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에도 장미의 향기가 필요하다…코로나19 정신적 방역활동
코로나19 이후 문화예술계
연극 ‘화전가’ 무기한 연기
007 시리즈 개봉도 11월로
한국 박스오피스 1위 기록한
‘엽문4’는 하루관객 4700명
무료 온라인 공연 ‘임시방편’
작품은 관객과 만나야 생명력
오프라인 위축, 온라인도 침체
정신 방역활동 미래 고민해야
윤성현 감독의 신작 <사냥의 시간>은 코로나19로 극장 개봉을 취소하고 넷플릭스를 통해 영화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주연배우 이제훈(준석 역)이 심각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넷플릭스 예고편 갈무리 |
부산에 사는 지인이 울분을 토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한달이 넘었다. 국립극단 창단 70주년 기념작으로 지난 2월28일부터 3월22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될 예정이었던 배삼식 작가의 연극 <화전가>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개막도 못 해보고 무기한 중단됐기 때문이다. <화전가>의 주연배우인 예수정의 열렬한 팬인 지인은 살면서 쌓인 온갖 스트레스와 울분을 예수정 덕질을 하는 것으로 간신히 풀던 사람이다. 공연 소식을 듣자마자 일정을 체크해 표를 구하고 서울로 오는 교통편을 마련하던 지인은 개막 사흘 전 공연 중단 소식이 들려오면서 졸지에 삶의 낙을 잃었다. 밥을 먹다가도, 공부하다가도 불쑥불쑥 떠오르는 <화전가> 생각에 지인은 하루에도 몇번씩 울분을 쏟아낸다. 배삼식 작가의 팬인 나 또한 비슷한 심정이지만, 예수정을 바라보는 팬심 하나로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올 계획이었던 내 지인의 분노만 할까.
연극만 상황이 이런 게 아니다. 지난 2일 한국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영화는 견자단(전쯔단) 주연의 액션영화 <엽문4>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으로 확인한 <엽문4>의 4월2일 기준 관객 수는 총 4799명. 전국 170개 스크린에서 하루 503회 상영하며 세운 기록이니, 평균적으로 한번 상영할 때마다 10명도 채 안 되는 관객이 든 셈이다. 상황이 이러니 영화 개봉을 무기한 미루거나 아예 취소하는 사례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007 시리즈의 스물다섯번째 작품 <노 타임 투 다이>는 개봉을 4월에서 오는 11월로 연기했고, <원더우먼 1984> 또한 개봉일을 확정하지 못한 채 표류 중이다. 윤성현 감독의 9년 만의 신작 <사냥의 시간>은 국외 세일즈사와의 법적 분쟁을 각오하면서까지 극장 개봉을 취소하고 넷플릭스를 통해 영화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사람들은 극장 나들이 대신 넷플릭스를 통해 <킹덤2>를 보거나 왓챠플레이에서 <이어즈 앤 이어즈>를 보면서 버티는 중이다.
온-오프라인 선순환
우리는 매일 우리가 쌓아왔던 세계가 놀랄 만큼 감염병에 취약한 구조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며 놀라고 있다. 코로나19가 언젠가 종식이 된다 하더라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대수롭지 않은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신종 감염병의 창궐 주기는 갈수록 짧아지고 있으니, 상시적인 방역 태세를 갖추며 살아가는 것이 새 시대의 일상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므로 코로나19 이후의 문화예술이 달라질 것이라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사방에서 홈 엔터테인먼트의 급성장세를 예측하며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지각변동을 이야기하는 분석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늘 산업 규모에 견줘 천대받던 게임의 사회적 지위가 갑자기 급성장할 것이라는 분석부터, 공연 등 오프라인 기반 극장산업 위축이 코로나19 사태로 가속화될 것이며 넷플릭스나 왓챠플레이, 애플티브이와 유튜브 등의 온라인 기반 엔터테인먼트가 그 자리를 채울 것이라는 분석까지. 위기로 인해 달라질 일상과 그 속에서 발견할 기회에 대한 이야기들이 도처에서 튀어나온다.
그러나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바탕으로 미래를 전망하는 것과,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미래를 개척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지금이야 온라인을 통해 무료로 공개되는 각종 공연 실황을 보고 미술작품을 감상하며 지친 마음을 달랠 수 있고, 넷플릭스나 유튜브로 콘텐츠를 즐기는 것이 미래의 표준이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만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떤 종류의 예술은 반드시 관객을 직접 만났을 때만 그 힘을 발휘한다. 연극이나 뮤지컬을 녹화 실황 중계로 보는 것과 직접 객석에서 보는 것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반가사유상을 사진으로 보는 것과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직접 보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체험이며, 관람객의 참여로 인해 실시간으로 작품의 최종 형태가 변경되는 실험적인 행위예술 등은 현장성 없이 이야기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쉽게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지각변동을 이야기하는 건, 누군가는 더는 예전과 같은 예술활동을 하는 일이 영영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의미와 같다.
온라인 전송이 가능한 영상 콘텐츠 또한 관객과 직접 소통하는 형태의 예술이 튼튼하게 저변을 지켜주었을 때 비로소 풍요로워질 수 있다. 영상 매체를 통해 대중을 웃고 울게 해주는 퍼포머 대부분은 연극이나 뮤지컬, 공개 코미디 등의 공연 예술을 통해 경험을 쌓고 검증받는 과정을 거쳤다. 또한 공연예술은 상업성이 검증 안 된 탓에 영상 매체로는 제작이 어려운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서사들을 배양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이처럼 공연예술을 통해 실험되고 검증된 새로운 인물과 서사들은 서사 기반 예술 전반으로 뻗어나가 전체 토양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가수들의 인기 또한 단순히 온라인에서의 활동만으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그 인기의 실체를 오프라인을 통해 확인함으로써 유명세를 과시하고 그 홍보 효과를 통해 다시금 인기를 강화하는 식의 온-오프라인 선순환 사이클로 유지된다. 온라인 기반의 예술 활동이 대세이고 주류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주류는 오로지 오프라인만이 제공할 수 있는 다양한 시도와 풍성한 저변이 뒷받침되었을 때에 힘을 발휘한다. 그러니 오프라인 기반의 예술이 흔들리기 시작한다면, 당장은 아닐지 몰라도 결국 온라인 기반의 대중문화 예술도 서서히 침체를 겪을 수밖에 없다.
온라인 공연, 합리적 가격은
국립극단이 창단 70주년 기념작으로 공연을 준비했던 <화전가>는 코로나19로 개막이 무기한 연기됐다. 맨 왼쪽이 배우 예수정. 국립극단 제공 |
상시적인 방역과 가벼운 물리적 거리 두기가 새로운 일상으로 자리잡을 코로나19 이후의 세계에서 문화예술의 가능성을 최소한 그 이전 수준까지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우리는 이야기하기 시작해야 한다. 향후 또 다른 감염병 사태가 터졌을 때를 대비하려면 극장과 공연장, 전시장 등의 구조는 어떻게 변경해야 할 것인지, 모두가 안전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 만한 객석 간격과 동선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모든 외부활동 자제 권고가 내려진 시기가 되면 오프라인 기반의 예술활동을 하던 이들은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 지금 당장은 대중을 위로하기 위해 무료로 풀리기 시작한 온라인 공연 중계를 언제까지 무료로 제공할 수 있을지, 과금한다면 합리적인 수준은 어느 정도일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시급하다.
물론 혹자는 말할 것이다. 문화예술이 아무리 인생을 풍요롭게 만든다 하더라도 생명만큼 중요하지는 않으며, 공공보건을 위해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예술의 영토가 다소 줄어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나 또한 굳이 그 둘을 나누어 경중을 따져야 한다면 생존이 문화예술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더 중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문화예술이 생존에는 불필요한 사치인 걸까?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코로나19로 집 안에 갇힌 채 발코니로 나가 다 함께 노래를 합창할까? 자가격리에 들어간 네덜란드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왜 유튜브를 통해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 합주에 나선 걸까? 왜 국립극단 배우들은 대본집 낭독 영상을 무료로 공개하고, 미국 심야 토크쇼 호스트들은 집에서 직접 찍은 열악한 화질의 영상으로나마 시청자들을 만나길 포기하지 않는 걸까?
그건 인류가 생존을 위해 문화예술이 주는 즐거움을 간절히 갈구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사진 한장, 좋은 노래 한곡, 재미있는 드라마 한편은 황폐해진 인간의 심리를 위로하고 잠시나마 고통을 잊게 해준다. 문화예술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정신활동이고, 따라서 코로나19와 같은 재난에도 문화예술의 건강함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것 또한 일종의 정신적 방역활동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그 어떤 상황에서든 빵만으로 살아갈 수 없어서 장미가 있어야 하는 존재다. 우리가 미증유의 재앙 앞에서도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으며 버텨내려면, 우리를 웃게 해주고 희망을 가지게 해주는 이들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당장 오늘부터라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내일은, 너무 늦을지 모르니까.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