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뒹구는 박스… 폐지 줍는 노인마저 외면하는 이유
빈 박스가 거리에 나뒹굴고 있다. 한때 골목마다 수거 경쟁이 치열했던 폐지가 가격 폭락으로 외면 받고 있기 때문이다. 1일 서울 종로구 종로5가에 빈 박스가 어지럽게 쌓여 있다. |
지난달 20일 서울 도봉구 쌍문동 도로변에 빈 박스가 놓여 있다. |
1일 서울 종로구 길거리에 빈 박스가 놓여 있다. |
1일 서울 종로구 대로변에 어지럽게 쌓인 폐지 더미 앞을 행인들이 지나치고 있다. |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종로5가의 한 대형 약국 앞. 빈 박스 수십 개가 보행에 지장을 줄 정도로 어지럽게 쌓여 있다. 인근 골목에도 음식점에서 버린 상자 20여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빈 박스가 길바닥에 나뒹구는 풍경이 요즘 흔하다. 저소득층 노인들의 주 수입원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내놓으면 사라진다’고 할 만큼 귀했던 박스가 어쩌다 발길에 치이는 ‘쓰레기’로 전락했을까.
“돈이 안 되니까 재깍재깍 안 가져가지.” 리어카에 빈 박스를 넘치게 싣고 약국 앞을 지나던 김덕률(57)씨가 말했다. “왜 돈이 안 되는데요?” 궁금증을 안고 리어카를 뒤쫓았다.
#1 반토막 난 폐지 가격
김씨는 “지난 일주일간 모은 박스를 고물상에 팔러 가는 중”이라고 했다. 창신동 쪽방촌에 사는 그는 매일 새벽 4시부터 동문시장 등지를 돌며 수집한 폐지와 고물 등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집 인근에도 고물상이 있지만 박스 가격을 ㎏당 30원 밖에 쳐주지 않아 1㎞ 넘게 떨어진 연지동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리어카를 끈다.
고물상에 도착해 무게를 달아 보니 405㎏, 김씨 손에 2만1,000원이 쥐어졌다. ㎏당 50원가량 쳐준 셈이다. 2년 전에 비하면 반토막도 안 되지만 그나마 단골이라 우대받은 가격이다. 최근 수도권 폐 골판지 소매 시세는 ㎏당 40원. 김씨는 “박스 값이 이렇게 떨어지니… 밥벌이는커녕 손주들 과자 값도 안 되는데 누가 박스를 줍겠나. 우리 같은 사람들이 수거를 해야 길거리도 깨끗해지는데…”라며 한숨을 쉬었다. 궁금증이 이어졌다. 폐지 가격은 왜 떨어졌을까.
김덕률(57)씨가 지난달 27일 1주일간 모은 박스 폐지를 리어카에 가득 싣고 서울 종로구 연지동의 고물상으로 향하고 있다. |
고물상에서 측정한 폐지의 무게는 405㎏, 김씨는 이날 2만1,000원을 손에 쥐었다. |
지난달 30일 경기 하남시의 한 재활용업체 바깥에 베일(압축 폐지)이 성벽처럼 쌓여있다. |
지난달 30일 경기 부천시 소재 한 재활용업체 야적장에 4,500톤 가량의 폐지 재고가 쌓여 있다. |
#2 폐지 적체로 재활용업계도 타격
“중국에서 폐지를 안 받으니 우린들 별수 있나?” 고물상 대표가 가격 하락의 원인으로 중국을 지목했다. 중국은 지난해부터 폐지, 폐 플라스틱 등 24종의 쓰레기 수입을 전격 중단했다. 주요 수출길이 막히면서 폐지 적체 현상이 빚어졌고, 공급의 과잉은 시장 가격 하락으로 이어졌다.
폐지 적체 실태는 심각했다. 지난달 30일 경기 부천시 소재 한 재활용업체 야적장에 들어서니 직육면체의 1톤짜리 ‘베일(Baleㆍ압축 폐지)’ 수천 개가 꽉 들어차 있었다. 총 4,500톤, 평상시 재고량의 10배가 넘는 양이다. 27일 찾아간 경기 하남시 한 업체는 부지 밖까지 재고가 쌓여 있을 정도였다. 정윤섭 한국제지원료재생업협동조합 전무이사는 “업체마다 쌓인 폐지가 다 돈이다. 수집인들이나 소규모 고물상에서 폐지를 가져오면 안 받을 수 없어 값을 쳐줘야 하는데, 유동자금이 야적장에 묶여 있으니 자금 부족이 심각하다. 이제껏 이런 사태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3 호황 누리는 제지업계
이 같은 상황에서 골판원지 등을 생산하는 제지업계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원재료인 폐지 가격이 낮아진 데다 인터넷 쇼핑의 성장으로 택배용 박스 수요가 늘었기 때문인데, 업계에 따르면 골판지 업체 ‘빅 3’의 경우 지난해 말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최소 3배, 최고 17배까지 늘었다. 서울 도봉구에서 고물상을 운영하는 최(48)모씨는 “폐지 가격이 내리니까 박스 만드는 공장(제지업체)들은 수익이 많이 나고 주식도 두 배, 세 배씩 올랐다고 하더라. 공장 밑으로 중간 도매상, 우리 같은 소매상,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다 힘든 상황”이라고 푸념했다.
#4 “상생 외면" 제지업계 향한 불만도
재활용업체들은 제지업체들이 상생을 외면한다며 불만이다. 정 전무이사는 “제지업체들이 폐지에 수분이 많다거나 테이프와 같은 불순물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무게를 깎아 가격을 매기는 ‘감량’을 해 왔는데 측정 장비 없이 눈대중으로 하고 있어 부당한 갑질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며 “지난 4월 환경부와 제지업계, 재활용업계 등이 모여 이 같은 관행을 근절하고 상생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이행 소식은 없다”고 말했다.
폐지 수입을 늘리는 부분도 재고 처리가 절실한 재활용업체로선 불만이다. 실제 폐 골판지 수입량은 지난해 1월 2만9,000여톤에서 올해 8월엔 5만여톤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이에 대해 한국제지공업협동조합 관계자는 “인터넷 쇼핑의 성장으로 박스 수요가 증가한 결과일 뿐”이라며 “상자 겉면은 튼튼해야 하는데 재활용을 여러 차례 거친 국산 폐지는 품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질 좋은 수입 폐지를 쓸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30일 경기 시화공단 내 한 제지회사 야적장에서 컨테이너에 실려 온 수입 폐지 운반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
지난달 30일 경기 시화공단 내 한 제지회사 야적장에 폐지와 이를 원료로 생산한 골판지원지가 쌓여 있다. |
지난달 30일 경기 시화공단 내 한 제지회사 야적장에 폐지가 쌓여 있다. |
#5 가격 회복 안 되면 폐지 생태계 붕괴될 수도
전문가들은 폐지 재활용 생태계의 붕괴를 경고하고 있다.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장은 “폐지 가격을 회복하지 못하면 당장 폐지로 생계를 이어 가는 노인들이 타격을 입고, 이들의 수거 포기가 복지 비용 부담, 지자체의 수거 업무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며 “재활용 산업 전반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제지업체의 국내 폐지 의무 사용량을 늘리는 등 정부 개입이 필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환경부는 2일 “재활용 유통시장은 불안정적이므로 가격 변동뿐 아니라 업계 유통 상황 전반에 대해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서강 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윤소정 인턴기자
지난달 26일 경기 하남시 소재 한 재활용업체에 폐지 재고가 쌓여 있다. |
지난달 20일 서울 도봉구의 한 재활용업체에서 오점순(78)씨가 폐지와 고물을 팔아 받은 300원을 보여주고 있다. |
1일 서울 종로 거리에 폐지 등이 수북이 쌓인 리어카가 세워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