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불온한 여자들이 귀환한다
런던,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 등 당대 유럽 신여성들 분석
임옥희 ‘물신주의자, 레즈비언 뱀파이어, 붉은 투사…’ 나눠
파리의 레프트뱅크에 레스보스의 사피즘을 이식하려 한 내털리 바니의 정원에서 연 이교적 의식. 여이연 제공 |
메트로폴리스의 불온한 신여성들/임옥희 지음/여성문화이론연구소·2만원 |
페미니스트 인문학자 임옥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1920년대 런던,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 거리를 활보한 ‘불온한’ 신여성들을 분석했다. 임 교수는 2010년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에서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폭력적인 상태와 타자를 먹어야 살 수 있는 뱀파이어 주체를 검토한 바 있다. 당시 대안으로서 주변과 공존을 시도하는 ‘채식주의자 흡혈귀’를 내세웠는데, 이는 페미니즘에 입각한 변신과 결단을 촉구하는 이론적 작업이었다.
꼭 10년 뒤인 2020년, 지은이는 100년 전인 1920년대로 거슬로 올라가 신여성들을 무덤에서 불러 일으키고,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놀라운 혼종성, 전복성, 급진성, 전위성을 드러낸다. 책을 읽고 나면 그들의 ‘후손’이 왜 이어지지 않고 사라졌다가 다시 ‘출현’한 것처럼 보이는지 질문하게 된다.
서론을 보면, ‘신여성 현상’은 서구적 근대화가 진행된 메트로폴리스에서 공통된 것이었다. 이들은 남성지배체제 아래 본인들의 삶이 크게 제약받고 있음을 인식했고, 남성 지배체제에 충성하고 배신하고 협력하고 저항했다. 1920년대 유럽을 주름잡던 여성들은 대개 예술가 또는 혁명가들이었다. 책은 이들을 물신주의자, 레즈비언 뱀파이어, 젠더퀴어 멜랑콜리아, 히스테리증자, 붉은 혁명 투사로 나눠 설명한다.
“당대 최고의 레즈비언”으로 알려진 내털리 바니의 초상. |
메트로폴리스의 여성 산책자들은 남성처럼 옷을 입고 글을 쓰고 성별 노동분업과 젠더 규범에 저항했다. 그들의 패션과 복장의 정치는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의 구별짓기 정치를 거스르는 것이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맹렬하게 살다 간, 위험한 여성 문인과 예술가 들을 일일이 거명하고 되살려낸 것이다. 그 중 파리 센강 왼쪽 지구에 모여든 ‘레프트뱅크’ 레즈비언 여성들에 유독 눈길이 간다. 내털리 바니, 주나 반스, 래드클리프 홀, 거트루드 스타인 등 내로라하는 퀴어 작가·예술가들은 ‘사포식 섹슈얼리티로서 레즈비언 사랑’(사피즘)을 발견하려 했다. 지은이는 아감벤의 용어를 빌려 그들이 “동시대인으로서 지금, 여기로 귀환하고 있다”며 이 ‘레즈비언 코뮌’이 “신화 속 남성의 자리에 여성을 기입함으로써 레즈비언 신화로 재활용하고 재배치했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여성 계보, 여성 신화, 여신 이야기”를 새로 썼다.
래드클리프 홀의 1930년대 모습. 출처 위키피디아 |
내털리 바니와 그의 연인 르네 비비앙. 출처 위키피디아 |
그밖에도 책은 1928년에 동시에 출판되었으며 레즈비언이라는 주제를 다룬 주나 반스의 <숙녀 연감>,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와 래드클리프 홀의 <고독의 우물>을 비교한다. 한가지만 밝히면, 반스와 울프는 레즈비어니즘을 장난스럽거나 환상적으로 처리한 반면 홀은 여성들끼리의 사랑을 진지하고도 사실적으로 묘사했기에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책 뒷부분에서는 권위의 절정에 이른 1920년대 프로이트에 맞서 여성 정신분석가들이 크고작은 전쟁을 벌인 이야기나 붉은 혁명전사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경성의 콜론타이’ 허정숙 등 붉은 여전사들 이야기가 펼쳐진다.
지은이는 “백년의 시차를 가로질러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배치”라고 밝혔다. 놀랄 만큼 전복적이고 전위적이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발굴해 ‘20세기 마녀’를 복원하는 이 책은 ‘채식주의자 뱀파이어’ 프로젝트의 연장 같다. 그들은 모두 아직까지 살아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충분히 다 죽지도 않았다. “레즈비언 뱀파이어들, 서프러제트들, 적군을 사랑하여 조국을 배신한 부역자 여성들, 남자를 갈아치우고 재산을 탕진하는 타락한 여자들, 앓아눕거나 분노하는 히스테리여성들”은 비난 속에 다 함께 돌아오고 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