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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서 건진 가문의 저력… 광주·전주 두 성씨가 안동 명문가가 된 까닭

안동 군자마을과 무실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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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와룡면 안동호 주변 산자락에 자리한 군자마을. 약 2km 떨어진 안동댐 수몰지구에서 중요 건물만 옮겨와 새로 조성한 광산김씨 고택 단지다.

“제대로 알고 행세 좀 하는 (안동) 사람들은 사실 남들이 양반으로 불러주는 걸 그리 탐탁게 여기질 않아요.” 고유명사가 되다시피 한 ‘양반고을’ 안동에서 들은 뜻밖의 답변이다. 김방식 군자마을 관장은 속된 말로 ‘태어나 보니 양반’, 거저 주어진 신분이 뭐 자랑거리가 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그보다는 선비 집안이라거나 군자답다는 표현을 더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안동댐과 광산김씨 군자마을

군자마을은 안동 시내에서 동북쪽 와룡면 오천리에 위치한 광산김씨 고택 단지다. 1974년 안동댐 공사로 수몰된 600년 세거지에 흩어져 있던 묘우, 종택, 누정 등을 약 2㎞ 떨어진 산자락으로 옮겨 조성한 마을이다.


가문의 역사가 남아 있는 건물을 옮겨야겠다고 결심한 건 김 관장의 부친이었다. 형이던 종손이 후사 없이 일찍 세상을 뜨자 그 역할을 대신 맡았다. “문중을 지키자면 일종의 상징물, 집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야 사람이 모이고 회의도 하죠.” 그렇다고 건물을 모두 옮길 수는 없고 중요한 건물만 추렸는데도 20여 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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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식 관장이 군자마을과 광산김씨 예안파의 내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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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댐 수몰지구에서 고택을 옮겨 조성한 군자마을. 광산김씨 예안파 600년 역사가 집약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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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마을 중앙에 수몰지구에서 이식한 어린 느티나무가 제법 넓게 가지를 펼치고 있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이삿짐 꾸릴 정도의 보상금으로는 어림도 없어 문중에서 모금도 하고 땅도 팔았다. “집 한 채 옮길 때마다 산 하나씩 팔았다고 생각하면 돼요.” 당시 장비라고는 불도저가 전부여서 해체한 건물 기둥을 이고 지고 끌어오는 건 문중 사람들 몫이었다.


옮겨 지은 여러 건물 중에서 탁청정과 후조당 종택은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탁청정 종택과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 침락정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이뿐만 아니다. 유물전시관인 숭원각에는 희귀 고서와 문집, 교지, 토지문서, 서간문 등 4,000여 점이 보관돼 있다. 고문서 7종과 서적 13종은 보물로 지정됐다. 한 가문이 20대에 걸쳐 한곳에 살아오면서 수많은 전란 속에서도 사료를 온전히 보존한 건 유례를 찾기 힘들다.


광산김씨는 지금의 광주를 기반으로 한 성씨다. 고려 후반 중앙으로 진출했는데 한 분파가 안동으로 들어왔다. 오천(외내) 입향조는 김효로(1454~1534)다. 아들 김연과 김유는 조선 중종 때 문신으로 향리에서 명망이 높았다. 군자마을에서도 중요한 건물로 치는 탁청정은 김유의 호, 후조당은 김연의 아들 김부필의 호다. 이때부터 후손들은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 등 당대의 명현 가문과 통혼하며 전형적인 영남 사족으로 터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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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마을 방문객이 은행잎이 곱게 떨어진 벤치에서 호젓하게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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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마을 초입의 '의병장군 근시재선생 순국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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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마을 대문 기둥에 '선경유방 유장백세(善慶遺坊 流長百世)' 글귀가 걸려 있다. 나눔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문구다.

군자마을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문신 한강 정구(1543~1620)가 안동부사로 재직하던 시절 이곳을 방문해 남긴 ‘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라는 기록에서 유래한다. 일곱 군자는 김부필, 김부의, 김부인, 김부신, 김부륜, 금응협, 금응훈이다. 모두 퇴계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던 형제거나 사촌간이고, 두 금씨는 이들과 내외종간(고종사촌과 외사촌)이다. 당대의 대학자가 이렇게 불러 주었으니 더할 나위 없는 가문의 영광이었다.


광산김씨가 안동에서도 명문가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건 높은 벼슬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마을로 통하는 길 양쪽 대문 기둥의 글귀가 예사롭지 않다. 선경유방 유장백세(善慶遺坊 流長百世). 선을 행하고 덕행을 쌓음으로 집안에 경사가 있고, 그 가풍을 영원히 이어가라는 의미다. 제 아무리 양반이라도 나누고 베풀지 않으면 민심이 멀어지기 마련이고, 그 지위를 계속 누리기 힘들다는 지혜가 담겼다.


마을로 들어서면 고풍스런 전각에 앞서 유물전시관 옆의 ‘의병장군 근시재선생 순국기념비’가 방문객을 맞는다. 근시재 김해(1555~1593)는 약관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예문관검열에 올랐으나 곧 사임하고 낙향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예안의병장으로 추대돼 안동, 예천, 군위 등지에서 왜적을 소탕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경주에서 치열한 전투 중 사망했다. 당시 나이 겨우 3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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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 600년 세거지의 고택을 옮겨 조성한 안동 군자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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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마을 탁청정. 한석봉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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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마을 고택 담장에 나뭇잎이 쌓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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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마을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기와 담장에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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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마을 고택 마당의 가을 장식.

마을 한가운데 마당에는 ‘항일애국지사 김남수선생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김남수는 1919년 예안 장터에서 열린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것을 비롯해 서울에서 민중운동, 노동운동을 이끌었다. 1930년 일제에 체포돼 3년 가까이 징역살이를 한 후에도 4차례 투옥되고 10여 차례나 구금됐다. 안타깝게도 광복을 코앞에 둔 1945년 47세로 순국했다. 문중의 숱한 인물들 중에서도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선 두 사람을 기리는 모습에서 가문의 저력이 엿보인다.


마당 바로 위에는 수몰지구에서 이식한 어린 느티나무가 제법 넓게 가지를 펼치고 있다. ‘이 나무는 나무이면서 역사이고 정신이다.’ 바닥에 새긴 헌사가 대서사시처럼 비장하다.


고택은 느티나무 뒤편 언덕과 좌우에 자리 잡고 있다. 내력을 알면 나무기둥이며 돌담과 기왓장 하나하나가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후조당은 보수 공사로 들어갈 수 없지만, 다른 건물은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한석봉의 현판이 걸린 탁청정에서 그윽하게 마을을 조망해도 좋고, 지애정 카페에서 차를 마시거나 볕 좋은 뜰에서 골짜기 깊숙이 파고든 호수 정취를 즐겨도 좋다.


김 관장은 관람객이 그저 편하게 구경하고 가면 좋겠다고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잖아요. 사전에 공부를 좀 하고 오면 한 채 한 채에 깃든 정성과 가치가 느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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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댐 아래 낙강물길공원은 근래 인증사진 명소로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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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댐 아래 조정지댐 호수에 설치된 월영교. 경관조명이 수면에 비쳐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군자마을을 삼킨 안동댐 부근은 안동의 대표 관광지다. 댐 바로 아래 낙강물길공원은 아담한 숲길과 연못이 그림 같은 풍경을 빚어 ‘인증사진’ 명소로 소문이 났다. 그 아래 조정지댐 호수를 가로지르는 월영교는 야경이 특히 은은하다. 국보 법흥사지7층전탑과 일제강점기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한 석주 이상룡의 생가 임청각도 인근에 있다.

임하댐과 전주류씨 무실마을

임동면 수곡리(무실마을)의 전주류씨 집성촌은 1980년대 임하댐 수몰지구에서 옮긴 마을이다. 조선 중기 류성이 인근 내앞마을 의성김씨 맏사위로 들어와 수곡리에 정착하며 집성촌을 이뤘다. 류성의 맏아들 류복기(1555~1617)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작은아들 류복립은 외삼촌인 학봉 김성일을 따라 진주성을 지키다 순절했다.


일대의 전주류씨는 모두 류복기의 후손인데 나주목사 류정휘, 밀양부사 류지, 청백리에 오른 류경시, 공조참의 류승현, 형조참의 류관현, 대사헌 류정원 등 무수한 인물을 배출하고, 이름난 선비가 끊이지 않아 지역의 명문으로 성장했다. 상변통고 22권을 쓴 동암 류장원(1724~1796), 50여 권의 문집을 남긴 정재 류치명(1777~1861)은 퇴계 학맥의 대표 학자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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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댐 수몰지구에서 이주한 안동 수곡리(무실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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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댐에서 이건한 전주류씨 종택과 수애당 건물이 무실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일제강점기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류시연, 개화기 협동학교를 창설하고 사회 개혁에 매진한 류인식, 파리장서사건의 주역 류필영, 임시정부 국무위원 류림 등 근대사에 이름을 남긴 이도 수두룩하다.


무실마을은 뒤편 아기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마을을 둘러싸는 형상으로 흐른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수몰지구에서 이전한 마을에 현재 6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그중 36가구가 전주류씨다. 고택은 군자마을처럼 대대적으로 옮기지 못하고 일부 중요한 건물만 이건했다.


류복기를 제향하는 기양서당과 무실종택, 류성의 처 의성김씨 정려문, 1939년 류진걸의 호를 따서 지은 수애당이 마을 서편에 자리 잡고 있다. 종택과 수애당 앞에는 망향정을 중심으로 공원이 조성돼 있다. 넓은 호수를 품은 늦가을 풍경이 고즈넉하다. 불천위(신주를 묻지 않고 영구히 제사 지내는 것을 나라에서 허락한 사람의 신위)에 오른 류치명의 정재종택은 강 건너 언덕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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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민박으로 활용되는 무실마을 수애당 건물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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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풍경의 전주류씨 무실마을 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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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실마을 기양서당에 수몰지구에서 함께 옮겨온 300년 은행나무가 심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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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실마을 기양서당에 은행잎과 열매가 곱게 깔려 있다.

무실마을 주민의 상당수는 구미 해평면 일선리로 집단 이주해 마을을 형성했다. 만령초당, 삼가정, 용와종택, 침간정, 동암정 등 많은 누정과 고택이 무실이 아닌 일선마을로 옮겨 갔다.


임하댐 아래 내앞마을은 입향조 류성의 처가인 의성김씨 집성촌이다. 종택을 비롯해 여러 고택이 고즈넉하게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데, 1885년 김대락이 지은 백하구려는 일제강점기 안동 독립운동사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그의 집안은 ‘삼천석 집’으로 불렸다. '사람 천석, 글 천석, 살림 천석'으로 학문과 경제력을 모두 갖췄다는 의미다. 명문가의 장남으로 남부러울 것 없던 김대락은 1907년 안동 지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인 협동학교가 설립되자 나라의 장래를 위해 백하구려 사랑채를 확장해 교실로 사용하게 했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후에는 집과 재산을 모두 처분한 후 일가친척 150여 명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 건립 자금을 대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해 힘썼다. 내앞마을 의성김씨 전체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이주한 거나 다름없었다.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이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이 마을에 자리 잡은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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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김씨 집성촌인 내앞마을 백하구려. 안동독립운동의 상징적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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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앞마을 하천변의 개호송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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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앞마을에서 하천 건너 언덕에 자리 잡은 백운정과 주변 단풍이 임하댐 조정지댐 수면에 곱게 비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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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군자마을과 무실마을 여행 지도. 그래픽=이지원 기자

마을 앞 하천의 개호송 숲과 백운정은 예부터 아름답기로 이름난 경관이다. 개호송 솔숲은 광해군 때인 1617년 의성김씨 문중에서 하천 농경지를 보호하기 위해 소나무 1,000여 그루를 심어 조성했다. 백운정은 강 건너 솔숲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호수에 비친 절벽과 정자가 그림처럼 고요하고 평화롭다.


안동=글·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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