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데시벨’ 가장 높은 순간, 질주하는 액션의 힘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재개봉작 <드라이브>
초침 소리까지 정밀 계산된
고요와 액션 ‘세련된 조화’
독보적 절제의 멋 보여줘
“그 남편 빚 대신 갚아주려고
강도질하는 놈은 처음 본다”
남편·애 있는 여자 사랑하는
주인공 역할 라이언 고슬링
특유 표정연기 ‘감정 증폭기’
![]() 온화할 땐 온화함을 더, 난폭할 땐 난폭함을 더 증폭시키는 라이언 고슬링을 필두로 케리 멀리건, 브라이언 크랜스턴, 앨버트 브룩스, 오스카 아이작, 론 펄먼 등 쟁쟁한 배우들의 연기가 압권이다. ㈜풍경소리 제공 |
지난 2011년 공개되었을 당시, 미국 미시간주에 거주하는 한 관객이 이 영화배급사와 영화를 상영한 멀티플렉스를 고소했다. ‘이 영화 예고편에서는 <분노의 질주> 시리즈 냄새를 잔뜩 풍겼는데 실제로 영화를 보니 전혀 그런 카인드 오브 영화가 아니다. 자동차 액션도 너무 없고’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니까 내용적으로 ‘이 가게에서 나는 고기 굽는 냄새에 끌려 들어왔는데 맛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달랐으니 환불 요구’와 거의 다를 바 없는 이 사건(의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아시는 분은 알려주세요)이 말해주듯 <드라이브>는 당시 ‘자동차 액션 영화’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는 영화였다. 물론 세련되고도 섹시한 방향으로.
그 독보적인 멋들어짐은 9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광택을 발한다. 이 영화의 이름 없는 주인공(라이언 고슬링)이 걸치고 나왔던, 황금 전갈 등판에 아로새겨진 누비 점퍼가 발하던, 얼룩지고 때 타고 피에 절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던 은백색 광택처럼 말이다.
위험해지기로 했다, 그의 남편을 위해
사실 이 영화의 공개 당시 극과 극으로 갈렸던 반응 중 부정적인 쪽도 충분히 납득 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이 영화는 처음부터 작정하고 ‘복잡하지 않은 로맨스’를 표방하고 들어가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냥 한방에 한눈에’ 이외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는, 이웃집 여인 ‘아이린’(케리 멀리건)에 대한 주인공의 사랑 및 헌신은 사실, 전통적 방식의 이야기 전개와 그 재미에 무게중심을 두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는 상당히 거부감 들 법한 설정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주인공의 사랑은 아이린뿐 아니라 그의 어린 아들에게까지 단숨에 뻗어나간다. 게다가 이 사랑은 아이린이 이혼녀도 배우자 사별녀도 아닌 그냥 유부녀이며, 그의 남편이 현재 감옥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도 변함없이 유지된다.
그로도 모자라 주인공의 사랑은, 얼마 뒤 감옥에서 나온 아이린의 남편 ‘스탠더드’(오스카 아이작)에게까지 두루 널리 미친다. 주인공은 감옥에서 빚을 지고 나온 스탠더드가 지역 조폭들로부터 빚 탕감을 위한 ‘한탕’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 위험한 한탕에 자진 합류해 그의 필살기―딱 5분 동안만 완전히 의뢰인의 사람이 되어주며, 그 5분 동안만은 경찰 헬기조차 따돌리는 놀라운 운전 실력(이라기보다는 도주 전략)으로 의뢰인의 일신의 안위를 책임진다―를 기꺼이 헌납한다.
![]() 아름답기도 끔찍하기도 냉정하기도 따뜻하기도 한 모든 상황에 적절한 고속촬영, 자신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인공적 조명, 잘 다듬어진 대사가 특징인 영화 <드라이브> 는 다루고 있는 무기의 한발 한발이 낭비 없이 모두 목표에 가 박히는 저격용 라이플 같은 영화다. 이름 없는 주인공(라이언 고슬링·오른쪽)이 사랑하는 여인의 남편을 위해 복수하는 이야기다. ㈜풍경소리 제공 |
더구나 (스포일러 있습니다) 주인공은 스탠더드가 한탕 중 예기치 않게 사망하고, 주인공이 일하던 카센터 사장이자 거의 유일한 친구(인 듯 아닌 듯한 미묘한 관계)인 ‘섀넌’(브라이언 크랜스턴)까지 죽임을 당하자, 이 모든 일을 꾸미고 지시하고 저지르고 덮으려는 지역 보스 두명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로 한다.
자, 이 대목에서 우리 모두 솔직하게 얘기해보자. 춤을 춰도 모자란 상황, 이라고 하면 너무 경박한 언사이겠다만, 그래도 사랑하는 여인의 그리 사랑하지도 않고 그리 신통치도 않은 남편이 사망했는데, 그 남편을 죽인 로컬 조폭 보스 두명과 전쟁을? 그것도 혈혈단신으로?
뭐, 이 로컬 보스들이 간단한 제압이 가능한 허술한 자들이면 모르겠으나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 피자가게 사장으로 위장하고 있는 그들 중 한명인 ‘니노’(론 펄먼, 그는 짐 자무시의 <고스트 독>의 조폭 대장 ‘바르고’(헨리 실바)를 다분히 연상시킨다)는 그저 위협적인 비주얼에 목소리만 큰 공수표라 쳐도, 그의 파트너이자 이 영화의 수석 나쁜 놈인 ‘버니’(앨버트 브룩스)는 실제로 상당히 무시무시한 인물인데 말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의 진 해크먼을 다분히 연상시키는 이 인물은, 다름도 아닌 식사 도구인 포크를 가지고 저지르는 만행으로 9년 전 영화 공개 당시 많은 사람들을 경악시켰더랬다. 하지만 사실 버니의 무시무시함은 카센터 사장 섀넌과의 악수 도중 돌연 자행된 공격 및 그 공격 도중 상대를 어르듯 달래듯 “괜찮아. 걱정 마. 걱정 마. 이제 거의 끝났어”라고 중얼거리는 대사에서 정점을 찍고 있는데, 아무튼, 각설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아닌 게 아니라, 주인공의 이러한 모든 것 다 내던지는 사랑에 대해서는 영화 스스로도 좀 그렇다 싶었던지, 영화는 카센터 사장 섀넌의 입을 빌려 “유부녀랑 엮이는 녀석들은 많이 봤지만, 그 남편 빚 갚아주려고 강도질하는 놈은 처음이다”라고 말하고 있기까지 하다.
뿐만 아니다. 사실 작정하고 들어가면 이 영화가 생략하고 건너뛰고 퉁치고 밀어붙인 각종 설정과 전개들은 비판하려면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겠다. 통상적인 상업영화의 이야기 방식에서 보면 말이다.
![]() 이름 없는 주인공(라이언 고슬링)의 사랑은 아이린(케리 멀리건)뿐 아니라 그의 어린 아들에게까지 단숨에 뻗어 나간다. 게다가 이 사랑은 아이린이 이혼녀도 배우자 사별녀도 아닌 그냥 유부녀이며, 그의 남편이 현재 감옥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도 변함없이 유지된다. ㈜풍경소리 제공 |
하지만 바로 이 대목이야말로 <드라이브>가 가진 옥탄가 높은 섹시함의 핵심이다. 최대한 문자매체적인(≒ 소설적인) 이야기 수단은 배제하고, 영화적인 이야기 방식이 가진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 순수 영화적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올리려는 의도를 밑바닥에 깔고, 그것을 저만의 방식으로 실현해내고 있는 덕분에 이 영화의 스타일은 휘발성 멋부리기나 얄팍함을 덮으려는 허세에 그치지 않고 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재형으로 남을 수 있다.
들숨 날숨에 조율된 리듬을 타고
특히나 오랜만에 다시 봐도, 이 영화가 사운드를 사용하는 방식은 건강에 해로울 정도의 세련됨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오프닝에서 깔리는 카빈스키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나이트콜’의 섹시함이나, 주인공이 카센터 사장 섀넌의 주검 앞에서 눈물을 흘린 뒤(이는 이 영화에서 그가 흘린 유일한 눈물이다) 스턴트 대역용 가면을 쓴 채 피자가게 유리문을 통해 조폭대장 니노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는 슬로모션에 깔리던 리츠 오르톨라니의 ‘오 마이 러브’(1971년 이탈리아 영화 <안녕, 톰 아저씨>에 사용된 곡)가 안기는 소름 돋을 정도의 애수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요 10년 내에 이 장면에 필적할 만큼 절묘한 선곡도 없었을 것이다).
<드라이브>는 모두가 목청을 높일 때는 침묵의 음량이 가장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오 마이 러브’가 흐르는 장면에서뿐 아니라, 이 영화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들, 즉 스탠더드가 죽게 된 그 문제의 한탕에 함께 가담했던 배경 불상의 여인(하긴 주인공부터 시작해 이 영화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렇다) ‘블랜치’(크리스티나 헨드릭스)가 주인공과 함께 피신한 모텔방에서 당하는 돌연한 샷건 습격 장면에서 증명되고 있다. 또는 주인공이 해야 할 마지막 일을 마치고 차 운전석에 앉아 있는 장면에서도.
이 최소한으로 걸러진 사운드 덕분에, 사소한 소리들도 모두 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주인공이 전당포를 털러 들어간 스탠더드와 블랜치를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장면에서의 시계의 초침 소리, 공회전하는 엔진 소리,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차를 보고 주인공이 주먹을 움켜쥘 때의 가죽장갑 소리는 어떤 대사나 음악보다 효과적으로 감정을 드러내고 긴장을 고조시킨다.
![]() 이름 없는 주인공(라이언 고슬링)의 사랑은 아이린(케리 멀리건)뿐 아니라 그녀의 어린 아들에게까지 단숨에 뻗어 나간다. 게다가 이 사랑은 아이린이 이혼녀도 배우자 사별녀도 아닌 그냥 유부녀이며, 그녀의 남편이 현재 감옥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도 변함없이 유지된다. ㈜풍경소리 제공 |
물론 사운드는 이 영화의 많은 무기들 중 일부분일 뿐이다. 아름답기도 끔찍하기도 냉정하기도 따뜻하기도 한 모든 상황에 적절한 고속촬영, 자신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인공적 조명(맞다. 그 유명한 엘리베이터 키스 장면 얘기다), 돌연하고도 노골적인 존 카펜터 풍의 폭력, 잘 드러나진 않지만 잘 다듬어진 대사(예컨대, 조폭 두목 버니의 악수를 거부하며 주인공이 던지는 “제 손이 좀 더러워서요”에 버니가 돌려주는 “나도 그런데”) 등등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무기는 소리만 요란하고 적중률은 형편없는 기관총이 아닌, 한발 한발 낭비 없이 모두 목표에 가 박히는 저격용 라이플이다. 그리고 관객의 들숨 날숨에 맞춰 실로 적절히 조절된 리듬 위에, 온화할 땐 온화함을 더, 난폭할 땐 난폭함을 더 증폭시키는 특유의 부드러운 무표정을 원 없이 보여주는 라이언 고슬링을 필두로 브라이언 크랜스턴, 앨버트 브룩스, 오스카 아이작, 론 펄먼 등등의 쟁쟁한 배우들의 존재 및 연기가 더해진다.
시끄러운 세상에서 만난 ‘쿨한 침묵’
이 모두는, 이 영화가 조폭 두목 버니의 입을 빌려서 “80년대 액션 영화. 섹시한 거. 평론가는 유럽풍(필시 이는 장뤼크 고다르나 장피에르 멜빌을 가리키는 것이리)이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쓰레기”라고 말하는 영화들, 즉 ‘엘에이(LA) 네오 누아르’라고 불리기도 하는 1970~80년대 엘에이 배경의 ‘고독한 승냥이’형 범죄액션 영화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 위에 얹어져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의 직계 조상 격인 월터 힐의 <드라이버>(1978)나 마이클 만의 초기작 <도둑>(1981)을 필두로, ‘고독한 승냥이 액션’의 출발점이자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는 영향력인 장피에르 멜빌의 <사무라이>(1967), 그리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세르조 레오네, 오우삼(우위썬), 윌리엄 프리드킨, 존 카펜터 같은 감독들의 작품들을 우리는 어렵잖게 불러낼 수 있다. 그것은 과연, 타란티노가 초기에 보여준 영화광적 흥분을 다시 느끼게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니콜라스 빈딩 레픈 감독의 이후 작품들이 <드라이브>만큼의 흥분을 끌어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드라이브>의 멋을 휘발시키진 못한다. 기회를 잡았다 싶으면 가용한 모든 것들을 투입하고, 그 과잉 물량이 내뿜는 최고 음량을 최대한 오래 지속시켜 단번에 대세를 굳히려 하는, 하여 결국 듣는 이의 청력만 둔하게 하는 부르짖음이 대기에 가득한 요즘, 침묵과 절제의 힘을 아는 이 영화의 쿨함은 새롭다. 오히려 영화가 나왔던 9년 전보다도 더.
▶ 한동원 영화평론가.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의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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