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정 계약? 벼락스타 일탈?... 중국계 아이돌ㆍK팝 기획사 분쟁의 그늘
워너원 출신 라이관린 큐브와 계약 갈등… 중국계 아이돌 7명 분쟁
반복되는 잡음… 중국 진출 전초기지 된 K팝 시장ㆍ부실 관리 비판도
아이돌그룹 슈퍼주니어의 중국인 멤버 한경(왼쪽부터)과 엑소의 중국인 멤버 루한, 타오, 크리스는 모두 한국 소속사와 갈등을 빚고 팀을 떠났다.워너원 멤버였던 대만 국적의 라이관린은 소속사와 계약 관련 법적 분쟁을 벌이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ㆍ큐브엔터테인먼트 제공, 연합뉴스 |
처음엔 D등급을 받았다. 랩과 춤 실력이 부족한 탓이었다. 그는 가수 데뷔를 준비한 지 반년밖에 안 된 연습생이었다. 두 번째 평가에서 소년은 F등급을 받았다. 최하등급이었다.
심사위원들에게 낙제점을 받은 연습생은 우여곡절을 딛고 워너원 데뷔조로 최종 합류했다.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하얀 피부, 순정만화 주인공을 쏙 빼닮은 그에게 네티즌이 투표로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결과였다. 대만 국적의 연습생 라이관린은 2017년 방송된 Mnet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101’ 시즌2에서 ‘기적의 아이콘’이었다.
라이관린은 워너원으로 활동하며 K팝 스타로 성장했다. 그런 그는 지난 23일 서울중앙지법에 소속사인 큐브엔터테인먼트(큐브)를 상대로 전속계약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서를 냈다. 가요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라이관린은 이미 지난달 큐브에 내용증명을 보냈다. 양측은 중국 계약 문제로 골이 깊어졌다고 한다. 큐브는 라이관린의 중국 매니지먼트 권한을 타조엔터테인먼트(타조)에 양도했고, 타조는 그의 활동을 위해 다시 중국 내 H 에이전시를 끌어들였다. 큐브는 “모두 라이관린의 동의를 받고 진행한 일”이라고 주장했지만, 라이관린은 “동의 없이 권리를 양도했다”고 맞서며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깊어진 불신… 한ㆍ중 교류 걸림돌 우려
라이관린과 큐브의 법적 다툼을 계기로 중국계 K팝 스타와 한국 소속사의 끊이지 않는 갈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중국계 연습생들은 K팝의 체계적인 아이돌 양성 시스템에 반해 한국으로 건너와 가수 데뷔를 준비했다. 이렇게 탄생한 중국계 K팝 스타는 아시아 최대 음악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으면서도 문화 장벽이 높은 중국과 한국 사이 음악 시장에 다리를 놓는 교두보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하지만 중국계 K팝 스타와 한국 기획사 간 법적 분쟁이 반복되면서 서로에 대한 불신이 쌓여 양국의 문화 교류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중국계 K팝 스타의 한국 기획사와의 마찰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아이돌 그룹 슈퍼주니어 중국인 멤버였던 한경이 2009년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SM)를 상대로 전속계약 무효 소송을 제기하고 중국으로 떠난 뒤 중국인 멤버들의 K팝 아이돌 그룹 이탈은 이어졌다. 엑소에선 중국인 멤버였던 크리스, 루한, 타오가 SM과 갈등을 빚으며 2014~2015년에 차례로 팀을 떠났다. 중국인 멤버 2명으로 이뤄진 테이스티도 소속사인 울림엔터테인먼트와 법적 분쟁을 치른 뒤 그룹 활동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국에서 데뷔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독자적 연예 활동에 나서는 게 일반적 행보였다.
”한국과 비교할 수 없는 중국 수익” VS “기획사 갑질”
중국계 K팝 스타의 잦은 이탈은 중국 음악 시장의 영향력 확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중국인 연습생 네 명으로 아이돌 그룹을 준비 중인 한 관계자는 “한국 유명 오디션 프로그램이나 K팝 아이돌 그룹 데뷔를 통해 얼굴을 알린 뒤 중국에서 활동하면 국내 활동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익이 보장된다”며 “중국에서 현지 독자 활동에 대한 유혹을 쉬 뿌리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일부 중국계 K팝 스타가 한국을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로 활용하는 셈이다. 얼굴을 알린 뒤엔 말 안 통하는 한국에서 고생하느니 중국에서 연예 활동을 집중하기 위해 한국 활동을 원하지 않는 중국계 K팝 스타도 있다고 한다. 그들의 데뷔를 도운 기획사 등 가요계 내부에서 중국계 K팝 스타의 일탈을 ‘먹튀’라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유다.
하지만 일부 K팝 기획사의 ‘갑질’과 부실한 매니지먼트에 대한 체질 개선에 대한 목소리도 적지 않다.
라이관린은 큐브가 중국 활동 권리를 대행업체에 넘기면서 전속계약금의 수십 배에 이르는 돈을 받았는데, 자신에게 설명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중국 연예 활동 권리를 제3자에 양도해 현지 활동에 차질을 빚었다며 큐브에 책임을 묻기도 했다. 한국 연예인의 중국어권 활동을 지원하는 한 관계자는 “K팝 아이돌이 중국 활동을 할 땐 현지 지사가 움직이거나 한 곳의 현지 에이전시가 총괄하는 게 일반적”이라며 “큐브처럼 라이관린 중국 활동에 두 회사가 권리를 가진 사례는 드문데 여러 회사가 이해관계로 얽혀 잡음이 인 것 같다”고 말했다.
공작소 설치 지원ㆍ중국 활동 그룹 제작 ‘우회 전략’
중국계 K팝 스타의 이탈이 잇따르자 국내 기획사는 우회전략을 쓰기 시작했다. 중국계 K팝 스타의 1인 기획사인 공작소 설립을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그룹 활동과 중국 내 솔로 활동 병행으로 중국계 K팝 스타를 잡아두려는 전략이다. 아이돌그룹 에프엑스의 중국인 멤버인 빅토리아, 엑소의 또 다른 중국인 멤버인 레이, 갓세븐의 홍콩 출신 멤버 잭슨 등이 공작소를 차려 중국어권 개별 활동에 열을 올리고 있다.
중국인 연습생을 키워 한국에서 활동하는 아이돌 그룹을 만드는 대신 아예 현지에서 활동하는 그룹을 기획하기도 한다. 올 초 데뷔한 SM의 웨이션브이와 JYP엔터테인먼트가 지난해 중국에 내놓은 보이스토리가 대표적 사례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한국의 기획사들이 중국계 연습생들이 명성을 얻기 위한 도구화가 되지 않으려면 해외 활동 전략을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며 “한국에서 데뷔해 중국에서만 활동하려는 아이돌이 느는 만큼 국내 팬들 사이 불거질 수 있는 반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매니지먼트 전략을 수정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