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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에 남아 있는 일제의 포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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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에 남아 있는 일제의 탄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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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전망대에서는 날이 좋으면 멀리 수평선 너머로 일본 쓰시마섬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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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유람선에서 선사 대표가 백사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거가대교 교각 아래를 통과해 궁농항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도 유람선 대표의 해설이 이어진다. “왼편에 하얀 바위섬이 보이죠? 바로 대금산의 기운을 받은 백사도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생가가 대금산 자락 외포리에 있고, 한국전쟁 때 원산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의 부모님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거제로 들어온 곳도 바로 백사도 항로입니다.” 두 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곳이니 좋은 기운을 받아가라는 덕담이다.


저도 유람선은 궁농항(거제저도유람선)에서 하루 2회(오전 10시, 오후 2시) 왕복한다. 1시간 30분가량 섬 안에 머무는 시간까지 포함해 2시간 30분이 소요되고, 온라인 예약 요금은 1만6,000원이다. 장목항에서 출항하는 배(거제저도장목유람선)도 있는데 승객이 적으면 운항하지 않으니 예약할 때 유념해야 한다.


궁농항에서 유람선을 타기 전 시간이 남는다면 망봉산 둘레길을 걸어볼 것을 권한다. 해발 83m에 불과한 조그마한 봉우리 둘레와 정상으로 산책로를 조성해 놓았다. 여행객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의외로 깔끔하고 바다 전망이 뛰어난 길이다. 40분 정도면 힘들이지 않고 아주 여유롭게 돌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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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농항 뒤편 망봉산 산책로는 의외의 바다 풍광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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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대성 수목이 울창한 망봉산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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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하청면과 장목면 여행 지도. 그래픽=강준구 기자

장목면 북동쪽 끝 도로변의 유호전망대에서도 주변 바다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거가대교와 저도는 물론, 진해만 일대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날이 좋으면 남쪽 수평선으로 쓰시마섬까지 보인다.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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