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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박자박 소읍탐방] 다시 본다 '옛날 관광지'… 숲과 길로 진화한 삼한시대 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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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시대에 축조된 제천 의림지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솔숲이 운치 있게 감싸고 있어 예전부터 명승으로 꼽혔고, 최근엔 위아래로 걷기길을 조성해 힐링 관광지로 진화하고 있다.

<100> 제천 모산동 의림지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 중 나라에서 경치가 빼어나다고 인정한 곳을 국가명승이라 부른다. 강릉 소금강을 필두로 거제 해금강, 완도 구계등 순으로 현재까지 전국 100여 곳이 목록에 올라 있다. 명승과 함께 유적ㆍ신앙ㆍ산업ㆍ교통 분야에서 중요한 것은 사적으로, 동물(서식지)ㆍ식물(자생지)ㆍ지질 분야에서 중요한 것은 천연기념물로 보호하고 있다. 명승은 대개 역사가 오래되고 전문가의 검증을 거친 곳이지만, 명칭부터 ‘옛날 관광지’라는 느낌이 강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대중화로 사진 찍기 좋은 ‘핫플레이스’와 ‘풍경 맛집’이 늘어나는 시대라 고루하다는 이미지가 강화된 측면도 있다. 그렇다고 명승이 언제까지나 옛 모습으로 남아 있는 건 아니다. 주변에 볼거리 즐길거리를 추가하면서 명승도 세월을 입는다. 그렇게 조금씩 진화하는 국가명승 제20호, 제천 의림지를 다녀왔다.

속속들이 이름값, 숲이 된 의림지

의림지는 제천 시내 북측 모산동에 위치한다. 좌측에 넓은 들판을 낀 도로에서 턱을 살짝 오르면 초록빛 저수지 뒤편으로 제법 넓은 마을이 펼쳐진다. 모산동은 ‘못 안’을 발음이 비슷한 한자어로 옮긴 지명이라고 한다. 역시 의림지가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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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낀 의림지. 저수지 둘레에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우거져 있고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어서 제천시민들이 수시로 찾는 산책 장소다.

의림지는 삼한시대에 축조된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함께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저수지로 꼽힌다. 제방을 언제 쌓았는지 명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신라 진흥왕 때 악성 우륵이 용두산(871m)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을 막아 둑을 만든 것이 시초라고 전해진다. 우륵에 대한 기록이 워낙 제한적이라 검증할 길은 없다. 애초에는 ‘임지(林池)’라 했는데, 고려시대 제천의 지명인 ‘의원현’ 또는 ‘의천’에서 첫 글자를 따서 의림지라 부르게 됐다고도 한다.


아무리 물이 맑고 잔잔하다 해도 연못만 있다면 평범한 낚시터와 다를 게 없다. 의림지를 진짜 명승으로 만든 건 제방을 따라 조성된 솔숲과 버드나무다. 처음 이름대로 ‘숲을 품은 연못’이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호수 북측으로 발길을 옮기면 맞은편 제방을 따라 늘어선 솔숲이 수면에 비친다. 수령 200~500년으로 추정되는 소나무 180여 그루는 따로 번호를 매겨 보호하고 있다. 오랜 나이만큼 수형도 제각각이다. ‘ㄱ’자와 ‘ㄷ’자, 때로는 ‘ㄹ’자 형상까지 노송이 부릴 수 있는 멋은 모양대로 다 갖췄다. 휘어지고 꺾이고 갈라지고, 더러는 물위로 솔가지를 늘어뜨려 운치를 더한다. 쉽지 않았을 세월의 흔적으로 여겨져 한편으로는 애잔하다. 버드나무 가지가 늘어진 순주섬 주변에선 물오리가 유유히 헤엄친다. 순주섬은 수련과의 수초인 순채가 많이 자라서 붙인 이름이다. 1972년 대홍수로 의림지 둑이 터져 모두 쓸려 내려간 후 순채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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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림지 제방 영호정 인근의 솔숲. 아름드리 나무가 휘어지고 늘어져 멋들어진 운치를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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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림지 안의 작은 섬. 순채가 많이 자라 순주섬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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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로 늘어진 소나무 가지가 잔잔한 수면에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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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림지 둘레를 감싸고 있는 노송이 잔잔한 수면에 비쳐 편안한 풍경을 연출한다.

저수지와 숲이 어우러진 풍경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오래전부터 수리시설보다 놀기 좋은 곳으로 이름난 게 당연해 보인다. 호수를 한 바퀴 두르는 산책로를 걸으면 3개의 누대를 만난다. 서쪽 귀퉁이 아름드리 솔숲에 경호루가 있다. 누각에서 바라보는 잔잔한 호수가 거울 같다는 의미다. 1948년 당시 제천군수가 지역 인사들과 협의해 지었다고 한다. 주변엔 오래된 식당도 함께 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다소 눈에 거슬리지만, 2006년 명승으로 지정되기 전부터 영업해 온 식당이라니 이 또한 의림지의 경관이다. 경호루 바로 뒤에는 ‘용추폭포’가 있다. 지난해 저수지에서 계곡으로 연결되는 배수로를 정비해 30m 높이로 만든 인공 폭포다. 폭포 위 산책로는 투명 유리로 만들었다.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짧지만 아찔한 스릴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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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림지 경호루. 1948년 지은 호수 전망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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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림지 용추폭포는 지난해 배수로를 정비해 새로 조성한 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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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m 높이의 용추폭포 위에는 투명유리로 산책로를 만들었다.

솔숲이 가장 운치 있는 구간은 제방인데 중간쯤에 영호정이 있다. 역시 호수에 비치는 아름다운 풍광을 빗댄 이름으로, 조선 순조 7년(1807)에 처음 건립했고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것을 1954년 다시 세운 정자다. 1907년에는 지역의 의병대장 이강년이 부하들과 정치를 논하던 곳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제방을 통과해 저수지 동편으로 나가면 제천시에서 2007년 세운 우륵정이 있다. 호수 안까지 가지를 펼친 왕버드나무 한 그루와 어우러진 풍광이 일품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를 근거로 지은 정자라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긴 힘들다. 그럼에도 지역에선 오래전부터 정자 앞 널찍한 바위를 우륵대로, 뒤편 약수는 우륵샘으로 불러왔다. 호스를 통해 항상 일정량이 새나오는 우륵샘 물은 주민들이 요즘도 생수 대용으로 쓰고 있다. 물을 받으러 온 한 주민은 한겨울에도 얼지 않고, 2~3개월 보관해도 상하지 않아 특히 의림지 주변 식당에서 많이 이용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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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림지 동편 우륵정. 바로 앞 왕버드나무와 어우러진 풍취가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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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림지 우륵정 앞 왕버드나무가 호수로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뒤로 순주섬이 보인다.

명품 숲길 꿈꾸는 ‘삼한의초록길’

의림지 제방 서쪽 끝에서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의외의 길이 이어진다. 삼한시대에 축조한 의림지와 뿌리가 닿아 있다는 의미에서 ‘삼한의초록길(이하 초록길)’이라 부른다. 농업용수 공급기능이 축소됐다고 하지만, 의림지는 여전히 제천에서 가장 넓은 ‘의림지뜰’을 적시는 수리시설이다. 농로를 확장 개조한 초록길은 이 의림지뜰을 북에서 남으로 일직선으로 관통해 시내 언저리까지 닿는다. 전체 2.3km 산책로를 걸으면 사방으로 시야가 툭 트인다. 산간지역인 제천에서 의외로 드넓은 평야를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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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림지에서 제천 시내로 연결된 '삼한의초록길'. 의림지뜰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걷기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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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의초록길' 시내 구간에는 화단을 꾸미고 산책로를 곡선으로 조성했다.

분위기는 4차선 도로를 기준으로 위아래가 전혀 다르다. 의림지 쪽 길은 소나무를 가로수로 심어 산책로가 곧고 바르다. 반면 시내 쪽은 소나무 대신 키 큰 활엽수를 주로 심었다. 산책로도 일직선이 아니라 물 흐르듯 좌우로 유연한 곡선을 그린다. 아직은 초록길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만 파릇파릇 새순이 돋으면 주변이 초록으로 덮일 것이다. 산책로 화단엔 140여 종의 풀과 나무를 심어 4월부터 10월까지 끊임없이 꽃이 피고 진다.


길 중간쯤에 의림지에서 흘러내린 물을 한번 모았다 걸러주는 작은 연꽃 연못이 있다. 버드나무와 어우러진 솔방죽 생태공원으로 잠시 쉬어가도 좋다. 나무가 자라는 만큼 숲도 울창해질 테니 10년 정도면 제천을 대표하는 명품 숲길로 성장할 듯하다. 전체 구간이 평지여서 걷기에 전혀 힘들지 않지만, 부담스러우면 자전거를 이용해도 된다. 시내 쪽 출발 지점에 자전거 무료 대여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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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시내 북측의 모산비행장. 여전히 국방부 소유지만 평시에는 시민들의 산책로로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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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산비행장은 BTS가 뮤직비디오를 찍은 곳으로 알려지면서 외지인의 발길도 늘어나고 있다. 유튜브에 공개된 BTS의 '영포에버'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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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산비행장 활주로에 BTS의 뮤직비디오 촬영 흔적이 남아 있다.

초록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모산비행장은 제천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공간이다. 1950년대에 공군훈련장으로 건설한 이 비행장은 여전히 국방부 소유지만, 평시에는 시민들의 산책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건설 당시에는 시내 외곽의 한갓진 곳이었지만, 지금은 활주로 양편으로 주택이 들어서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km가 넘는 넓고 긴 활주로에서 산책하는 경험은 대한민국에서 이곳에서만 가능할 듯하다. 최근 BTS가 ‘영포에버’ 뮤직비디오를 찍은 곳으로 알려지면서 외지인의 발길도 늘어나고 있다. 활주로 주변에는 바람개비가 돌아가고 일부 구간은 화단으로 꾸몄다. 현재는 파랗게 호밀이 자라고 있다.

‘한방 제천’ 의지 담은 한방치유숲길

의림지 북측은 한방치유숲길로 이어진다. 저수지 서쪽 하천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솔밭공원이다. 숲의 밀도와 규모가 의림지를 능가한다. 멋들어지게 휘어진 소나무 가지 아래는 솔잎만 떨어진 붉은 흙길이다. 그늘 한 점 들기 힘든 소나무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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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림지 북쪽의 솔밭공원. 멋들어지게 휘어진 소나무가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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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림지 솔밭공원을 통과하면 제2의림지(비룡담)로 오르는 산책로가 지그재그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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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림지 왼쪽 산자락으로 호수와 계곡을 따라 한방치유숲길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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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민이 한방치유숲길이 이어지는 피재계곡 시린 물에 소쿠리 가득 캔 냉이를 씻고 있다.

솔밭공원 산책로는 바로 위 제2의림지로 불리는 비룡담으로 이어진다. 가파른 제방에 놓인 지그재그 목재 덱을 오르면 제천의 진산인 용두산 아래에 의림지와 규모가 비슷한 저수지가 초록색 물을 담고 있다. 호수 왼편 산자락으로 난 길은 상류 피재계곡으로 이어진다. 한국전쟁 당시 희생자들의 아픔이 반영된 지명이다. 약 1km를 걸으면 목재 덱이 끝나는 지점에 한방생태숲이 있다. 조성한 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은 생태숲이라 부르기 민망한 수준인데, 군데군데 벤치가 있어 쉬어가기 좋다.


경치가 빼어난 데다 산책로까지 잘 갖춘 의림지 주변 산자락엔 일찌감치 전원주택단지가 들어섰다. 건강한 먹거리를 내세우는 식당과 카페도 주변에 몰려 있다. 꿀참나무 식당은 도토리묵 요리를 전문으로 한다. 흔히 맛보는 묵밥이나 묵무침 외에 정갈하게 차려낸 묵전과 묵전병도 맛볼 수 있다. 오디향 식당은 뽕나무 열매인 오디를 넣은 돌솥밥과 샐러드, 팬지와 패랭이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오색꽃비빔밥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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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림지 주변 꿀참나무 식당의 묵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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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림지 인근 오디향 식당의 오색꽃비빔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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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방생명과학관의 '홉테라피'. 제천에서 생산한 홉을 뜨거운 물에 우려 손발을 담그거나 얼굴에 김을 쐬는 체험 프로그램이다.

‘한방 제천’의 중심은 의림지에서 멀리 않은 제천한방엑스포공원이다. 예부터 약초 집산지였던 제천의 한방산업을 알리기 위해 조성한 시설로 충북에서 웰니스 관광지로 홍보하는 곳이기도 하다. 체험과 전시실로 꾸민 한방생명과학관, 각종 발효 제품을 전시하고 체험하는 국제발효박물관, 다양한 방향 식물이 자라고 있는 약초허브식물원 등으로 구성된다. 한방생명과학관의 ‘홉테라피’는 대표적인 체험 프로그램이다. 제천에서 재배한 맥주 원료인 홉 열매를 뜨거운 물에 우려 손과 얼굴을 마사지한다. 홉차 만들기와 족욕 체험도 가능하다. 한의원도 있지만 대중적인 체험 프로그램이 없는 점은 아쉽다.


제천=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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