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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비밀 벙커, 미디어아트로 되살아나다

꼭 가봐야 할 전국의 업사이클링 플레이스

 

제주 해저광케이블 관리소

‘빛의 벙커’로 9월 재탄생

프로젝션 맵핑기술 이용

클림프ㆍ샤갈 작품 등 선보여

마포 석유저장기지ㆍ부천 소각장 등

폐기된 건물과 문화예술과 결합

업사이클링 플레이스로 진화

버려진 비밀 벙커, 미디어아트로 되살

프랑스 프로방스 채석장에서 열린 디지털 아트 프로젝트 ‘빛의 채석장’. 같은 전시가 올 9월 제주 성산읍 ‘빛의 벙커’에서 열린다. 컬처스페이스 제공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에 군인들의 철벽 통제로 오랜 시간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 벙커가 있다. 바깥에서 보면 둘레길 아래 산자락이지만 실은 가로 100m, 세로 50m, 높이 10m의 거대한 콘크리트 벙커를 흙과 나무로 덮어 위장한 인공 산이다. 1990년 KT(한국통신)가 국가 기간 통신망을 운용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 한반도와 제주 사이에 설치된 해저 광케이블을 관리하던 곳으로, 어떤 폭격을 당해도 견딜 수 있도록 정교하게 건축됐다. 벽 두께 3m, 지붕 용적 5,500㎥(레미콘 1,000대가 일시에 쏟아 부어야 하는 물량), 외부 소음 완전 차단, 내부 온도 상시 16도를 유지하는 건물은 2000년대 들어 폐쇄된 후 20년 가까이 방치됐다.

버려진 비밀 벙커, 미디어아트로 되살

제주 ‘빛의 벙커’에서 열릴 디지털 아트 프로젝트 ‘아미엑스’. 컬처스페이스 제공

이곳이 디지털 아트 전시관으로 다시 문을 연다. 올해 9월 개관하는 ‘빛의 벙커’다. 프랑스 각지의 버려진 장소나 시설에서 프로젝션 맵핑기술을 이용한 미디어 아트 프로젝트 ‘아미엑스’를 진행해온 프랑스 컬처스페이스사는 이곳을 해외 최초의 상설 전시관으로 낙점했다. 아미엑스는 샤갈, 클림트 등 예술 거장들의 작품을 100여 개의 비디오 프로젝터와 수십 개의 스피커를 이용해 시각과 청각으로 즐길 수 있는 최신 디지털 아트다. 지금까지 프로방스의 채석장과 파리 주조 공장 등에서 아미엑스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오랫동안 무성한 풀과 나무에 묻혀 있던 제주의 벙커도 올 가을 클림트와 샤갈의 그림으로 뒤덮일 예정이다.

버려진 시설이 독특한 문화예술공간으로

버려진 비밀 벙커, 미디어아트로 되살

제주 ‘빛의 벙커’ 외부 전경. 가로 100m 규모의 거대한 콘크리트 벙커가 흙과 나무에 덮여 20여년 간 방치돼 왔다.

패션 브랜드에서 시작한 업사이클링(up-cycling) 바람이 제품을 넘어서 건축물과 시설로 확장되고 있다. 업사이클링이란 버려진 것에 새로운 가치를 더해 재탄생시킨다는 의미로, 재활용을 뜻하는 리사이클링에서 가져온 말이다.


외국에서는 기차역을 개조한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 종합병원을 개조한 스페인 레이나 소피아 국립 미술관, 화력발전소를 리모델링한 테이트 모던 미술관 등 수십 년 전부터 버려진 공간이나 시설을 성공적으로 재생한 사례들이 이어져 오고 있다.


국내에서도 제품 중심이던 ‘업사이클링’이 이제는 기능 상실로 용도 폐기된 건축물이나 산업시설로 확장되고 있다. 이른바 ‘업사이클링 문화명소’가 늘고 있는 것. 방치된 건축물의 단순한 복원을 넘어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문화예술 명소로 탈바꿈시키는 프로젝트들이 전국 단위로 활발히 진행 중이다.


기존 공간이 지닌 역사적 의미에 현대적인 콘텐츠로 문화적 가치를 더해 재탄생한 ‘업사이클링 플레이스’는 방문객들에게 과거와 현재가 함께 호흡하는 색다른 경험과 가치를 선사한다. 최근 1년 내 변신에 성공하여 개관했거나 또는 올해 개관 예정인 업사이클링 문화예술 공간들 중 올해 꼭 가 봐야 할 곳들을 소개한다. 무용지물 폐수처리장은 복합문화공간으로, 버려진 카세트 공장은 예술공장으로 변신했다.

폐쇄된 쓰레기 소각장, 부천아트벙커B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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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아트벙커B39 3층 촌지공간. 가동이 중단된 쓰레기소각장을 문화예술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부천문화재단 제공

1995년 준공된 경기 부천 삼정동 쓰레기소각장은 하루 200여톤의 쓰레기를 소각하던 곳이다. 2010년 대장동에 새로운 소각장이 생기면서 가동이 중단됐다. 부천시는 2014년부터 이곳을 문화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95억원을 들여 복합문화시설로 재탄생시켰다. 전체면적 7,200㎡ 중 소각동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 3,100㎡를 개방 공간으로 꾸몄다. 1층에는 전시, 공연이 가능한 멀티미디어홀과 다목적 야외 공간인 중정, 휴식을 위한 카페가 들어서고 2층에는 문화예술, 인문교양,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의 교육이 가능한 교육실 4곳이 마련됐다. 3층부터 6층까지는 과거 소각장의 모습을 보존해 폐소각장 문화재생의 의미를 남겼다. ‘부천아트벙커39’라는 명칭은 부천과 문화예술, 소각장의 쓰레기벙커를 의미하며, ‘B’는 부천의 영문표기(Bucheon)와 벙커(Bunker)의 약자이다. 39는 소각장 벙커 높이 39m를 의미한다.

보안 1급의 석유비축기지, 마포 ‘문화비축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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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 문화비축기지 외부 전경. 석유파동에 대비해 1978년 지어진 1급 보안시설이다. 문화비축지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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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 문화비축기지 내부. 복합문화공간으로 업사이클링됐다. 문화비축기지 제공

석유파동에 대비하여 1978년 서울 매봉산 자락에 지어진 석유비축기지는 1급 보안 시설로 운영되어 40년 이상 시민들의 접근을 차단해왔다. 상암월드컵경기장이 들어서면서 위험 시설로 분류, 2000년에 폐쇄했다가 2013년 시민 아이디어 공모를 통해 지난해 9월 ‘복합문화공간’으로 깨어난 것. 서울광장 10배 규모의 거대한 공간 속에 잠들어있던 5개의 탱크는 각각 시민을 위한 커뮤니티센터와 공연장, 강의실 등으로 변신했고 석유비축기지가 ‘문화비축기지’로 바뀌는 40여 년의 역사를 기록한 전시공간도 마련됐다. 기지의 주요 공간과 예술가를 매칭해 공공 예술작업 및 공연 등 시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이다.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공원이 필요한 아이들에게도 새로운 놀이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25년간 방치된 카세트 공장, 전주 팔복예술공장

버려진 비밀 벙커, 미디어아트로 되살

전주 팔복예술공장 외부 전경. 쏘렉스사가 1979년부터 카세트테이프를 만들던 공장이다. 팔복예술공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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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예술공장 내부. 올해 3월 문화예술공간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팔복예술공장 제공

팔복예술공장은 주식회사 쏘렉스가 1979년부터 카세트테이프를 만들던 공장으로 1991년까지 운영하다 문을 닫았다. 이후 2016년 전주시와 전주문화재단이 문화재생사업을 추진하면서 올해 3월 문화예술공간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녹슬고 빛바랜 건물 외벽에 철골 구조물을 덧대었을 뿐 최대한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살렸다. 공간은 크게 1단지와 2단지로 나뉘며 국내외 작가 교류를 위한 창작공간과 랩(LAB)실, 셀(Cell) 스튜디오로 예술 분야 종사자들에게 창작활동 공간을 제공한다. 팔복예술공장에서만 구입 가능한 아이템이 있는 아트숍과 예술가와 주민이 협업해 운영하는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의 카페는 이미 수준 높은 커피 맛을 갖춘 핫 플레이스로 알려졌다. 팔복예술공장의 두 단지를 잇는 컨테이너 브릿지는 예술가가 추천한 책을 소개하는 ‘백인의 서재’로 꾸려졌다.

옛 제주대 병원, 제주 예술공간 이아

버려진 비밀 벙커, 미디어아트로 되살

예술공간 이아 내부 전시장. 제주대 병원 이전으로 버려진 건물이 예술공간으로 부활했다. 예술공간 이아 제공

버려진 비밀 벙커, 미디어아트로 되살

예술공간 이아 지하 1층 갤러리. 예술공간 이아 제공

제주대학교 병원이 이전하면서 유휴시설이 된 병원 건물이 8년 만에 리모델링을 통해 지난해 5월 ‘예술공간 이아’로 다시 태어났다. ‘이아(貳衙)’라는 이름은 제주목사를 보좌하던 판관이 집무를 보는 행정관청의 이름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의 행정기관에서 자혜병원, 도립병원을 거쳐 100여 년 동안 제주 도민들의 아픔을 달래주던 곳이다.


예술공간 이아는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전시장, 공연장, 창의문화교육공간, 카페, 주민 소통 공간인 아트랩, 영상편집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내작가 8인과 해외작가 1인이 레지던시에 머물며 제주의 신화와 전설, 인문과 자연환경에 대해 연구하는 시간을 갖고 이를 작업으로 연결하도록 지원해 주고 있다. 도민에게는 전시와 교육, 예술가와 함께하는 다양한 문화 활동으로, 여행자에겐 제주의 예술과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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