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이혼하고 여자와 산다, 후회하지 않는다, 행복하니까”
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호스피스이자 레즈비언 김인선
독일 생활 47년…이혼 후 ‘커밍아웃’, 호스피스 단체 만들어 이방인들 죽음 지켜
독일로 이주해 산 지 47년, 호스피스 단체를 만들어 해외동포상, 비추미상을 받기도 한 김인선씨가 커밍아웃했다. 4월 말 귀국해 오는 20일 출국하는 그를 10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사진은 다양한 성 정체성을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과 그의 얼굴을 합성해 만들었다. 류효진 기자 |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딱 두 사람이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인정해주고 사랑해준 이가.
태생이 혹독했다. 부인이 따로 있는 남자의 아이였다. 어머니는 그를 가졌을 때 떼어내려 부단히 애를 썼다. 찬 개울물에 몸서리가 쳐질 때까지 몸을 담갔는데도 떨어지지 않고 태어났다. ‘인테리’였던 어머니 인생의 혹 같았을까. “꼴도 보기 싫어”, “제 아빠처럼 어쩜 저렇게 고집이 세”, “(아빠를 닮아) 못 생겼어.” 밀쳐내는 어머니 대신 그를 껴안은 건 외할머니였다. 지금도 생각하면 마음 저 아랫목이 뜨끈해져 오는 기억. 그가 밤새 공부를 하고 있노라면 옆에 앉아 연필을 깎으며 자리를 지키던 외할머니. 어쩌면 사는 이유였을 외할머니는 그가 열다섯 살에 세상을 떴다. 그는 생각했다. ‘세상이 끝났구나.’
그로부터 23년 뒤 독일에서 만난 옆지기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외할머니가 보내준 사람일까.” 어떻든 우연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운명적인 사랑이다. “어머니조차 나의 존재 자체부터 거부했으니,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고 인정해줄 사람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지요.” 이혼까지 감행할 만한 확신의 감정이었다.
그 30년 동반자가 그와 같은 성별인 여성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서울퀴어문화축제 20주년을 맞아 지난 1일 서울광장 주변에서 열린 ‘서울퀴어퍼레이드’에 참석한 그를 한국은 떠들썩하게 반겼다. 보수 개신교 목사들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성애 퇴치, 깨끗한 한국”을 외쳤다.
“하나님이 과연 동성애자는 사랑하지 않고, 이성애자만 사랑하시는 분일까요? 예수님이 만약 오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내 생각엔 우리(퀴어)와 함께 행진하셨을 것 같은데!”
신학을 공부한 그는 그래서 이번 축제에 다양한 성별을 상징하는 무지개 무늬 십자가를 만들어 들고 나갔다.
4월 30일 한국에 들어와 이달 20일까지 머무는 김인선씨를 10일 만났다. 그는 한국에서 산 것보다 독일에서 산 기간이 배 이상 많다. 스물둘에 독일로 가 벌써 47년이 됐다.
세상은 주로 그의 성 정체성에 주목하지만, 실은 그는 독일에서 호스피스 자원봉사 단체를 만들어 일한 지 15년이 됐다. 다른 나라에서 이주해온 이들의 죽음을 지키는 일이다. 수 없는 생의 종말을 목도한 그는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야 내일 죽어도 미련이 없다”고 말했다. 쳇바퀴 돌 듯 노동의 계획에 짜맞춰진 삶에선 기대하기 힘든 일일 거다. 그를 넉 달 째 좇으며 촬영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인터뷰에 동행했다.
‘무지개 십자가’ 들고 퀴어퍼레이드
김인선씨의 매력은 이가 훤히 보일 정도로 호탕한 함박 웃음이다. 또 거침이 없고 솔직했다. 류효진 기자 |
-나이를 물어도 되나요?
“그냥 (이름 옆에) 괄호 열고 퀘스천 마크(물음표)를 찍으면 어때요? 하하하.”
-독일에선 나이 질문 받는 일이 별로 없죠?
“맞아요. 나이가 뭐 중요해. 물어보는 사람도 없고요! 하하.”
-다른 기사를 보니 1950년 생이라고 돼있더라고요.
“맞아요.”
마주한 지 몇 분 안됐는데 호탕한 웃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입을 크게 열고 웃는 모습이 보는 이를 시원하게 한다.
-이번 20주년 퀴어축제 어땠나요?
“내내 분위기가 아주 좋았어요. 한채윤(축제 기획단장)씨가 이렇게 지속적으로 행사를 해낸 게 정말 대단해요. 퀴어축제에 거의 매년 왔는데, 그간은 공식적으로 초청받고 온 건 아니었어요. 호스피스 학회에 오거나 한국에 다니러 온 김에 들른 거였죠. 지난해 인천 디아스포라 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내가 성소수자란 걸 밝혔거든요. 그 뒤에 한채윤씨가 공식 초청을 했죠.”
-이번에도 개신교 단체들이 퀴어축제를 노골적으로 혐오하는 집회를 했죠.
“맞아요. 내가 온 이유는 성 정체성 때문에 고통 받는 젊은 사람들을 돕고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 위해서죠. 그런데 교회 목사들이 그렇게 반대한다고 해서 대체 이유가 뭔지 얘기라도 해보려고 했는데, 그건 안됐고요. 보니까 치료를 받아야 한다느니, 지옥에 가라느니 상식에 어긋나는 주장을 하더군요.”
-신학으로 석사 학위까지 받았고 또 개신교 신자인데, 그들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가 공부한 하나님은 그렇지 않은 분이죠.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는 없어요. 근본적인 기독정신과 맞지 않아요. 각자 살아가는 태도나 방법이 다르다고 모욕을 할 수 있나요? 그건 그 사람의 삶이에요. 신앙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죠. 왜 목사가 야단인가요? 자기 믿음이나 좀 검토해봤으면 좋겠어요.”
-독일에선 동성애자들을 어떻게 대하나요?
“(성 정체성을) 물어보는 사람은 없어요. 수현이와 함께 산 지 30년이니 알 사람은 다 알겠죠. 베를린에 사는데 한인교회도 함께 다니거든요. 그런데 한인교회에서도 (성 정체성은) 터부테마(금기)예요. 실례라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고요. 그런데 한국 와서 언론에 제 얘기가 나오고 하니까 벌써 한인교회 분위기가 싸늘하다는데요? 하하.”
나는 어머니 인생의 혹이었을까
김인선씨가 1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우크라이나 참가자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그는 무지개 깃발로 둘러 맨 십자가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문구를 써 붙이고 퍼레이드에 참여했다. 뉴스1 |
-고향이 경남 마산이죠?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도 마산에서 나오고 중학교도 마여중(마산여중) 들어갔죠. 2학년 때 서울로 왔어요. 서울에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혼자서 고생 많이 하다가 독일로 갔죠.”
그는 태어나서부터 독일로 가기 전까지 우여곡절을 “고생 많이 하다가”란 말로 압축해 말했다. 그 고생이 궁금했다.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들었어요.
“갓난이를 외할머니가 받아서 키우셨죠. 아버지에겐 본처가 있었어요. 본처한테 낳은 아들이 셋, 그리고 바람을 피워 생긴 다른 자식들이 많았죠. 제가 그 집에 갔을 때 보니, 본처 아들 셋 말고도 자식이 일곱이 있었던가 그래요. 완전 고아원 같았죠. 거기다 저까지 왔으니, 맨날 큰엄마와 아버지가 싸웠죠.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있을 때는 많던 재산도 아버지가 노름을 해서 다 팔아먹었고요. 그러니 제가 그 집에 잘 있을 수 있었겠어요?”
-어머니는요?
“아마 어머니는 지금처럼 인공유산을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런데 그 시절엔 그럴 수가 없으니 찬물에 몇 시간씩 들어가 앉아있었대요. 그런데도 제가 안 떨어진 거죠. 어쩔 수 없이 낳고 나서 외할머니가 일본에 사는 외삼촌한테 가서 공부를 하라고 해서 바로 건너갔다가 내가 여덟 살 때쯤 돌아왔어요. 보자마자 엄마는 ‘어서 지 아빠한테 보내라’고 난리고, 외할머니는 ‘어떻게 키운 내 새끼인데 보내냐’고 하고. 어머니가 신(新)마산의 아버지 집으로 보내면,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 서너 시간 거리 구(舊)마산의 외가까지 걸어오곤 했어요. 어머니가 또 가라고 하면 외할머니와 껴안고 울다가 다시 가고. 그걸 수 없이 했죠.”
-어머니는 왜 그랬을까요?
“순진한 때 아버지 만나서 (실수로) 나를 낳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내가 엄마한테 혹이었던 거죠. 제가 또 아버지를 많이 닮았대요. 저를 보면 자기를 그렇게 만든 남자가 생각나니까 싫었던 건지.”
-그 시절에 어머니가 일본으로 유학을 갈 정도면 외가도 유복했나 봐요.
“맞아요. 거기다 우리 어머니는 뭐랄까 ‘인테리’ 같았어요. 하하. 외국어도 몇 개 국어를 했고요. 그러니 나만 없으면 완전한 자기의 삶을 살았을 테니 내가 미운 거죠. 같은 여자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전혀 안 되는 것도 아닌데, 어머니와 딸 사이잖아요. 나는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보기만 하면 나한테 안 좋은 얘기만 했죠. 사랑은 한 번도 보이지 않았어요.”
-어린 시절에는 힘들었겠네요.
“굉장히 힘들었죠. 그러니 그게 어떻게 나타나느냐면, 학교에 가면 선생들 늘 골탕을 먹이는 거죠. 문제아였어요. 하하. 부모님 모시고 오라고 그러면 외할머니가 가니까, 선생이 ‘이 집은 엄마 없어요?’ 그랬죠. 엄마는 절대 안 갔어요. 딸이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거 같았죠.”
나를 살린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니 세상도 끝나
부모는 그를 낳기만 했을 뿐 그에게 사랑을 불어넣어 생명으로 만들어준 건 외할머니였다. 류효진 기자 |
-외할머니에게는 엄마한테 못 받은 사랑을 다 받았나요?
“많이 받았죠. 완전히 핏덩이를 받아서 키우셨으니까. 밤에 공부를 하고 있으면 안 주무시고 옆에서 연필을 깎아줄 정도로 나라면 모든 정성을 다 쏟았어요. 외할머니가 엄마한테 늘 그랬죠. ‘인선이는 내가 키울 테니 걱정하지 말고 일이나 하라’고.”
그는 생각 났다는 듯 아버지의 일화를 꺼냈다.
“그 집 오빠(본처의 아들)가 대학에 들어가서 서울에서 자취를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나한테 편지를 보내서 뭐라고 했느냐면 가서 오빠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라는 거예요. 내가 답장을 이렇게 썼죠. 아버지라고도 안 불렀어요. ‘당신 한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자식들이 불행해지는 줄 아느냐. 아이만 세상에 태어나게 해놓고 책임도 안 지면서. 오빠는 무슨 오빠냐. 왜 내가 밥 해주고 빨래를 해 주느냐. 다시는 편지 하지 마라.’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들어보니 그때 며칠을 그 편지 붙들고 울었다고 하더군요. ‘당돌한 년’이라고 하면서. 하하.”
그런데 더 재미있는 건 어머니의 반응이다. “그 얘기를 듣고는 엄마가 막 야단을 치는 거예요. ‘그래도 아버지인데!’ 라면서.”
-편지 쓸 때가 몇 살이었나요?
“중2 때였어요. 얼마나 속이 시원했는지 몰라요.”
-어머니한테 받은 상처가 치유가 되던가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안되더라고요. 나에 대한 증오가 왜 그렇게 컸는지. 지금이라면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어머니한테 받지 못한 사랑을 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땠나요.
“열다섯 살 때였어요. 할머니가 많이 편찮으셨는데, 내가 다 수발을 했죠. 엄마는 얼씬도 안 하다 어느 날 와서는 가서 영화를 보고 오라더군요.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다녀오니까 할머니가 돌아가신 거예요. 가시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러신 건지, 왜인지 이유는 모르겠어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세상이 끝났구나’, ‘고생길이 열렸구나’ 생각했죠.”
-외할머니에게 받은 것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무조건적인 사랑, 조건이 없는 사랑. 그냥 우리 외할머니는 나라면 다 좋은 거야. 내가 원하면 뭐든지 해주셨어요. 그런데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친구가 그래요. 나에게 뭐든지 다 해주고, 내가 하는 건 무조건 좋아하죠. 우리 외할머니가 보냈나 할 정도예요.”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엔 어떻게 살았나요?
“어머니는 교사 생활을 했는데 그때 인천으로 파견을 나와있던 계부를 만났죠. 그때 어머니가 계부와 결혼하고 독일로 떠났어요. 어머니는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교사로) 사셨죠.”
뜻하지 않게 독일로
그가 기독교 신앙을 알게 된 건 어머니가 맡긴 독일의 수녀원에서였다. 이후 훔볼트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류효진 기자 |
-그때 어머니를 따라 독일로 간 건가요?
“아니에요. 그래서 한국의 이모들이 엄마한테 인선이는 어떻게 하느냐고 혼자 잘 살겠다고 가 버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계속 편지를 했죠. 그러니 엄마가 ‘니가 원하면 독일로 와. 내가 간호학생으로 초청해줄게’ 한 거죠. 나는 간호학생으로는 안 간다고 하니 엄마가 ‘주제에 이거 저거 가리고 있어. 어쨌거나 와’ 해서 간 거예요. 가 보니 어머니는 이미 아프리카로 떠났고, 수녀님들이 저를 맞이하더라고요. 엄마가 수녀원에 가서 저를 받아 달라고 한 거예요.”
-그 때 뭐가 되어야겠다 이런 생각은 없었던 건가요?
“그렇죠. 어렸을 때도 그랬고요. 그런데 수녀님들이 참 잘해주셨어요. 항상 평화로워 보였고요. 그 힘은 신앙 아니겠어요? 그래서 나도 수녀가 되고 싶다고 말했죠. 그러니까, 원장 수녀님이 그러시더군요. ‘수녀원은 인생의 도피처가 아니야.’”
땅은 낯설지, 말도 통하지 않지, 막막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벌어서 가라’고 했다. 그러니 일을 해야 했다. 음식점에서 서빙을 하고, 수녀원의 허드렛일을 도왔다. 스물둘에 왔는데 3년 반이 그렇게 훌쩍 지났다. 그렇게 번 돈으로 겨우 돌아온 한국은 예전의 한국이 아니었다. 그가 달라진 거였다. 그 때 그는 결심했다. ‘나는 여기서 못 살아. 여기서 살면 뻔해.’ 전근대적이고 가부장적인 그 시절 한국 사회에서 혼외자의 인생은 험난하기 십상이었다.
-다시 독일로 갔나요?
“마음을 잡고 다시 독일로 갔죠. 수녀원의 원장님을 찾아갔어요. 이제부터 공부를 하겠다고. 그랬더니 기다렸다고 하시더군요. 그때 간호 공부를 해서 간호사로 쭉 살았죠.”
-결혼도 했었죠?
“본에 있다가 쾰른으로 가서 한인교회를 다녔어요. 거기서 (전 남편을) 만났죠. 그 사람은 두 번째 결혼이었어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수입도 괜찮았고 책임감도 있어 보였죠. 이 남자라면 무난하게 살겠다 싶어서 결혼을 했어요. 그때 나는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남편이 그럼 공부를 하라고 밀어주기도 했고요. 독일은 학제가 한국과 달라서 다시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대학 입학 학력을 따서 대학(훔볼트 대학) 신학부에 들어갔죠.”
꽃으로 다가온 이수현
10여 년 전 독일에서 여행 중에 찍은 김인선(왼쪽), 이수현씨. 인선씨는 수현씨를 “똥땡이”, 수현씨는 “아가야”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사진을 받고 보니 두 사람이 무척 닮았다. 김인선씨 제공 |
한인교회에서 지금 함께 사는 이수현씨를 만났다. 교회 세미나를 갔을 때였다. 수현씨가 언덕 비탈에 핀 꽃을 꺾어 그에게 내밀었다. 1년쯤 뒤 다시 만나게 됐다. 그 때 첫 입맞춤을 했다. 수현씨에게서 전복의 감정을 느꼈다. 지금까지 알았던 사랑을 뒤바꿔놓은 거다.
-전 남편과 결혼할 때는 사랑해서 한 건 아니었나요?
“사람이, 그리고 조건이 좋았죠. 결혼 전에도 여러 번 남자들과 교제도 했어요. 내가 여자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상상을 못했어요. 그런데 이 친구를 만나면서 완전히 바뀐 거죠. 이혼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안주하는 삶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걸 버릴 정도로 확신이 있었나요?
“어느 쪽이 나한테 유리하고 안정적인가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내 존재의 이유, 내가 행복한가, 내가 나한테 충실한가가 중요하죠. 돈을 몇 억 원 갖고 있다 하더라도 내일 사고로 죽을 수도 있는 거예요. 나는 애초부터 나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나 자신이고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뭘 하기 전에 내가 이걸 진심으로 하고 싶은지에 따라 결정해왔어요. 남편하고 살면 평범했겠지만, 수현이한테 느낀 감정이 너무 절박했어요. 첫 키스를 하는 순간 ‘내 운명이 바뀌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죠.”
-신학을 공부할 때잖아요. 고민은 없었나요?
“그래서 그때 평소 따르던 교수님을 찾아갔어요. 이러저러하게 돼서 목사고 공부고 다 그만 둬야 할 것 같다고요. 그랬더니 그러셨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나를 받아들이겠나. 나를 먼저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 하자 없는 사람은 없다. 목사가 되든 안 되든 먼저 자신과 솔직하게 대화를 해보라.’”
그에겐 아마 최초의 지지자가 아닐까. 서른넷에 결혼했던 그는 3년여 만에 이혼하고 수현씨와 지금에 이르고 있다.
어머니도 변했다 “나도 한 번 여자랑…”
그는 외할머니를 떠나 보내고 ‘이제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하는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늘 판단의 기준은 자기의 마음이었다.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인지 늘 스스로 물어보죠. 그러니 지금까지 잘 살고 있고요.” 류효진 기자 |
-이혼하고 여자와 산다고 할 때 어머니 반응은 어땠나요?
“어머니가 찾아왔는데 시어머니가 왔는지 친정어머니가 왔는지 모르겠더군요. 밤새 남편과 내 흉을 보고는 나와 인연을 끊자고 하더라고요. 저도 좋다고, 언제는 크게 인연이 있었느냐고 했죠. 몇 년 뒤에 부활절 TV프로그램에 내가 나간 적이 있어요. 어머니가 그걸 보고는 방송사에 연락처를 수소문해서 전화를 하더니 집으로 찾아왔죠. 수현이와 산다고 하니까 눈으로 확인을 해야겠다면서요. 그런데 수현이가 일주일 동안 너무 잘해준 거예요. 어머니가 가면서 그랬죠. ‘나도 20년 젊었으면 여자랑 한 번 살아보고 싶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6개월쯤 우리가 사는 베를린에 머물렀는데, 그 때는 이렇게 말하시더군요. ‘나는 일생을 나를 위해 살았는데 너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살려고 신학을 공부했으니까 잘해보라’고.”
-그래도 어머니와 진정으로 화해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아요.
“어머니는 자기가 져야 할 책임마저도 거부하고, 아니 그런 걸 마치 모르는 것처럼 살았으니까요. 계부한테도 처음에 저의 존재를 말하지 않았죠. 나중에 계부가 그러더군요. 처음부터 얘기했으면 양자로 들였을 거라고. 그런데 어머니는 자존심이 상해서 말하지 않았던 거죠. 저와는 사는 게 완전히 달랐어요. 받아들이기 힘들었죠.”
어머니는 외할머니와 비슷한 폐질환을 앓다가 세상을 떴다. 간호사였던 수현씨는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도 정성을 다 했다. “병상에 누워서 누군가는 대소변을 받아 줘야 하는데 어머니가 저는 안 시키더라고요. 수현이가 그 수발을 다 들었어요.” 어머니는 화장을 해 유골을 바다에 뿌려달라고 유언했다. 평생 그랬던 것처럼 세상 곳곳을 여행하고 싶었던 거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독일서 죽을 텐데
김인선씨의 명함. 다양한 성 정체성을 상징하는 의미의 무지갯빛이다. 김지은 기자 |
그는 2004년 수현씨와 생명보험까지 헐어 호스피스 자원봉사 단체를 만들었다. ‘이종문화 간 호스피스-동행’이다. 2010년에 그 공로를 인정 받아 여성가족부와 삼성생명공익재단이 주는 비추미여성대상 특별상과 KBS 해외동포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재정난에 운영이 쉽지는 않았다. 결국 파산했지만, 다행히 2014년 독일인도주의협회에서 이어 받아 운영하고 있다. 이름도 ‘동반자’로 바뀌었다. 퇴직한 이후 그는 동반자의 슈퍼바이저(관리자)로 일한다. 호스피스는 죽음이 임박한 환자들이 편안하고도 인간답게 마지막을 맞을 수 있도록 돕는 봉사나 봉사자들을 일컫는다.
-동행은 왜 만들었나요?
“나도 독일에서 죽을 거 아니에요? 47년간 살면서 아무리 독일 사회에 적응을 잘했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죽음 앞에 섰을 때는 한국적인 걸 그리워하지 않을까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적극적인 지지자였죠. 그런 분이 아닌데 말이죠. 좋은 생각이라고 흐뭇해 했어요. 아마 다른 나라에서 오래 산 경험이 있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울 거예요.”
동반자는 그래서 호스피스들에게 각국의 문화, 종교, 언어를 두루 교육한다.
-신학과 호스피스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었나요?
“신학에서 보면 모든 생명은 존중 받을 권리가 있죠. 인간에 한정하면 본인의 마지막 순간도, 원하는 대로 행복하게 결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신학과 일맥상통해요. 돈이 있어야 잘 죽을 수 있는 건 아니죠. 특히 독일에 사는 이주민 중에는 형편이 어려워서 호스피스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들이 삶을 잘 마감하려면 사명감이 있는 사람이 해야 하지 않을까요. 독일에서도 이종문화 간 호스피스는 우리(‘동반자’) 밖에 없어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주목하게 된 이유가 뭔가요?
“끊임없이 일만 하면서 자기 자신을 정리하지 못한 채 소진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어야 한다고 하면 죽지 못해요. 저축만 해놓고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는 사람들도 있죠. 그러면 죽음과 싸움이 시작되는 거예요. 그러니 하루에 한 3분 정도는 내 인생이 내일 끝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대부분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아 하죠. 하지만 죽는 순간은 우리가 몰라요.”
-그간 지켜본 많은 죽음 중 인상적인 기억이 있다면요?
“내가 어릴 때 지냈던 수녀원의 원장님요! 원장님이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항암치료를 안 했어요. 그리곤 매일 기도하셨죠. ‘하나님 오늘은 데려가 주십시오’라고. 그런데 정말 자는 듯이 돌아가셨어요. 아침에 식사 드셔야 하니까 (수녀원 내의 병원) 근무자가 방에 가보니까 누워계시기에 아직 주무시나 했더니 가신 거예요.”
-마음이 아팠던 죽음은요?
“한국에서 온 파독광부 출신 남성이었어요. 그런데 독일 사회에 잘 적응을 못한 거죠. 친구도 없고 독일어도 잘 배우지 못하고요. 그러니 술에 의지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부부싸움도 많이 하게 돼서 부인과도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죠. 본인은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데 부인은 또 반대하고요. 그러다가 암에 걸린 거예요. 현실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 거죠. 저한테 3년만 살게 해달라고 지금 못 죽는다면서 매달리는데,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하나님도 아니고. 할 일이 태산 같으니 놓지 못하는 거죠. 내 생에 가장 젊은 날인 오늘을 잘 사는 사람이 잘 죽을 수도 있는 거예요.”
-암 투병 할 때도 생사를 진지하게 생각해봤을 것 같은데요.
“10년쯤 됐어요. TV를 보는데 유방암 자가진단법을 알려주더라고요. 그래서 따라 해보니까 뭐가 걸려요. 병원에 가보니 (종양이) 엄청 크다더군요.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해서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도 했죠. 머리가 다 빠지더군요. 하하. 항암치료는 정말 힘들었어요. 그렇게 독한 줄 몰랐어요. 정말 죽을 맛이었죠. 기운이 없어서 친구가 집에 찾아왔는데도 문을 열어주지 못해서 친구가 그냥 돌아간 적도 있어요. 수술 뒤 10년 동안 거의 매년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어요. 내가 수현이한테 올해부터는 안 갈 거라고 했더니 왜 그러느냐고 해요. 제가 그랬어요. ‘이 나이에 재발했다고 하면 다시 수술을 하겠어, 항암 치료를 하겠어. 그러면 병원에 가나 안가나 똑같아. 그냥 있으면 돼!’”
-호스피스 활동을 하면서 죽음을 늘 생각했을 텐데, 유언장도 혹시 미리 써두었나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수현이하고 함께 써놨어요. 회복 불가능한 불치병이라면 불필요한 연명치료 하지 말고 유골은 바다에 뿌려달라고요.”
-그것 말고 남기는 말은요?
“그건 뭐. 하나, 안 하나 소용 있나? 하하하. ‘잘 있어, 나는 간다!’ 하는 거죠.”
소진하며 살다가 죽음과 싸울 텐가
0인생의 길목마다 자신을 중심에 둔 선택으로 그는 행복을 얻었다. 삶의 그 같은 조각들이 모여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을 거다. 김인선씨의 다양한 얼굴 사진을 모아 콜라주 기법으로 표현했다. 류효진 기자 |
-죽음을 편안히 받아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평소에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가 중요해요.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면 어렵죠. 언제든 (죽을) 가능성이 있으니 오늘을 열심히 살자! 이름을 남기자가 아니라 오늘을 행복하게 살자! 그렇다면 내일 간다 해도 미련이 없을 거예요. 16시간 일하면서 6시간 겨우 자고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사는 게 사는 건가요? 그러다 죽는다고 생각해봐요. 억울해서 못 가는 거예요.”
움찔했다. 쳇바퀴에 있는 것 같아서.
-인터뷰로 기꺼이 자신의 얘기를 하는 이유가 궁금해요.
“재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호스피스로서 한국에 왔어요. 그런데 작년 디아스포라 영화제에 갔을 때 성소수자들과 얘기를 나누는 시간에 젊은 사람들을 보니 본인의 고민을 얘기할 데가 없어 갈급해 하는 것 같았어요.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동성애가 죄인가 하는 생각도 할 테고 말이죠. 수현이와 함께 거기서 커밍아웃을 했어요. 누군가는 앞에 나서서 ‘죄가 아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다 사랑하신다. 그러니 당당하라’고 말해야 할 것 같았죠. 그게 나와 수현이가 해야 할 몫이 아닌가 생각해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뭐 어때. 알려서 젊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도움이 된다면 못할 것도 없지’ 하는 용기가 생긴 거죠. 한국은 특히 기성세대가 많이 바뀌어야 하거든요.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데 제3자가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 말이 안돼요.”
-지금까지 살면서 지켜온 삶의 도가 뭔가요?
“내가 존중 받고 싶은 만큼 다른 사람도, 그가 누가 됐든 존중해주자. 동성애자들도 그런 눈으로 바라보면 좋겠어요. ‘괜찮아’라고 해야 하는데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면 되겠어요? 손가락질 할 때 세 손가락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죠.”
들어보니 쉽지 않은 인생길이었는데, 그는 참 쉽게 말했다. 그렇게 명쾌하게 살 수 있었던 비결은 이것일 테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나예요.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다 끝나요. 돈도, 명예도 다 소용없는 거죠.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 지금 행복하니까!”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